✨공주✨ [541907] · MS 2014 · 쪽지

2018-12-26 15: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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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일탈의 기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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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준비할 적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밤 거리에서

루핑된 멜로디가 던지는 아찔한 감각에 취한 것에 혐오증을 느낀 적이 있다.


‘루핑’. 그것이 너무 싫었다.

4분의 4박자 4마디 씩 처리하는 반복되는 래핑구간과,

라임, 그리고 의미심장한 펀치라인이 더 이상 내게

낯설다기 보다는 너무 당연하다고 느껴졌기에.


-한 사람의 시는, 한 사람의 외설적인 신음.


내 생활 또한 그러한 루핑과 다를 바 없었기에,

그 혐오감은 곧, 무력감과 안일함으로 바뀔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알던 현실은, 그렇게 반복적으로,

지겨우리만치, 올 곧게 다가왔고, 그로 인해

나는 그 속에서 어떤 생기도 느끼지 못했던 것.


생명이 죽어가는 그 과정은, 안타깝게도

수능이 끝나고도 반복되었다.


여전히, 내 귀에는 루핑된 멜로디가 들려왔고,

내 뇌에는 그 멜로디에 취하라는 명령이 존재했으며,

내 몸에는 그 멜로디에 취해 아찔한 춤을 추는 활동이

베어있었다.


그리하여, 크리스마스가 끼어있는 주에는

그 생기를 되살려 보겠노라 다짐했고

그 해법을 ‘살아나는 일탈’이라 상정했다.


윤기준이 무진행 버스 안에서

6월의 공기에 스르르 눈을 감아보는

아찔한 일탈감을 상상하며.


-강남 K문구에서 

내가 소설을 읽기 위해 서점을 간다는 것은, 일탈이다.

나는 책을 좋아하지도 않았기에 애초에 그 공간과

나는 조화될 수 없고, 백 번 양보해서 간다고 하더라도,

만화책을 찾아 나서기 일쑤였으므로.


내가 들었던 책은, 박완서가 쓴 ‘나목’이라는 책이었다.

수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박수근 화백에 해당한다는

옥희도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긴장하였다.

과연, 이 일탈이 주는 강박과 죄책감을

몇 시간이나 버틸런지.


아마도, 1시간 내외로 빠져나오게 되지 않을까란 생각에,

마음 편히 자리를 잡았다.


그 말은 즉슨, 나는 옥희도에게 관심이 있다고

러브레터를 보냈으나, 그가 내게 보내는 그에 대한 답장을

회피하려는 일종의, 전략적 기제를 발동시켰던 것.


허나, 예상 외로 옥희도는 내게 더욱 강렬히 남아있었다.

그 기제를 이길 만치, 내가 생각하는 일탈의 이유와 매우 맞닿아 있는 사람. 생기를 지키려는 자. 생기를 사랑하는 자.


예상과는 달리, 4시간 가량을 옥희도와 재회하는 데에

썼다. 일탈 안에서, 또 다른 일탈을 해버렸던 것.


-왕십리 E-S PC방에서

서점을 가고 나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남은 시간을 이 곳에서 보냈다. 

역시, PC방에 나라는 사람이 몸을 담구려는 것 또한

일탈이었다.


고3 수험생활 부터, 재수생활 까지, 공부를 해야한다는

압박감에, PC방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강남 R 학원을 다닐 때에도, 눈을 돌리지 않았던

그 낯선 공간에, 내가 발을 딛는다는 것은, 결국

내게는 일탈로 규정되었던 것.


-저기, 신분증좀 보여주세요.


-네? 아, 제가 대전에서 급히 올라온 빠른00 수험생이라서

민증은 지금 없고, 수험표는 보여드릴 수 있는데 이 것도

되나요?


그 후 알바 직원은, 그 때 내가 보고있던 J사의

홈페이지 배경에 익숙해 하며, 나를 들여 보냈다.


씨발, 내 점수론 가지 못 할 한양 대학생이겠거니 하며,

자리에 앉았는데, 갑작스레 큰 낯설음이

내게 찾아왔다.


-이제 어른이다.


밤 피씨방에서 나의 신분을 입증하기만 하면,

자유가 보장되는 사람이 된 것에 대해 무한한

영광을 보이기도 하는 한편,


잘못을 하였을 때, 내게 오는 책임 또한

그와 같이 커질 것이라는 예감 아닌 예감에,

무서움이 급속도로 다가왔던 것.


허나, 그 무서움도 잠시,

컴퓨터 화면에 ‘LOL’이 보이는 순간,

나는 다시 일탈을 하려 한다는 나의 심리적 기제를

완전히 이용하기 시작했다.


-홍대 P 게스트 하우스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었다.

역시나 이 것도 내게는 일탈로 규정됨을 피치 못하였다.


나는 고등학교 생활 때 친구가 없던 인간이었고,

나는 고등학교 생활 때에, 크리스마스를 그저, 

새 학기의 시발점이라는 강박감으로 대했으니까.


나를 사랑한다 얘기하고,

내가 대단하다 얘기하는 친구가 없던 내게,

그런 얘기를 서슴없이 뱉는 누군가가 내 옆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 그것 자체가 내게는 일탈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순수한 마음으로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려 보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고,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며,

어두워지는 크리스마스 시간의 감정들을 자세히

바라보는 나 자신 또한 내게는 낯선 자아이다.


그래서 더욱 친구들에게 낯선 나를 보여주려 했다.


나도,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과,

나도,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것과,

나도, 마음만 먹으면 죽어가던 내게 생기를 줄 수 있다는 것을.

나도, 마음만 먹으면 소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재미있는 활동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7살의 내가 갖고 있던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아이가 공부라는 나쁜 녀석에 경도되지 않고,

오로지 따뜻한 맘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그 기쁨을,

다시 볼 수 있었고, 만질 수 있었으며, 사랑할 수 있었다.



나는 이번 주, 오르비에 들어오기 보다는,

일탈을 반복하며 내게 생기를 주려 노력했다.

다시 루핑된 멜로디에 심취한 내가 나를 혐오하기 보다는,

그가 나를 사랑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으로.


일탈 덕분에, 나는 또 다른 나와 대면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나와, 그에게 말을 걸길

시도하기를 좋아하는 나와 — 이를 테면 옥희도와 나의 관계—

누군가와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는 나와, 곧 어른이 되는 나와, 누군가의

생각을 예의있게 바라보는 나와의 대면 말이다.


분명히, 어른들은 이를 두고, 또

일탈을 하였다며 좋게 보지 않겠지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새해에는, 나는 이 방향을

고수하며, 나와의 대면에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


수 차례의 일탈이 이를 방증한다 믿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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