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크로폴리스, 1984학년 1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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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절은 어찌됐든, 아름답고 곱게 채색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그 시절이 젊은 시절이었다면 그 경향성은 더할 수밖에 없다. 젊음은 정점이니까...
낮이 길어지는 춘분을 기리는 축제,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추분 축제, 밤이 짧아지기 시작함을 알리는 동지 축제는 세계적으로 많다. 그러나 하지 축제는 그 어디에도 없다.(내 과문의 탓일까? 있다면 지적해 주셨으면 한다.)
이유? 간단하다. ‘정점’을 지나는 순간을 축하하는 경우는 없다. 내리막은 그 언제든 쓸쓸함이나 애상을 동반한다. 한데 그것을 기리자고?
그래서 성경에서도 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청년이여, 네 청춘을 즐거워하라’라고.(전도서 11장 9절)
젊음이란, 돌이켜 보면 그 아무리 힘든 시기였어도 아름답다. 그리고 나이가 듦에 따라 사람들은 젊음을 ‘탐’한다. 그 탐함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을 때, 사람들은 ‘회상’하는 것이고... 그래서 젊음을 회상한다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비극적이다.
그럼에도, 근(近) 35년 전의 일을 여기서 회상하려는 이유는, ‘계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이제는 생물학에서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이야기가 경험칙에서는 통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오르비에는 수험생만이 아니라, 대학 신입생도 있을 진데, 그들이게도 한 세대 전 경험의 추체험이 어떤 의미로든 ‘도움’이 되리라 믿기, 아니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좋은 의미로써만이 아니라, 타산지석이든 반면교사로써든 말이다. 또한 대입 수험생들 역시 곧 신입생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쓴다. 내 젊되 한미했던 날들의 기록을... 35년 전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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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학 성적은 냉정히 말해 하위권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정말로 마음 졸이며 지원했다. 경쟁률이 낮은 덕에 붙을 수 있었다.
언제나 그렇겠지만, 당시 입시도 ‘아사리판’이었다. 내 입학하던 해 법대와 경영학과는 경쟁률이 1 대 1을 썩 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달이었다. 배짱 지원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똥 84’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관악캠퍼스, 신입생을 6000명 뽑던 시절. 1984학년.
전두환 대통령은 취임 뒤 대학 정원을 늘리는 대신, 졸업정원제(=졸정제)라고 해서 입학생의 30%를 성적으로 자른다고 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그는 젊은이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쉽게 만듦으로써 사회적 불만을 없애는 대신, 대학 내에서 불 수 있는 민주화 요구를 잠재울 방법으로 ‘공부 안 하면 잘린다’는 공포심을 심으려 했던 것이다.
실제로 전두환 정권 중기까지는 졸정제에 따라 학점도 칼같이 상대 평가했고, 한 학기 당 평균 학점 2.0 이하는 학사 경고를 줬다.(물론 전두환 정권 후기로 갈수록 졸정제는 점차로 희미해졌다. 연속 경고 2회를 받고 제적된 학생도 훗날 자신들이 원하면 모두 구제됐다.)
두려웠다. 힘들게 입학했는데 잘리면 어쩌나?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입학식은 토요일에 있었고(1984년 3월 3일),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나는 오전 8시 쯤에 중앙도서관으로 가는 일과를 시작했다.
아크로폴리스가 보이던 중앙도서관 열람실이 당시 명칭으로 5 열람실이었는지, 3 열람실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찌됐든 나는 대학 본관 앞 아크로폴리스 광장이 보이는 열람실을 주로 이용했다. 오후 햇살이 너무도 사랑스레 들어왔기 때문이다. 봄날 햇살의 나른함이란...
하지만 그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노라면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열리는 시위를 간접적이나마 ‘경험’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시위가 가능했던 것은 학원 자유화 조치 덕분이었다.
1983학년도까지는 교내에 경찰이 진주해 있었다. 그러나 84학년도가 되면서 학원 자유화 조치가 시행됐다. 어찌됐든 ‘공식적’으로 경찰은 학내에서 물러난 것이다. 때문에 83학년도 이전과는 달리, 학내에서 대규모 시위가 가능했다.
도서관 열람실에서 학내 시위를 지켜보는 것은 고역스러운 것이었다. 죄책감...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던 학생들도 도서관 창가에서 시위를 구경하곤 했다. 그 풍경은 근 35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마치 선명한 칼라 사진처럼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아크로폴리스의 시위 주동자들은 도서관을 향해 종종 그런 말을 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시는 학우 여러분. 책을 덮고 여기에 합류하십시오.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십시오. 진리는 책 속에 있지 않습니다.”
공부를 하다가도 그런 얘기가 창 밖에서 들리면, 하던 공부를 멈추고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곤 했다. 역시 죄책감이었다.
후일담이지만, 이제 나는 그런 죄책감에서는 자유롭다. 정치적 민주화에 공헌한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과학 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의 삶을 편하게 만드는 것도 발전이다. 아니 삶의 편이함, 그것이야말로 발전의 바로미터일 것이라고 믿는다. 반도체 싸게 만들어서 전자기기 가격을 떨어뜨림으로써 모든 사람이 싸게 구입해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은 발전 아닌가? 대학생 때 가졌던 그 생각은 졸업 뒤 사회 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속칭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의 ‘변신’을 보면서 더욱 굳어졌다.
변신... 나이가 들면서 맞는 변신은 내 경험으로는 대부분의 경우, 추했다.
물론 그런 의문을 학생 때 선배 뿐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던진 적이 있었다. 그럼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았다.
“네 생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이 노동자의 계급 의식을 약화시키기 위해 하는 말이다. 진정한 경제적 민주주의, 즉 생산 수단의 공유화 없이 어떻게 진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겠니?”
하긴, 학교에 입학한지 2주 만에 ‘문무대’라고 불린 곳에서 신입생들이 병영 집체 훈련을 받으며 군사 정권의 당위성을 들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시위에 참여했다고 영장도 없이 마구 경찰서로 잡아 들여 고문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내 고민은 ‘부잣집 막내 도련님’의 생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옳다고 배웠던 모든 가치가 송두리째 흔들리던 시절이었다. 학교 밖에서는, 언론에서는 특히 공영방송에서는 그것을 ‘의식화 작업’이라고 불렀다. 순진한 신입생들을 ‘붉게’ 만드는 작업이라고 했다.
광주 폭동이라고만 알고 있던 사건에 대해 선배들은 전혀 다르게 평가했다. 비민주적인 폭압적 독재 정권이라고 알고 있던 북한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는 사람이 적지 않음도 알게 됐다.(북한에 대한 이런 생각에는 당시도 그랬지만, 지금도 전혀 동의할 수 없다.)
그 혼란 속에서 맞은 대학생의 첫 학기는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학교 다니기가 싫었을 정도였다.
지금은 서울대학교를 ‘샤’대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는 것을 안다. 교문 앞에 있는, ‘국립 서울 대학교’의 각 단어 첫 자음을 형상화한 건축물을 그렇게 부르는 것일 터이다. 한데 우리 때 그것을 ‘샤’라고 부르는 학생은 내가 알기론 없었다. 하지만 ‘서울 공산 대학’의 각 단어 첫 자음을 땄다고 농담을 하는 경우는 있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자생적이었든 어찌됐든, 자칭 사회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가 학내에 많았던 시절이었다. 나 역시 신입생 시절을 지나면서, 어느덧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규정할 정도였으니까...
배부른 소리인지 몰라도, 신입생 첫 학기 때 휴학에 대해 심각히 고민하기도 했다. 요즘 표현처럼 ‘반수’? 아니었다. 그냥 학교 다니기가 힘들고, 싫었다. 평일이면 도서관에서 밤 9시에 나와서 집으로 향했지만, 왜 공부를 하는지도 잘 모를 정도였다.
합격자 발표가 나자마자 학생회관을 찾아 학교 뱃지를 샀을 정도였지만(뱃지 디자인은 동일했지만, 단과대별로 색깔이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속한 인문대는 흰색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달고 다니는 학생을 나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노동자 농민과 연대하기 위해 우리는 학생이라는 계층 의식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야 한다. 우리의 의식은 노동자 농민에 맞춰져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일상으로 듣던 시대에 학교 뱃지를 옷에 착용하고 다닌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했다. 분명 70년대에는 학교 뱃지를 착용한 대학생들이 적지 않았는데...(‘과잠’이라는 옷을 자랑스레 입는 학생들을 보노라면 나는 지금도 내 청춘 시절을 떠올린다, 후후...)
70년대의 ‘낭만적 학생 운동’은 그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칭 ‘과학적 사회 운동’으로 변화됐고, 그 과정에서 대학생들은 ‘계급 의식’을 강조했던 것이다.
언론 등 사회에서는 대학생 출신이 노동 운동을 위해 공장에 취업하는 것을 ‘위장 취업’이라고 했다. 한데 과연 위장 취업이었을까? 그들은 자신들을 ‘대학생 출신 노동자’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1학기를 마쳤고, 여름 방학에도 꾸역꾸역 도서관에 나갔던 나는 84학년도 2학기를 맞았다. 관악캠퍼스 최초로 전체 학생들의 수업 거부와 시험 거부가 벌어졌던 그 가을로...
추신==
간혹 저에게 오르비 쪽지를 보내시는 분들이 계신데... 제 컴퓨터가 뭐가 잘못됐는지, 오르비 쪽지 보내기 기능이 안 됩니다. 댓글로 물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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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어어우어어.. 아저씨 멋져요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그냥 나누고 싶었습니다. 제 천한 경험을...
소설 읽는 줄 알았습니다...머싯따.. ㅠㅠ
소설가님들이 웁니다. 제 글을 소설에 비유하시면...
그냥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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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같아서 좋네요감사합니다. 그냥 제 경험을 미래 세대와 나누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한데 줄기능수가 무슨 의미인가요? 아이디 볼 때마다 궁금합니다.
1.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할게요:D
2. 수능 기출을 거꾸로 쓴 거예요ㅋㅋㅋ
별 뜻은 없는데 입에 착착 붙는 것 같아서 씁니다:)
아하... 수능 기출을 거꾸로 쓴 것이군요. 하하...
재밌네요...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고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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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과 위악님도요:D와... 글 흡입력 장난아니네여
과찬이십니다. 그냥 제 경험을 썼을 뿐입니다. 나누고 싶어서... 미래를 이끌 세대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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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좋은 글 읽고 갑니다항상 느끼는 거지만 글을 이렇게 잘 쓰시는 분은 정말 부럽네요
아이고... 감사합니다만, 글 잘 쓰는 사람이 다 죽었나보네요. 제가 글 잘 쓴다는 소리 듣는 걸 보니...
그냥 제 젊은 시절의 초상을 나누고 싶어서요, 미래 세대의 주역들과...
필력이 대단하시네요~
글을 읽는데 그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그려짐
감사합니다. 한데, 과찬이 심하시네요, 후후...
제가 가장 사랑하는 곳, 게다가 제 젊음을 보냈던 곳... 관악...
그 곳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저를 설레게 합니다. 지금도 때때로 학교를 이런 저런 이유로 찾는데... 그 때마다 마치 첫 미팅 나갔던 때처럼 들뜨곤 합니다. 당시는 몹시도 고통스러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다 아름답던...
항상 건강하시고 평안하세요.
재밌습니다.
오르비를 못끊게하는 몇가지이유중 하나이십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요즘은 책 읽고 농사 짓는 '간서치 농부'로 살고 있는데, 때로 젊었던(여전히 저는 젊지만 지금보다 더 젊었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서요. 그 기억을 미래의 주역들과 나누고 싶어서요...
여전히 그립습니다. 교문을 지나 허덕대며 강의실로 향하던 시절이... 시위라도 있으면 며칠 동안 교문 주위가 최루탄 냄새로 범벅이어서, 울며 짜며 걸어야만 했거든요, 후후...
젊음을 만끽하소서... 진심입니다.
요즈은 젊음 만끽 못함
아... 저 역시 그것이 가장 아쉽습니다. 젊음이 젊음을 즐거워하지 못하는...
오르비에서라도 뱃지 다세요...
하하... 그래볼까요? 근 35년 만에?
좋지요, 뱃지... 재학 시절, 단 한 번도 달아보지 못했던...
내가 가장 사랑했던, 그리고 여전히 사랑하는 '준거 집단'...
힘이 가장 세다는 신문사나, 소위 청와대에도 있었지만, 저는 여전히 '관악'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뜁니다, 후후...
아마, 젊음을 보냈던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그래도, 그래도 젊음을 즐기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틀렸다는걸 틀렸다고 말할수 있는 용기, 제 청춘도 그렇게 빛났으면 하네요. 읽으면서 생각나는 시가 있어서 올리고가요 너무 좋은글 감사합니다!
아이고... 이런 아름다운 시를 올려주시다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한데, 이 장면에서 '틀딱 변신'!!! 우웅, 치키, 우웅, 치키...
'틀렸다는 걸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을 너무 자주 사용하지는 마소서. 결국 나만 손해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적당히 '넘어가는 것', 그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 '성장'이라는 것을 이 사회는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제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고 밉지만... 그것이 사실이니까요...
물론 멋지죠. '내부 고발자', 모순에 맞서 싸우는 저항인...
한데, 그런 사람들의 삶, 대부분 피곤합니다. 내가 피곤한 게 아니라, 주변에서 나를 '피곤한 사람으로 본다는 사실'이 정말로 절망에 몰아놓곤 하지요.
죄송합니다. 좋은 말 하셨는데, 찬물, 아니 남극 빙하보다 차가운 말을 해서요.
아쉽지만, '대충 비겁하고, 대충 눈 감고 사는 것'이 이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을, 이미 님이 잘 아실 이야기를 다시금 할 수밖에 없는 어느 50대 중반 사내의 심정도 헤아려 주시기를...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소서...
네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시스템에 타협하고 포기하지않는 삶'이 피곤하고 힘들다는거, 그리고 결국엔 언젠가 타협하게 될꺼란 사실 모두가 참 비참하지만 알고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타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늘 우리는 그렇게 변화해왔으니까요.
조금 힘들더라도 최대한 늦게, 큰 파도는 아니어도 아주 작게라도, 물결을 만드는데 제 청춘을 바치고 싶다는거였습니다.
제 이후의 청춘들과 미래의 스스로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부끄럽지않기 위해서요.
결국 타협했지만 한마디는 했다는.. 결국에는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타협하고 있겠지만요..^^
타협하는 법을 알아가는게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는게 참 슬프네요.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한심한 젊은놈한테 진심어린 조언 감사합니다.
아이고...
님은 저 같은 3류 서생의 수준은 이미 뛰어 넘으신 분입니다.
풍파를 알면서도 풍파에 한 번이라도 맞서보겠다고 생각하는 이와,
풍파를 전혀 모르기에, 풍파 무서운지 전혀 모르기에 "풍파는 별 것 아니다"라고 외치는 이는,
레벨이 완전히 다른 것이지요.
님은 분명 전자입니다. 그래서 님 같은 분이 더 단단한 것이지요.
님 같은 분이 많으니, 우리 미래도 밝고,
그리고 님 같은 분이 지불하실 세금으로 노후를 살아갈 가능성이 높은 저 같은 세대는 분명 축복받은 것이지요.
그래서 더욱 감사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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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제가 더 감사합니다. 공감해 주셔서요.
항상 건강하시고 평안하세요...
장미꽃 만발한~ 아크로~폴리스~ 쇠창살 둘러친~ 면학의~ 도서관~
젊은 넋 스러져간 그때 그자리 붉은 피 흘리던 날 벌써 잊었나
학우여 들리는가 그 성난 목소리 학우여 보이는가 한맺힌 눈동자
아직도 입에 붙어 있네요 쓰니까 그냥 가사가 따라나오는.. ㅎㅎ
당시 여러 종류의 학생이 있었죠 84년엔 학생회 부활이 관악의 봄을 가져다 주는 듯
보였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84니까 선배들에게 들은 이야기) 84년엔 이정x 형이,
85년엔 김x석 형이 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었죠. 한참 나중의 이야기지만 김x석 형은
김x새 라고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는 신세가 되고... 세월이 무상하네요.
와...
그 노래, 여전히 정확하게 기억하시는군요. 그 노래 부르며 아크로폴리스에 모이곤 했죠.
아쉽죠, 그 시절이 이리 속절 없이 지나간 것이...
'관악의 봄'이라는 말, 너무나 반가운 표현입니다. 한 동안 잊고 있었는데...
나중에 고시 3관왕에 올랐던 수재 중의 수재 이정우 변호사님은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 보이더군요. 이정우 변호사님은 88년 한겨레당이 창당됐을 때 선거 운동 열심히 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당시 한겨레당 소속으로 나오셨던 분이 돌아가신 제정구 선생이셨지요. 제 선생님이 88년 총선에서 떨어지신 뒤 신동아에 '패장의 변'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하셨는데 마지막 문장이 "우리가 싸움을 시작했을 때, 우리는 이미 승리하였다."였지요. 그 글을 읽으며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후후...
김민석 전 의원님은 그냥 패스...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당시 '이론가'로 날렸던 법대 선배 백태웅씨는 캐나다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저는 솔직히 이정우씨나 백태웅씨가 정치를 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는데...
다 지난 이야기입니다.
션한 맥주님 덕분에 옛 생각에 몸을 맡길 수 있었습니다. 너무도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