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 [541907] · MS 2014 · 쪽지

2018-12-10 13: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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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기로의 회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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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동안 대전이라는 동네에서 탈출한 적이 없었고,

이사 또한 N동에서 J동으로 넘어가는 정도였다.


재수를 하기로 했고,

나는 난생 처음으로 ‘회기역’이라는 지하철 역에

내리게 되었다.


대전 지하철은 1호선 밖에 없는데,

경의 중앙선, 분당선, 2호선 ... 등등의

노선을 외워야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회기에서 강남까지 가려면..

일단 5시에 빨리 일어나서 6시 경중선 타고

왕십리에서 내리고, 거기에서 분당선 타고 환승,

그리고 선릉에서 내리고, 2호선 환승, 강남에서

내리면 된다.


그냥 이것을 외우기로 했다. 

서울은 낯설었으니까. 또한, 혼자라는 사실 자체가

매우 무거이 다가왔으니까.


빨리 그곳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에

대학을 가야겠단 생각을 하게됐다.

너무도 당연한 사고방식이었을 게다.


낯설음을 익숙함으로 바꾸기 위한,

또 낯설음을 ‘승리감’으로 정당화 시키기 위한,

인간의 간사하면서도, 똑똑한 생각.


-‘승리감’을 느끼기 위해 대학에 가야겠다.


회기역은 바람이 참 많이 들어오는 역이었다.

경의 중앙선은, 특히 아침에, 배차 간격이 너무도 긴 나머지,

그 추위 속에서 그 긴 시간을 버텨내어야 했다.


참을 수 있었다. ‘대학’이라는 목적이 있었으므로.


.

.

.

.

.


수능이 끝난 지금, 그 추위를 견뎌왔던 내 자신에 대해

그리움을 느낀다. 분명히 나는 대학을 가고자, 했던

재수였는데, 대학에 대한 목적 보다는, 나 자신 본연의

목적에 더 집중한 패배자라면 패배자 같은 삶을 살았으니.


-만약, 그 때 그 회기역에서 경희대생 C를 우연히 만나

사귀었다면, 당신은 대학에 더 집중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병신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대학에 갔을 것 같다. 

추운 그 회기에서 생각난 단 한 사람.

그 사람을 그 곳에서 정말 우연히 만나,

인연이 연인으로 되었다면, 그녀와 같은

대학에 가기 위해 더 발악하지 않았을까.


나를 찾는 여행? 다 꺼지라고,

그렇게 행동했을 듯 하다.


그렇기에, 인연이 인연으로만 남은 지금 상황에

깊은 감사를 느껴야 겠지.


아마도, 연인이라는 단어 하나 만으로도,

흔들리는 철학을 가지고 살아왔던 것일 게다.


-나를 찾아보겠습니다.


이 말이, 무서울 때나 쓸 법한, 매우 가벼운 말로

내게는 남아있던 것.

그렇지만, 그 말은 살아남아 훗날의 나를 만들어 내기에

충분한 역할을 했다.


회기로의 회귀, 만약 가능하다면,

당신은 만남을 택할 것인가, 혹은, 그 추위 속을

오롯이 당신 스스로 견디어 낼 것인가.


회귀를 한다고 해도, 나는 나를 택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인 것 같다. 지금의 나는, 나를 찾는다는 것이

어떤 얘기인 지 알 수 있으니까, 설령 그 사람을

만나더라도, 흔들리지는 않았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회기를 내 기억 속에서

없애려는 찰나,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한 소년이 홀로 추위에 떨고 있다.


그 소년은 끝내 혼자임을 알고, 혼자가 곧 자유의 표상이라는

것을 아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회기열차를 기다린다.


아마도, 회기라는 동네를 쉽사리 지울 수는 없을 거라는

불확실한 확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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