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번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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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왕이로소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님의 가장 어여쁜 아들 나는 왕이로소이다.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그러나, 시왕전(十王殿)에서도 쫓기어 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하겠나이다. 다른 것도 많지요마는….
이렇게 어머니께서 물으시며는
하겠나이다. 다른 말씀도 많지요마는….
이것은 노상 왕에게 들리어 주신 어머니의 말씀인데요.
왕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올 때에는 어머니의 흘리신 피를 몸에다 휘감고 왔더랍니다.
그 날에 동내의 늙은이와 젊은이들은 모두 '무엇이냐'고 쓸데없는 물음질로 한창 바쁘게 오고 갈 때에도
어머니께서는 기꺼움보다는 아무 대답도 없이 속 아픈 눈물만 흘리셨답니다.
빨까숭이 어린 왕 나도 어머니의 눈물을 따라서 발버둥질치며 '으아-' 소리쳐 울더랍니다.
그날 밤도 이렇게 달 있는 밤인데요.
으스름 달이 무리스고 뒷동산에 부엉이 울음 울던 밤인데요.
어머니께서는 구슬픈 옛이야기를 하시다가요, 일없이 한숨을 길 게 쉬시며 웃으시는 듯한 얼굴을 얼른 숙이시더이다.
왕은 노상 버릇인 눈물이 나와서 그만 끝까지 섧게 울어 버렸소이다. 울음의 뜻은 도무지 모르면서도요.
어머니께서 조으실 때에는 왕만 혼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지우시는 눈물이 젖 먹는 왕의 뺨에 떨어질 때이면 왕도 따라서 시름없이 울었소이다.
열한 살 먹던 해 정월 열나흘 날 밤, 맨재텀이로 그림자를 보러 갔을 때인데요, 명이나 긴가 짜른가 보랴고.
왕의 동무 장난꾼 아이들이 심술스럽게 놀리더이다. 모가지 없는 그림자라고요.
왕은 소리쳐 울었소이다. 어머니께서 들으시도록, 죽을까 겁이 나서요.
나무꾼의 산타령을 따라 가다가 건넛 산 산비탈로 지나가는 상두꾼의 구슬픈 노래를 처음 들었소이다.
그 길로 옹달 우물로 가자고 지름길로 들어서며는 찔레나무 가시덤불에서 처량히 우는 한 마리 파랑새를 보았소이다.
그래 철없는 어린 왕 나는 동무라 하고 좇아가다가, 돌뿌리에 걸리어 넘어져서 무릎을 비비며 울었소이다.
할머니 산소 앞에 꽃 심으로 가던 한식날 아침에
어머니께서는 왕에게 하얀 옷을 입히시더이다.
그리고 귀밑머리를 단단히 땋아 주시며,
아아, 그때부터 눈물의 왕은 - 어머니 몰래 남 모르게 속 깊이 소리없이 혼자 우는 그것이 버릇이 되었소이다.
누우런 떡갈나무 우거진 산길로 허물어진 봉화 뚝 앞으로 쫓긴 이의 노래를 부르며 어슬렁거릴 때에, 바위 밑에 돌부처는 모른 체하며 감중연(坎中連)하고 앉았더이다.
아아, 뒷동산에 장군 바위에서 날마다 자고가는 뜬 구름은 얼마나 많이 왕의 눈물을 싣고 갔는지요.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그러나 눈물의 왕 - 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홍사용 / 나는 왕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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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1923년 3호에 발표된 시인의 대표작으로, 근대시의 활달한 시형식의 기틀을 마련해 준 8연의 산문시이다. 눈물과 회한과 비탄 속에 살아온 시인의 생애를 자전적으로 기술한 시로, 삶은 출발에서부터 괴로운 것이며, 어떤 곳에서도 구원은 없고 끊임없는 공포와 비애만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낭만적 독백의 전형이다.
시적 화자는 비록 왕이지만,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의 왕이요, 눈물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은근히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비애의 감정을 노래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당시의 현실 상황과 연관지어 '왕'을 조국으로, '어머니'를 식민지 이전의 조국인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면, 일제의 탄압으로 고통받고 있는 '왕'이 어머니로부터 배운 것은 식민지라는 민족적 슬픔뿐이고, 식민지 백성으로서 '모가지 없는 그림자'를 가진 그는 '망국의 한(恨)'을 안고 살아 가는 '눈물의 왕'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성년이 된 후로는 마음대로 울 자유마저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는 탓으로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어디든지 설움만 존재하는 땅이 되는 것이다.
시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