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oire [802814] · MS 2018 (수정됨) · 쪽지

2018-03-05 01:16:46
조회수 1,965

작년에 철학을 공부하는 게 아니었어 시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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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 노베인 빡대가리 이과충이 어설프게 철학책 좀 읽고 나서 중2병이 재발했습니다.

탈기독 + 공동체주의에 대한 혐오감 + 줏대없음 등등 여러 가지 사연으로 니체를 잡았는데,

기존의 도덕이 노예 도덕이니, 민주주의가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느니 등등...

처음엔 이게 뭔 개소리야 하면서 씩씩거리면서 다른 여러 책들도 읽어보았는데,

사고력 부족으로 인해 제 사상적 체계가 혼돈의 카오스가 되었고, (사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니체 입문 루트)

그 와중에 아무 생각이 없이 설득되어버렸습니다... (노답...)

완전히 설득된 건 아닌데, 니체 철학 시스템의 뚜렷한 형태가 아닌 모호한 형태만이 제 사고의 기저를 덮어버렸습니다.

다른 건 큰 문제가 안 됩니다. 사실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라는 말이 주 내용이기 때문에

수능 공부에도 어느 정도 힘을 실어주는 면이 있구요.

다만 가장 큰 문제 두 가지는,

하나, 지금까지 사회와 나 사이의 채무관계(자유를 갈취하고 책임을 부여하는 대가로 사회적 보호를 해 주는 것)를 청산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미성숙한 제가 지게 될 짐이 너무 무겁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제가 아직 위버멘쉬와 에고이스트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후자가 더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제가 철학을 접한 이래로, 의도와 무관하게, 제 행동이 이기적이라는 말을 더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나무람을 들으면서도 '내가 정말 잘못한 건가? 저 새끼가 집단주의 꼰대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구요.

그런데도 니체 철학에서 가장 배척되는 (저 또한 싫어하는) 가치인 열등감, 분노, 눈치보기 등등은 버리질 못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공부 때문에 책을 읽어 생각을 정리할 여유도 안 되는 상황이구요.

차라리 아무 생각이 없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냥 아무 것도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할 수 있다면 차라리 나을 것 같습니다.


철학 진짜로 공부하시는 분 입장에서는 제 얘기가 유치하고 우스울 겁니다. 제가 무식해서 그런걸요.

그런데 주변에 철학을 하는 사람이 없어서, 여기 올리면 어찌 해결책이 나올까 싶어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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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베황 · 571955 · 18/03/05 01:18 · MS 2017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 Ivoire · 802814 · 18/03/05 01:18 · MS 2018

    의식의흐름 기법이라 그래요

  • 출기능수 · 655203 · 18/03/05 01:18 · MS 2016

    생각이 더 깊어지신 것 같지만 지금은 딴데에 신경끄시는 게 수험에 도움이 되실 거예요ㅠㅠ

  • Ivoire · 802814 · 18/03/05 01:19 · MS 2018

    그게 안 돼요 ㅠㅜ

  • Darm · 791807 · 18/03/05 01:19 · MS 2017

    모두까기 하세요

  • Ivoire · 802814 · 18/03/05 01:20 · MS 2018

    그것도 안 돼요 ㅠㅜ 걍 카오스 그 자체

  • Lucid · 774170 · 18/03/05 01:24 · MS 2017

    방해되는 지식 같은데 그냥 되뇌이지 않고 까먹으면 안되나요

  • Ivoire · 802814 · 18/03/05 01:25 · MS 2018

    망각이 맘대로 되는 것만 같으면... ㅠㅜ

  • good eye deer · 783850 · 18/03/05 01:26 · MS 2017

    저도 제 생각에 비합리적인 감정이나 생각이 들 때 괴로운데 게임 하다보면 까먹음

  • Ivoire · 802814 · 18/03/05 01:27 · MS 2018

    게임을 안 해요 ㅠㅜ

  • good eye deer · 783850 · 18/03/05 01:31 · MS 2017

    게임을 함->게임이 재밌어서 행복 고민이 사라져서 행복
    게임을 안 함-> 게임 안 하면 이득도 손해도 아님 고민은 계속 남아있으므로 고통
    님은 결국 게임을 하셔야합니다

  • Ivoire · 802814 · 18/03/05 01:32 · MS 2018

    (설득력 있다...)
  • Darm · 791807 · 18/03/05 01:27 · MS 2017

    개인적으로 철학사는 관심없고 이기주의에는 관심있는데
    기업이 브랜드 가치 제고하듯이 원만하게 사회생활해서 자신의 평판을 끌어올리는것도 이득이 된다 생각함

  • Ivoire · 802814 · 18/03/05 01:28 · MS 2018

    그건 이기주의가 아니라 당연한 거죠.

  • souvenir · 781763 · 18/03/05 01:40 · MS 2017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인지라

  • Ivoire · 802814 · 18/03/05 01:41 · MS 2018

    뚜렷하게 알 수만 있다면 실천할 자신은 있는데...

  • souvenir · 781763 · 18/03/05 01:45 · MS 2017

    뚜렷하게 아시는 거 아닌가요? 니체는 분노, 열등감, 눈치보기를 배척합니다. 눈치보지 말고 하고 싶은 걸 하라 말하죠. 그치만 열등감이 좋지 않은 감정이란걸 안다고 해서 열등감을 버릴 수 있는 건 아니고요

  • Ivoire · 802814 · 18/03/05 01:47 · MS 2018

    그런데 위버멘쉬로 향하는 길과 에고이스트의 길을 구분하지 못 한다는 거죠. 왜 카이사르는 위버멘쉬이고 히틀러는 에고이스트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 souvenir · 781763 · 18/03/05 02:12 · MS 2017

    우선 다른 모든 사람이 그렇듯 니체 또한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그의 사상도 완벽하지는 않다는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니체 사상의 경우에서도 뽑아먹을 건 뽑아먹고 버릴 건 버리는 자세가 필요하겠져. 저같은 경우도 니체가 하는 말에 백프로 동의하진 않습니다만 뚜렷한 시사점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시사점으로부터 삶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아시는 이야기겠지만 니체의 경우에는 남 눈치나 보면서 하고픈 일을 못하는 사람을 노예라고 부르고 경멸합니다. 노예의 대척점에 서있는 주인이란 러프하게 표현하자면 남 눈치 안보고 자기가 진정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져. 요컨대 하늘보다는 땅에 충실한, 영혼보다는 육체에 충실한 사람 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니체는 자유를 엄청나게 강조하는 철학잡니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매우 강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의 자유가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타인의 자유가 지닌 소중함도 알게 마련입니다. 니체는 자유를 강조하는 인물이고 개인주의적인 인물이지요. 개인주의를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사람, 정도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오독 아닐까 합니다. 니체는 공동체를 혐오하며 공동체의 철학을 혐오합니다. 공동체적 가치는 나의 자유를 억압하게 마련이니까요. 절대적인 옳은 가치는 없는데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그런 걸 만들어서 내 자유를 억누르는 것을 니체는 몹시 싫어합니다. 차라리 남 일에 관심 끄고 나는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면 된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는 편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실제로 니체는 말합니다.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의지를 지닌 위대한 사람은 타인과 거리를 두게 마련이라고 (거리에의 파토스, Pathos der Distanz). 남을 지배하려고 하지 않고 차라리 거리를 두고 경멸한다는 이야기겠지요.

    작성자님의 혼란은 자유와 평등을 대립하는 개념이라 생각하는데서 기인하지 않을까 합니다. 개개인 모두가 자유로운 사회는 사실 평등하게 마련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축복은 다름아닌 인간이다." 스피노자가 한 말인데요.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의 능력은 공동체 속에서 강화됩니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타인들은 나로 하여금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줄 테고요. 서로가 자유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억압하고 지배하려는 사회에서는 자유라는 것이 절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유를 지배욕으로 해석하시면 안 되는 것이겠져. 물론 니체는 공동체를 싫어하므로 이상의 논의에 동의하진 않을 것입니다만. 굳이 언급한 이유는 첫 째, 자유와 평등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상보적 관계에 놓인 개념이며, 진정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줄 것이다 (타인을 지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그리고 둘 째, 조금은 극단적인 니체의 사상을 어떻게 보완해서 받아들일 수 있을 지 나름의 아이디어를 드리기 위해서... 정도가 되겠습니다

    “이제 나는 명령한다. 차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발견할 것을."
    니체의 묘비명입니다. 니체는 신이 아닙니다. 니체의 사상은 절대적 선이 아닙니다. 니체가 한 말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를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니체 본인부터 절대적 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요. 니체의 사상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위버멘쉬가 아닙니다. 니체의 사상을 참고만 한 채 종국에는 그를 뛰어넘고(Über)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하는 사람이 위버멘쉬이며, 그런 사람이 사실 니체의 사상에 더 충실한 사람일테지요. 어쩌면 여기에 니체 사상의 위대한 역설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 Ivoire · 802814 · 18/03/05 07:36 · MS 2018

    장문의 설명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ㅠㅜ
    그런데 사실 완전히 새로운 생각이라기 보다는, 제가 해 봤던 여러 가지 생각 중 하나와 일치하네요. 니체에 너무 얽메이지 말고 세상과 어느 정도 타협접을 찾는 것. 그런데 전 여기서 또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나의 길인가. 니체에 속박되지 않으려 한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 선택한 이 길은 내가 창조한 것이 아닌, 세상의 질타가 두려워 협상을 한 것일 뿐인 게 아닐까. 결국 나는 또 겁쟁이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 Ivoire · 802814 · 18/03/05 23:32 · MS 2018

    등굣길에 급히 적느라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했습니다. 사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반적인 '개인주의'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제가 니체 철학과 에고이즘을 구분하지 못 한다고 한 것은, 니체가 '상대를 정복해서라도 원하는 가치를 얻어내라'와 비슷한 말을 한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니체 철학을 공부하면서 가증 큰 충격을 받았던 부분이 두 부분인데요, 하나는 침략자이자 독재자로 알려진 나폴레옹과 카이사르에 대한 찬양, 하나는 헤세의 데미안 중에서 데미안이 징클라이에게 말했던 가인과 아벨 설화의 재해석입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면에서 어쩌면 보편적으로 알려진 개인주의나 자유주의 역시 니체의 입장에서는 집단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자유에 제한을 두는, 노예 도덕에 기초한 사상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 Ivoire · 802814 · 18/03/06 00:31 · MS 2018

    그리고 한 가지 더 궁금한 점은 도덕의 계보에 대한 것입니다. 일단 노예 도덕이나 양심에 대한 그의 설명은 상당히 논리적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인류 문명 수 천년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이토록 철저히 은폐되었다는 것 역시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도덕의 계보를 연구한 계보학자들이 니체 혼자는 아닌 것 같던데, 보편 도덕의 뿌리에는 정말로, 그렇게 추악한 약자들의 발악밖에 없는 것인가요? 아니면 다른 해석도 가능한가요?

  • souvenir · 781763 · 18/03/10 02:54 · MS 2017

    요며칠간 제가 많이 바빴습니다 ㅠㅠ 그런데 대단하시네요. 빡대가리 이과충이라고 하시는데 질문하시는 내용 보면 니체를 엄청나게 파셨나 봅니다. 저는 고2때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아무튼 뭐 바쁘기도 했고, 또 하신 질문들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저도 나름대로 고민을 할 필요가 있어서.. 사실 작성자님이 저보다 니체에 대해서 더 많이 아시는 거 같습니다 ㅋㅋ. 아무리 봐도 비문학 노베라는 이야기는 전혀 못 믿겠구... 암튼,

    1. 저는 니체가 아니고 니체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지도 않습니다. 니체는 상당히 위험한 말을 많이 한 사람입니다. 다만 니체 철학에서 버릴 건 버리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는 태도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2. 니체가 상대를 '정복'해서라도 원하는 가치를 얻어내라는 식의 이야기를 한 것은 사실이며, 나폴레옹과 카이사르를 찬양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 외에도 니체는 민주주의를 멸시하고 뭐 그러죠. 니체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것은 힘입니다. 혹자는 이러한 힘을 권력이라든지 완력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만 이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아닙니다. '힘'이란 기존의 가치를 파괴하고 내 스스로 나만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정신적인' 힘을 의미한다는 것이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der Wille zur Macht, the will to power를 '권력의지'라고 번역하지 않고 '힘에의 의지'로 번역하곤 하지요. 이상의 맥락에서 살펴보면 상대를 정복해서라도 원하는 가치를 얻어내라는 말에서 '정복'은 뭐 정치적인 지배관계를 전제한 정복이라기보다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신적인 의미에서의 정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3. 아무튼 니체는 결국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채 그런 관습 및 사회적으로 규정된 선악의 관념을 때려 부수고, 자기 스스로 가치를 창조해서 자기를 실현하라 이야기합니다. '힘'이란 앞서 써둔 저걸 할 수 있는 능력 정도로 이해해야겠지요. 니체의 이상은 딱 거기까지 일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그의 이상이고, 실제로 니체는 현실주의적인 (혹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얼마간 찌질한) 사람이었지요.

    투키디데스 그리고 아마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무조건적인 의지라는 점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데, 그들은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 현실 속에서 이성을 찾으려 했다. - 니체

    위의 말에는 1) 지나친 이상에의 추구는 기만이며 2) 결국 초인의 현실태는 '현실'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나폴레옹과 카이사르를 찬양하지만 대놓고 초인이라 하기보다는 초인에 가장 가까운 인물 (ens realissimus) 이라 부르기도 하고요. 뭐 완벽하지야 않다만 그들은 어쨌든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설혹 그것이 사회적 nomos에 반한다 하더라도 관철시킬 (정신적인) '힘' 이 있었으니깐.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남을 (실제로도, 물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지배하려고 하기야 했습니다만. 뭐 어쨌든 자기 실현을 위해서 현실적으로 다른 방법이 없었을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납해줄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볼 수 있겠지요.

    4. 이상의 이야기는 니체를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한 것이고, 사실 니체에 대한 해석은 굉장히 많고 논란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카이사르 나폴레옹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그가 민주주의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은 명백히 사실이고 그거까지 옹호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니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그 말에 이런 모순이 있는데요, 그건 좀 아니지 않나요, 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니체한테 따질 문제고 저한테 물어보면 니체는 사실 바보 아니었을까요... 뭐 그런 이야기밖에는 할 수가 없겠져.

    5. 제 개인적으로 볼 때 니체는 보편적 자유주의와 에고이스트 사이의 중간 어딘가에 놓여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가치를 파괴하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는 남들을 실제로도 지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또한 그가 속한 시대의 한계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을테니 말입니다. 니체가 그렇게 생각한 데에는 그가 속한 당시 시대의 영향도 얼마간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그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이유는 전혀 없겠지요. 니체가 강조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니체가 만들어놓은 가치도 파괴하고 자기 스스로 새로이 창조할 것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사실 여기서 니체 철학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 다시금 드러납니다. 그는 도덕률과 선악을 비판하고 칸트적 반드시 ~해라 (du sollst) 식 윤리관을 비판합니다만 그 자신 또한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한다며 일종의 명령을 내리기 때문입니다. 니체가 참 매력적인 철학자인 이유는 그런 모순이 꽤나 멋지게 느껴진다는데 있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만.

    사실, 니체 철학의 가장 큰 의의는 생각의 툴을 마련한데 있다고 봅니다. 요컨대 완벽한 가치란 어디에도 없다는. 그치만 그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누군가의 가치는 선하다 - 하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는 곧바로 자신이 한 이야기를 배반하는 꼴이 됩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여러 차례 그런 모순을 범하지요. 그건 그가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또한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니체가 이런 뜻으로 제목 달아둔 건 아니지만)

    여기까지 쓰고 나니 시간이 늦어져서... 도덕의 계보에 대해서는 내일 중으로, 혹은 모레 중으로 답을 드리겠습니다. 이런 거에 막 골몰하시는 게 진짜루 멋지네요.

  • souvenir · 781763 · 18/03/10 21:08 · MS 2017

    도덕의 계보학, 양심, 그리고 보편도덕의 역사에 관하여. 이 부분 관련해서는 제 주관이 특히 많이 개입될 것 같습니다. 왜냐면 특히 이 부분에서 제가 니체의 주장에 그닥 동의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 자세한 설명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상의 것들에 대한 니체의 주장이 상당히 과격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그저 겁쟁이들의 자기위로, 자기 합리화의 수단일 뿐이고 도덕이란 약자들이 만들어낸 한낱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은.

    물론 저런 것들에 대한 니체의 설명이 어느정도는 논리적인지라 진짠가? 싶을 수도 있다는 것은 압니다. 도덕의 역사에 대한 니체의 서술은 어느 정도 선까지는 정합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도덕과 양심이란 백 퍼센트 그저 허구일까요? 그렇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누가 보기에도 선인 것들이 있고 누가 보기에도 악한 것이 있으며 누가 보기에도 양심적인 사람이 있게 마련이니까요. 플라톤 이래 참 많은 철학자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정의라는 것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그런 정의란 무엇인가? 에 답을 내놓기 위해 나름대로 헌신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무언가를 은폐하거나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자신들의 신념에 충실했을 뿐이지요.

    잠시 정의와 법에 대한 이야기. 사실 니체가 뭐라 하든 정의(선)라는 것이 아예 없다고 보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완벽한 정의가 있다고 가정해보져. 정의, 즉 선한 가치들이 존재한다면 사회의 목표는 그 정의를 실현하는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는 그걸 법이라든가 아니면 내재화된 가치관이라든가 등을 통해 실현하고자 노력을 합니다. '법'이라든가 사회적으로 도덕적이라 평가받는 규범들을 보고 흔히 우리는 정의롭다고 생각을 하지요.

    그러나 어느 법도, 어느 사회적 규범(사회적으로 선하다고 여겨지는 규범)도 완벽히 정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런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는 이미 유토피아겠져. 따라서 모든 법은, 모든 사회적 규범은 그 속 어딘가에 정의롭지 못한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는 그 부분들이 시정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법은 그리고 사회적 규범은 그걸 지키지 않는 사람을 처벌합니다. 법을 어기면 범법자가 되고 사회적 규범을 어기면 돌쌍놈이 되고 금수같은놈이 되니까요. 불과 몇 세기 전만 하더라도 신분제도가 있었고 왕한테 대드는 놈은 범죄자요, 쌍놈이었던 걸 떠올려 보세요.

    암튼 모든 법과 모든 사회적 규범은 항상 폭력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1. 모든 법규범 속에는 부정의로운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2. 그 법규범에 대항하여 좀 더 정의로운 법규범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래 있던 법규범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3. 그런데 법규범을 무너뜨리는 행위는 불법입니다 4. 따라서 원래 있던 법은 새로이 도입되려는 법을 처벌하려고 합니다 (ex. 노예들이 신분제를 폐지하는 법을 만들자 하면 원래 있는 신분제도는 그걸 처벌하려 함)

    따라서 법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 이전에 있던 법을 무너뜨렸다는 의미죠. 새롭게 만들어진 법은 지금은 합법이지만 만들어지는 순간에는 불법이었을 거고. 이 법은 이제는 또 훗날 들어서게 될 조금 더 나은 법을 불법이라 규정하며 억누르려 하다가 무너지겠고요. 법은 정의의 수호자입니다만 동시에 정의 실현을 억누르기도 합니다.

    그런지라 법, 도덕적 가치들 모두는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정의 실현을 억누르기도 하는 것이며 결코 결코 결코 완벽히 정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데리다는, 법이란 정의에 무한히 다가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결코 도달할 수는 없겠지만 사회는 그 정의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겠죠.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날 당연하다 떠받들여지는 도덕가치들을 원점으로 돌아가 의심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저 가치들이 백프로 도덕적일 수는 없고 어딘가에 반드시 문제가 있을 테니깐 숭상하는 대신 의심하고 문제를 찾아내고 파괴하고 더 나은 것으로 대체하고. 그러면서 사회는 진보하고 조금 더 나아지겠죠.

    암튼 도덕도 법도 완벽할 수는 없고 끊임없이 회의하고 파괴해야 합니다만, 어쨌든 그것들은 정의 실현을 위한 수단임에는 확실합니다. 보편 도덕의 역사를 살펴보면 때때로의 퇴보야 있었겠지만 큰 틀에서는 기존의 도덕이 파괴된 후 보완되어 정교화되어 왔습니다. 물론 여전히 불완전하고 앞으로도 불완전하겠지만. 그것이 지닌 불완전함에만 집중을 하여 저건 그냥 약자들의 정신승리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닐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정의에의 완벽한 도달이 불가능할 걸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질 걸 알면서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라고나 해 둘까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뭐 추악한 발악도 있었겠고 타락한 사람들이 자기 이익이나 관철하기 위해서 자기 가치가 옳다고 떠든다든지, 겁쟁이들이 하고픈 일 하기 무서워서 난 양심적인 사람이야, 핑계를 대었을 가능성이 있긴 하겠습니다만. 그건 그저 부분적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저는 큰 틀에서 모두가 그랬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당시 사회에는 썩어빠진 사람들이 많았고 썩은 가치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가치들에 용기있게 일침을 가했다는 점에서 니체는 위대한 사람입니다만. 정말로 순수한 가치를 지닌 사람들의 노력을 잘 이해하지는 못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옳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회의하고 의심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니체 철학은 분명한 의의를 가지긴 합니다. 그치만 회의하고 의심한 끝에 나는 이게 옳은 가치 같아, 하면 추구하면 되고, 그것을 겁쟁이의 자기합리화로 매도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니체는 본능을 따르고 양심은 무시하라고 합니다만. 내 본능은 이렇게 하라 하지만 그건 옳지 않은 일이라 확신해.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대로 살거야. 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본능을 따르는 삶인지 아니면 양심을 따르는 삶인지 확신할 방법이 있나요? 아무튼 니체는 진정한 순수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 souvenir · 781763 · 18/03/10 21:22 · MS 2017

    정리) 완벽한 가치란 결코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가치에의 추구를 비판할 수는 없음. 니체는 가치의 타락을 통찰력있게 파악하여 비판했지만 순수함을 이해하지는 못했다는 생각.

    작성자분의 혼란이 니체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작성자 분한테 내용적으로 뭔가를 가르치거나 대답하는게 아니라 그냥 제 의견을 전달하고 있는 거고요. 사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건 대답이라기보다는 토의/토론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인사철 학생은 아닙니다만. 대학내 인사철 소속 학생들 보더라도 작성자님만큼의 호기심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시야를 인사철이 아니라 그냥 문과 전체로 넓히면 더욱... 생윤 윤사도 제가 각 교과목을 배운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선택한 친구들 얘기 종종 들어보면 개별 철학자에 대해서 절대 작성자님이 판 거 정도로 자세하게 배우지도 않습니다. 실은 생윤 윤사한 분들 들어와주세요~ 하신 걸 보고 생윤윤사는 안했지만 저도 철학은 어느정도 재밌게 공부한 기억이 있어서 아무 부담 없이 들어왔는데 ㅋㅋㅋ 암튼 대단하고 멋있단 이야길 드리고 싶습니다. 밥벌이 안되는 과목은 쳐다보지도 않는 세상인지라.

  • Ivoire · 802814 · 18/03/10 23:23 · MS 2018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워드로 옮겨봤더니 A4 6페이지 가량을 써 주셨네요... ㄷㄷ 바쁘시다는데... 저에게 이토록 크게 신경을 써 주시다니... ㅠㅜㅠㅜ 감동스러울 따름입니다

    이제 제 생각을 조금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니체가 나폴레옹과 카이사르를 향해 '불완전한 위버멘쉬'라고 말했던 것이 souvenir님은 '그들이 상대를 지배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니체의 철학에서 상대를 지배하는 행위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그리고 어쩌면 '위대하기도 한' 것입니다. 니체의 입장에서 노예 도덕을 따르는 비겁자들은 주인 도덕을 창조해내는 위대한 자들에게 지배를 당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 부분이 저와 답변자님을 포함한 많은 니체 입문자 분들이 컬처쇼크를 당하는 부분이긴 합니다만...) 그리고 위버멘쉬의 조건 역시 '민중을 지배하는 권력을 갖는 것'이지요. 현대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이것이 정신적 권력이라는 의미로 순화가 되기는 했습니다만, 니체의 급진적 귀족주의 사고방식을 보면 이의 본래 의미는 정말 말 그대로 정치적인 의미가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도덕의 계보학에 대해서는 답변자님이 니체의 사상에 대해 약간 오해가 있는 것 같기는 합니다. 양심적이고 착한 사람들은 물론 존재합니다. 그리고 법률이 보편 도덕을 지향하는 것 역시 사실이고, 니체는 이렇게 사실적인 부분들을 모두 인정했습니다.
    니체는 도덕의 '불완전성'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기원 자체를 부정한 것'입니다. 즉, '착하게 살 수 없다'가 아니라 '착하게 살면 안 된다'라고 말한 것이 니체라는 것이죠. (이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온전히 동의하는 바는 아닙니다. 왜냐 하면, 이대로라면 소크라테스에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보편 도덕을 지지했던 수많은 철학자들이 모두 속아넘어갔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를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인간의 행위를 '선'과 '악'으로 나누는 보편 도덕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개인적 선호에 따른 '좋음'과 '나쁨'만이 있었다고 합니다. 강자들은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좋음'을 마음껏 누리고 살 수 있었지만, 피지배자인 약자들은 '좋음'을 추구할 자유가 없었습니다. 자유롭지 못한 삶 속에서 그들의 정신은 병들어갔고, 강자들을 계속해서 질투하게 됩니다. 그래서 약자들은 서로 연대하여 강자를 이길 방법을 고안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교한 도덕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약자를 돕지 않고, 겸손하지 않으며, 자신의 '좋음'만을 추구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라고 말하는 도덕률을 만들어서 그들을 세뇌하는 음모를 계획한 것이죠. 이것이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의 시작이고, 종교의 힘이 약해진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도덕률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니체는 이를 두고 '전염성 정신병'이라고 말했습니다. (동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생각해도 조금 과한 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니체는 노예 도덕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좋음'을 좇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결국 영혼의 파멸로 이어진다는 것이죠. (이것은 니체의 실존주의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편 도덕을 지향하는 마음이 아무리 순수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비겁한 노예들에게 '속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기주의에 대한 혼란은 저 스스로 어느 정도 해결했습니다. (인터넷 서핑이라는 상당히 인스턴트한 방법이긴 했습니다만... ㅎㅎ) 니체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서로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기주의는 상술한 것과 같이 자신의 '좋음'을 좇기 위해 타인을 고려 대상에서 잠시 배제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상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다만 이기주의도 그 목적성에 따라 자신에게 이로울 수도 해로울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힘을 기르기 위한 것이라면 좋은 것이고, 안일함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라면 해로운 것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라는 것이죠. 사고를 약간 비틀어보니 쉽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첫째, 나폴레옹&카이사르와 히틀러는 무엇이 다른가. 왜 전자는 위버멘쉬이고 후자는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니체를 연구한 많은
    후대의 철학자들이 니체는 맹목주의를 비판했다는 점에서 나치스트나 파시스트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니체가 히틀러를 보았다면 그를 비판했을 것이란 말이죠. 니체를
    아는 사람은 적어도 진리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는 이 말은 믿습니다.

    둘째, <데미안> 中 막스 데미안의 가인과 아벨 설화에 대한 해석입니다. 가인은 분명히 '분노에 가득 차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힘은 물론 강했습니다만, 의지보다는 충동에 가깝다는 것이죠. 그리고 분노는 열등감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야훼로부터 인정받지 못 했다는 것에 대한 열등감과 분노가 가인의 살인을 유발한 것이잖습니까. 그런 데도 왜 야훼는 가인에게 위대함의 표식을 주었는지, 그것이 궁금한 것입니다. (물론 헤세가 니체는 아닙니다만, 사실 데미안은 니체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도 모두가 말할 정도로 어쩌면 니체이스트의 성장 일기라고 볼 수도 있는 소설이기 때문에...)

    셋째, 도덕의 기원에 다른 견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보편 도덕을 지지한 사람 중 도덕의 '기원'을 연구한 사람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도덕률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인류 역사 수 천년동안 성역을 침범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죠. 반면 근대 실존주의자들 중에서는 니체와 같은 도덕 계보학자들이 몇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의견을 표했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철학을 그토록 깊이 파는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ㅠㅜ 솔직히 문사철이 인기가 없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요즘 인문학 열풍 같은 것도 있고 해서 공부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리고 저 역시도 인스턴트 지식들 하나하나씩 주워서 공부한 거고 니체 본인이 쓴 책들은 너무 난해해서 못 읽겠더라구요. 도덕의 계보학도 사실 너무 어려웠구요, 차라투스트라는 60페이지 읽고 던졌습니다 ㅠㅜ (도덕 계보학이 번역이 나쁘다는 서평이 있더라구요. 저도 읽으면서 그 생각 했는데, 사실인가요 아니면 저랑 그 사람이 못 읽는 건가요? ㅠㅜ)

    글구 이렇게 철학에 관심 많이 가질 수 있는 것도 어리고 세상 물정 몰라서 그렇습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하잖아요. 사회생활이라는 걸 안 해봤기 때문에 현실감도 없고, 내 이상은 창창히 펼쳐질 것 같고 하는 무식한 생각을 하는 겁니다. 저를 설명하자면 저는 '소심한 돈키호테'랄까요. 꿈은 장황하면서 현실에서는 풍차로 돌격할 생각조차 못 하는 그런 사람이예요. 제 닉네임인 Ivoire(이브와르)는 저의 호(號)와 같은 이름인데요, 상아탑(Tour d'Ivoire, 뚜르 디브와르)에서 따온 겁니다. 물론 그 상아탑에 대한 저의 해석은 조금 다릅니다. 도피처가 아닌 망루이자, 도약을 위한 디딤돌로서의 의미로 해석을 했거든요. 어쨌든 음... 제가 이렇게 철없는 사람입니다 ㅎㅎ

  • souvenir · 781763 · 18/03/10 23:48 · MS 2017

    니체가 양심적인 사람의 존재를 인정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애초에 양심 자체를 우습게 봅니다. 니체가 선한 가치, 양심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한다손 그는 그것들을 업신여기며 따라서 선한 사람 양심적인 사람은 실상 허상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있어 제가 오해를 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착하게 살면 안된다라는 이야기에는 착하다는 것이 사실 착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착하게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그들은 그냥 겁쟁이에 불과하다 (애초에 착하게 산다는 것은 그냥 정신승리일 뿐이다) 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니까요. 애초에 도덕의 계보학은 도덕의 진위 여부보다는 도덕의 발화자가 누구이며 그 도덕이 누구로 하여금 더 꿀을 많이 빨게 하는지를 탐독합니다만. 그 결과 니체가 도달하는 결론은 도덕의 진위 여부 자체를 공격하고 도덕 및 도덕을 추종하는 사람들 자체를 매도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고 말입니다.

    법에 대한 이야기의 경우 니체를 비판하기 위해 제가 가지고 온 것입니다. 어느 사회를 놓고 보더라도 법이라든가 규범이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더라고 정의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고 그 노력의 총체로서 역사 속 철학자들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한 이야기였습니다. 니체가 법, 규범의 불완전함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는 실제로 법에 내재된 불완전함보다는 도덕의 기원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입니다. 글이 길어지다보니 흐름을 놓쳐서 좀 꼬였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도덕이란 그저 오랜 세월에 거쳐 약자들이 만들어낸 거라고 이야기할 때 -즉, 독수리에게는 맛있는 고기 맛없는 고기의 구분만이 있고 (good/bad) 반대로 힘이 없는 양은 자기를 good, 독수리를 evil하다 말하며 독수리는 나중에 디져서 저편세계에 가서 처벌받으리라 이야기할 때, 선악의 관념과 사후세계의 개념이 약자에 의해 오랜 세월에 거쳐 창조된 관념이라고 이야기할 때 - 그는 근본적으로는 선악가치 자체를 매우 우습게 여기고 있기 떄문입니다. 법에 대한 이야기는 니체에 대비되는 이야기로서 제가 갖고 온 이야기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슴미다. 확실히 중간에 흐름을 이탈하기는 했습니다만...

    한 편 니체는 양심을 놓고 외부로 발산하려는 본능을 억누르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오랜 처벌의 역사를 통해 무의식중에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각인되어 양심이 형성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요컨대 니체가 보기에 양심은 질병입니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억누르니깐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제가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는 이야기. 왜냐하면 당장 내가 배고파도 남한테 빵 한 조각 더 주고 당장 내가 아파도 남부터 더 챙기는 사람, 그런 순수한 영혼과 양심을 지닌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는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의 양심을 본능을 억누르는, 그저 오랜 처벌의 역사의 결과물로 해석하는 것은 어딘지 심각하게 배배꼬인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사회 개별 성원들을 억누르는 가치, 요컨대 타락한 가치는 잘 이해하지만 순수한 가치만큼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신'은 없을 수 있고 '저편 세계'는 없을 수 있습니다만. 인간이 언표할 수 없고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하더라도 순수한 실재는 있을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했고 '너의 무지를 알라' 고 이야기했으며 비트켄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에 반해 니체는 말할 수 없는 것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말로 표현할 수는 없을 지 몰라도 위대한 무언가가 있고 꼭 따라야 할 무언가가 있다고 봅니다. 도덕의 역사는,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그 무언가에 조금씩 근접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약자들의 발악 및 처벌과 망각의 역사가 아니라.

  • Ivoire · 802814 · 18/03/11 00:58 · MS 2018

    상당히 합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홍규 저의 <니체는 틀렸다>를 아시나요? 그 사람 책같은 경우는 보니 기존 질서의 붕괴에 분노하며 비이성적으로 글을 풀어헤치고 있던데, 그런 식의 서술과 확실히 비교가 되네요. (순수한 선이 존재한다는 것은 직접 생각하신 내용인가요? 그렇다면 상당히 감탄스러운 발상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

    그런데 제 생각은 이러합니다. 유아들을 봅시다. 그들의 행동에 있어 배려는 없습니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서로 먼저 먹으려고 하고, 빼앗고 싸우고 울고 불고 어떤 경우는 폭력을 사용하기까지 하죠. 한 번 이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제가 교회를 다닐 때였는데, 목사가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이 원죄의 증거다'라는 이야기를 합디다. 이러한 견해라면 원죄설(보편적으로는 성악설)은 어쩌면 아브라함계열 종교 뿐만 아니라 모든 보편 도덕 관점의 해석에서 도출되는 결과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이들은 이기적이니까요. 그런 아이들이 사회화 교육을 받고 보편도덕의 지배를 받으면서 착하게 자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수해 보이는 행동 역시 니체의 입장에서는 교육의 결과라는 거죠.

  • Ivoire · 802814 · 18/03/11 01:15 · MS 2018

    (디진다는 표현 보고 깜놀 ㅋㅋㅋㅋ 역시 철학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 Ivoire · 802814 · 18/03/11 18:05 · MS 2018

    그리고 '순수성'에 대한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오히려 '이기심이 순수성'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순수성이라는 것이 사회화된 인간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허상일 수 있다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가 상술한 아이들의 이기적 본능이구요. 또 이런 예는 이기주의와는 무관하긴 한데, 가끔 영유아들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성기를 만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행동을 본 부모들은 깜짝 놀라 자녀를 말린다고 하죠. 부모들이 놀라는 이유는, 아이가 갖고 있는 이미지인 '순수성'과 성적 행위가 갖고 있는 이미지인 '비순수성'이 보편적 시각에서 상당한 부조화를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의사들은 하나같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행동이니 아무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죠. 이런 예는 과학적 시각에서의 자연스러움과 사회적 시각에서의 순수함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니체가 기독경의 처녀잉태에 대해 대차게 비판한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잉태의 숭고함을 모독했다는 것이지요.

  • souvenir · 781763 · 18/03/14 20:20 · MS 2017

    과학을 존중합니다만 인간은 경험과 관찰, 과학으로 정의내리기엔 너무 커다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적인 관점에서 우리가 사랑을 한다면 그건 그냥 도파민이 분비된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열정을 느끼는 것도 무언가 호르몬이 작용해서 그런 것이죠. 그러나 정말 그 뿐일까요? 과학이 모든 것에 답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경험될 수 없는 세계, 경험 바깥의 세계가 있다고요. 철학은 이 경험 바깥의 세계에 관심을 가집니다. 예컨대 인간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에 경험이나 관찰 등이 답을 내려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질문은 오직 사변적으로, 철학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고민해야만이 답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집니다. 인간 본성이 어떠한가? 는 관찰, 경험을 통해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관찰과 경험이 나름의 (과학적인) 답을 내릴 수는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철학적 관점에서 의미가 없습니다. 과학적으로 인간의 본성이 이기적인게 확정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이 사실을 모든 인간이 알게 되었다고도.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는 “나는 이기적인 존재구나. 그래도 내 나름대로 옳다고 믿는 방법이 있고 그 방법대로 살거야” 생각하고 그에 따라 살 것임을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이기적이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인정하게 되더라도 여전히 어떤 종류의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며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런 삶이 그저 본능에 충실한 삶보다 의미있는 삶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철학의 관점에서, 인간 본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답을 내리는 행위는 그냥 나의 철학적인 결단에 불과합니다. 내가 숙고한 끝에 내 나름대로 결단을 내리고 그에 따라 살아간다고 해야 할까요? 요컨대 근거 자체보다도 내가 그렇게 믿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이야깁니다. 이런 경우에 있어 인간 본성에 대한 결론은 철학적으로 '요청'되어 내려지는 것이지 과학적이고 실증적으로 정의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딘지 복잡한 이야길 수도 있겠으나.

    사실 심리학적이랄까 과학적으로도 어느 정도 반박할 수 있겠습니다만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보아 아예 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설명하기 어렵습니다만 인간에게는 근원적인 무언가,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믿습니다. 관찰과 경험에 의해 파악될 수 없는, 과학에 의해 무미건조하게 정의될 수 없는 무언가가 말입니다. 저는 이 근원적인 무언가가 소중하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이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리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다면 그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토록 불완전한 세계에서 때로는 이성보다는 어떤 종류의 맹목적인 믿음이 중요하다고 믿기에. 그리고 형이상학이랄까 조금 과장하면 철학 전체는 어떤 면에서는 그 맹목적인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은 나의 존재 자체가 나의 사유에 의존하는 게 인간이니까요. 니체는 이 근원적인 무언가를 잘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본인도 어느 정도는 알았을 겁니다. 살고 싶은 대로 살라, 운명을 사랑하라. 이런 주장은 애시당초 경험과학적으로 논증될 수 없고 오직 그런 맹목적인 믿음에만 근거를 두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그저 세포들의 총체가 아닌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런 ‘근원적인 무언가’에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간 인간은 이 근원적 무언가에 의거하여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 따위의 질문들에 골몰하였다고도. 그리고 경험으로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추구되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도. 도덕의 역사는 그 무언가에 대한 헌신적, 반성적 탐구의 과정이었다고. 때로 타락한 사람들이 타락한 가치를 강요하기도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하지만 네가 나를 믿어준다면
    모두 다 진짜가 될 거야
    - E.Y. Hamburg & Harold Arlen, It's only a paper moon

  • Ivoire · 802814 · 18/03/10 23:40 · MS 2018

    그리고 한 가지 가장 중요한 것, '이것을 어떻게 현실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당장 누가 뭐래도 NO도 못 하는 주제에 이러려고 니체 공부했나 자괴감이 들고 괴로운 감정이 드는 것입니다. 사실 앞에 장황하게 말한 것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는 고민이긴 합니다만, 어떻게 하면 조금 강해질 수 있을까요?

  • souvenir · 781763 · 18/03/15 00:32 · MS 2017

    그건 원래 그래여.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아는 거랑 실천하는 건 원래 별개임. 니체 본인부터가 전혀 강한 사람이 아니기도 했고. 뭐 매사에 있어서 이거 하기 싫으면 싫어, 해도 좋겠지만 어려운 일이고 또 제 개인적으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도 보고. 큰 틀에서 차차 연습을 하심 되겠져. 그리고 내 선택들을 반성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구여. 엥 내가 이 과 대신 이 과를 가려는 건 남들이 그러라고 해서 거기 굴복한거 아닌가? - 뭐 이런 식으루다가...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고 있는 거신가를 끊임없이 검토하고 아니다 싶음 때때로 좀 원하는 방향으로 선택을 내리구... 그게 암튼 가장 이상적인 그거 가튼데 역시나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원래 "하고 싶은 거 다 해. 옛다 자유" 하면 막상 진짜루다가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르트르가 말하기두 했고... 인간은 자유롭도록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고요. 자유에는 필연적으로 불안이 따르기 때문이 인간이 자유롭다는건 인간이 평생을 불안에 시달린다는 이야기라서 그렇답니다.

    저 위에 길다란 질문들은 좀 복잡하니깐 주말에..

  • souvenir · 781763 · 18/03/16 20:46 · MS 2017

    1. 딴은, 힘에의 의지를 그냥 지배욕구로 해석하는 것은 확실히 잘못이라는 생각은 합니다. 이건 들뢰즈가 한 말입니다만, 의지가 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원하는 것입니다. 힘에의 의지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초인은 창조하는 자이지 탈취하는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기독교적 가치에 의해 형성된 기존의 선악 가치를 때려 부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수의 약자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형성된 도덕이 강자를 구속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소수의 (정신적) 귀족들에 의한 창조와 가치의 전도를 역설합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실질적인 힘의 동원은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힘의 동원이 무엇을 위한 힘의 동원이냐, 일 것입니다. 니체는 나폴레옹과 카이사르가 지향한 무언가에 공감 했나 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니체는 창조적인 개인을 억누르는 공동체를 혐오합니다. 우열을 가르는 기준은 아무튼 (정신적인) '힘' 이어야 할 것이지 인종이 아니란 이야기죠. 저 인종은 열등해, 하고 말하고 억누르는 건... 어떤 면에서는 창조적인 힘으로 그들을 이길 자신이 없는 약자들이 또다른 허구의 가치를 주작해 낸 걸로 볼 수도 있을 터이니까요.

    사실 니체 본인부터가 워낙 아 다르고 어 다른 이야기들을 많이 해서, 니체가 정확히 어떤 뜻으로 각각의 말들을 한 것인지 세부적인거까지 밝혀내기란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만 말임미다.

    2. 니체는 애초에 선과 악 자체를 해체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세계에는 good과 bad만이 존재하는데 약자들에 의해 이것이 good과 evil의 대립관계로 오해되어 왔다고요. 신이 아벨만을 예뻐하자 카인은 아벨을 죽여버립니다. 만일 카인이 끝까지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더라면 그는 그저 아벨은 나쁜 놈이고 자기는 착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겠지요. 그리고 자기처럼 착한 사람들이 언젠가 보답을 받고 나쁜 사람들은 처벌 받을 가상의 상황을 가정했겠지요. 카인이 니체적인 약자였으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만. 아시다시피 그는 그냥 아벨을 죽여버립니다.

    그건 아벨만이 신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지, 아벨이 악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겠지요. 니체에 의하면 독수리는 양을 보고 맛있다 (good)와 맛없다 (bad)의 구분만 합니다. 마찬가집니다. 카인도 아벨을 보고 저 놈 싫다는 생각만 한 것이지요. 그래서 죽인 겁니다.

    열등감에 찌든 약자들은, 니체에 의하면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저 놈은 나빠,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자기 합리화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현실에서 힘의 우위를 발휘하여 그 사람을 죽인다면 그건 그냥 그 사람이 싫어서,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 나에게 본능적인 행복을 가져와서 죽이는 것일 뿐, 딱히 열등감의 결과라고 보기는 애매하지 않겠나 합니다 (이것은 물론 제 생각은 아닙니다). 분노에 가득 차서 죽인 거기야 합니다만은 어쨌든 그 기저에 깔린 "쟤 짜증나"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냐 못 옮겼냐의 차이가 아닐까요.

    데미안은 읽은지도 오래 되었고 이 책에 대해서는 작성자님만큼 깊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이 책을 니체보다 먼저 접해서. 고3때인가 읽은 책이었는데 전 그냥 소설 읽는단 생각으로 읽었지 작성자님만큼 이것저것 분석해가면서 읽지는 않았네요. 문과생과 이과생의 차이가 아닐까 변명하고 싶습니다만 그럼 여러 문과분들이 응 너만 그래~ 할 터라서링... 암모튼 그래서 아주 확신이 가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역시 아벨/카인 신화의 재해석은 니체가 아니라 헤세가 한 것이기 때문에,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 한다손 세부적인 부분에서까지 완벽하게 니체적이리란 보장은 할 수 없겠져. 니체의 소설이 아니라 헤세의 소설이니깐 말임미다.

    3. 실존주의자는 아니지만 구조주의 근대 철학자 가운데 도덕에 관한 계보학적 연구를 진행한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푸코가 있습니다. 푸코는 스스로를 극단적 니체주의자로 일컫기도 하는지라 도덕의 계보를 아름답게 묘사하지는 않습니다. 실존주의 계열에서는 계보학자를 자처한 철학자들이...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없네영.

    -

    출판사 각각에 따른 번역의 질에 대해서 자세한 거는 모르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사실 뭔가 철학서라기보단 소설틱한 부분이 있기는 하져. 뭐 니체도 니첸데, 니체 한 사람만 파는 거도 의미는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 책 읽어보는 것도 재밌어하실 거 같네여. 좀 다양한 생각을 하는데도 도움이 될 거 같구...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만 카뮈도 왠지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니체랑 유사한 점도 있는데 다른 점도 있고 그 다른 점이 매력적이라고 저는 생각해서링. 그리고 카뮈는 니체랑은 다르게 글이 편하게 읽힙니다. '이방인'은 굳이 상징적 장치들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그냥 소설 자체로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고요.

    여담이지만, 저는 철없는 사람들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막상 사회에 나와보니, 철이 들지 않는 것이 철이 드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더라고요. 어른이 된다는 건 이것저것 포기하고 타협하고 시야도 좁아지고, 뭐 그런 부분도 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나름의 이상을 품고 현실에선 얼마간 타협하더라도 가슴 한 켠에는 그 이상을 버리지 않고 계속 남겨두는 것도 멋지지 않으련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말임미다.

  • souvenir · 781763 · 18/03/16 21:22 · MS 2017

    +) 계보학자가 아니라 도덕의 기원을 탐구한 사람으로 시야를 넓힌다면 몇 명 있긴 함미가. 예컨대 루소가 있겠네요. 그걸 계보학이라 볼 수 없습니다만 그 나름대로 도덕의 기원에 대하여 논하기는 하니깐...

  • Ivoire · 802814 · 18/03/17 23:58 · MS 2018

    형이상학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사실 이 이야기를 형이상학과 실존주의의 대립으로 이어나가자면 그닥 의미있는 토론이 될 것 같진 않네요. 사실 그 누구도, 말 그대로 형(形) 이하의 세계에서 사는 상태에서, 형 이상의 것이 있다 없다라는 사실은 귀납적으로든 연역적으로든 제대로 된 추측이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저는 다만 땅 위에서 살아가는 동안은 땅의 가치에만 충실하자는 말에 공감을 한 것일 뿐입니다.

    '존재는 사유에 의존한다'는 말 역시 이러한 맥락 위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한 인간이 형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 하더라도, 몸이 땅에 붙어 있고 형 이하의 것만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 세계 안에서 그것은 무의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은 나아가, 그것이 땅 위의 가치를 절하하고 억제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방식의 형 이상 추구는 '비판받아 마땅'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형 이상의 것이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바로 눈 앞에 있는 것들을 놓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는 말이죠. 물론 이는 생각의 차이이고, 저도 완전한 실존주의자는 아니기에 이러한 주장에 완벽히 공감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니체를 배우고 한참 뒤에 실존주의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습니다.)

    앞서 세 질문에 대한 자세한 답변은 감사드립니다. 갈피를 잡아주셨으니 이제 자세한 부분은 제가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카뮈의 이방인은 얼마 전에 읽어보았습니다. 데미안도 그렇고 이방인도 그렇고 다 니체를 알고 난 다음에 이해를 돕기 위해 부수적으로 더 읽은 책들이었어요. 중학교때까지만 해도 책 읽는 걸 지지리도 싫어해서 읽은 책이 하나도 없었는데, 고등학교 와서 철학을 접하면서 이런 책들을 막 접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그런 니체와 실존주의 관련된 것들 중심으로요. (특히 카뮈는 너무 잘생겨서 제가 좋아합니다 ㅠㅜㅜㅠ)

    그리고 지금 니체를 이렇게 심층적으로 파는 이유는, 일단은 차라투스트라를 읽기 위해서입니다. 찾아보니 저만 어려운 게 아니더라구요. 난해한 아포리즘들로 가득한 책이라서 니체의 사상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것 때문에 깊게 파고드는 것도 있구요,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지만 저는 탈기독교인입니다. 한국창조구라회가 교회 수련회에 강연을 오고나서부터 교회를 버렸는데요, 어릴 때부터 나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저는 새로운 가치를 찾을 필요성을 느꼈고, 혁명적 사상가로 유명했던 니체를 아무 생각없이 잡았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엄청나게 당황스러웠죠. 집어던질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구요. 그래도 제 생각에, 니체는 그 어떤 철학자보다 혁명적인,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새로운 세상을 다시 쌓아나간 철학자라고 생각했기에, 어쩌면 니체와 같은 과감한 출발이, 미래에 어떤 길로 가든, 진취적이고 열린 사고의 길로 나아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요즈음 느끼는 바는, 제가 드디어 '낙타'에서 '사자'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빨도 채 안난 아기사자이긴 하지만... 여러 가지 생각들이 아직 미성숙하고 정돈이 안 되어 있지만, 저 스스로가 뭔가 달라졌다는 것은 느낍니다. 이제 실천적인 인간만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들구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souvenir님이 과장 않고 크디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생각을 정돈하고 논리적 시스템이 어느 정도 구축이 되었다는 것을 느꼈거든요. 지식인에 철학 질문들 올리다가 속 터져 죽는 줄 알았는데... 역시 철학은 은둔의 학문이 아닌 광장의 학문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군요. 아무래도 저보다 철학 모르신다는 말은 심각한 ㄱㅁ이신 것 같습니다;;
  • Ivoire · 802814 · 18/03/17 23:58 · MS 2018

    그런데 문과생이신데 어떻게 한의대를... 지원하셨나요?

  • souvenir · 781763 · 18/03/18 01:32 · MS 2017

    맞슴미다. 여기서부턴 그냥 평행선을 달릴 뿐이라서 더 이상의 이야기가 별 의미가 없어지져. 그 이야기를 하려다가 말았네요. 가치관의 차이겠지만, 저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순수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게 진정으로 순수한지를 증명하라 한다면 방법은 없겠지만. 결국 중요한건 내가 그렇게 믿는다는 거고, 내가 그렇게 믿는다면야 사실이 어떻든 그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이야기일진대 말씀하신 대로 이 이야기가 계속되면 동어반복이 이루어질 뿐이겠져.

    사실 실존주의 계열 쪽에서도 조금 더 완화되었다고나 할까요, 조금 더 낭만적이라고 할까요, 뭐 그런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사르트르라든지 키르케고르라든지. 다만 키르케고르 같은 경우는 책이 좀 안 읽히는 경향이 있어서링. 아무튼 시간 되심 그런 사람들 글 읽어보시는 것두 나쁘진 않겠져. 카뮈도 그런데, 뭐 이방인을 이미 읽어보셨다니깐. 참고로 시지프 신화 안 읽어보셨으면 고것도 읽어보심 이방인을, 그리고 카뮈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도움 받으실 수 있을 검미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도 뭐 너무 모든 걸 다 알아야지, 하는 생각을 버리시면 의외로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거구..

    니체에 대해서는 저도 나쁘게 생각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땅 위에서 행복해야겠져. 그리고 우리가 양심이란 이름으로 행해오던 많은 것들이 뭐랄까, 사실은 사회적 시선에의 두려움 때문이라는 그의 문제 제기는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몸의 언어에만 귀를 기울였을 때 2프로 충족되지 못하는 것이 있을 터이고 그 2프로가 추가로 충족될 때, 땅 위의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고 저는 믿어요. 암튼 니체는 타락한 도덕의 쇠창살에서 인간을 해방시키고 인간에 자유를 선물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가 세상에 미친 기여는 상당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머학생이구 머학생은 뭐랄까 공부하고 싶은게 있으면 전공이 그게 아니더라도 신청해서 들을 수 있는 어드밴티지가 있습니다 (나중에 전공을 몰아서 들어야 하니 어떤 면에서 바보같은 일이긴 한데여). 고딩 때는 철학에 별 관심이 없었구, 있었다 한들 강의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작성자님만큼의 깊이로 결코 파지 못했을 거에요. 사실 머학와서 얼추 공부한 지금도 제 철학 지식은 대체로 그냥 넓고 얕습니다 (넓다는 것도 걍 넓고 얕다가 한 세트로 움직이는지라 넓다 한 것이지 별로 넓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비전공자지만 흥미가 있어 철학과 전공 수업 관련해서 좀 알아봤지만, 대체로 한 철학자에 대해 아주 깊이 판다기보다는 철학사랄까 특정 철학 영역이랄까 등에 대해 암튼 넓고 얕게 다루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본 바로는 작성자님만큼 열정을 갖고 공부하는 사람이 학내에서도 그닥 많지는 않습니다.

    한의대는.. 문과도 정시로 한의대 지원이 됨미다. 모든 학교가 다 되는지는 몰겠지만. 그래서 지원해서 붙었는데, 다니지는 않습니다.

    암튼 재밌었어요. 저도 인사철이 아닌데 철학에 관심 있어서 나름 오오 나도 뭐 인문학에 관심 있는 편이지, 하는 건방진 생각이 좀 있었는데 ㅋㅋㅋ. 작성자님 보고 겸손해지게 되구 또 (이건 아마도 내일쯤 되면 없어질 생각이겠다만) 책도 더 많이 읽고 싶단 생각도 드네여. '생윤윤사황들' 도와달란 이야기보고 뭐 생윤 윤사 해본적은 없지만 어느정도는 답할 수 있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 글 들어왔는데 얘기가 이렇게 길어졌네여 ㅋㅋ. 암모튼 공부 열심히 하시구 올 수능 잘 보시구 마음 한 켠의 꿈 꼭 성취하시길 바람미다.

    화이링

  • Ivoire · 802814 · 18/03/18 13:31 · MS 2018

    사랑합니다 ㅠㅜ
  • souvenir · 781763 · 18/04/10 01:17 · MS 2017
    회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souvenir · 781763 · 18/04/10 01:46 · MS 2017
    회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souvenir · 781763 · 18/04/10 02:21 · MS 2017
    회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souvenir · 781763 · 18/05/27 02:53 · MS 2017
    회원에 의해 삭제된 댓글입니다.
  • souvenir · 781763 · 18/08/13 17:49 · MS 2017

    ㅎㅇ여..예~전에 질문하셨던, 도덕의 기원에 관해 니체적인 견해를 갖고 있던 사람이 없었냐는 질문에 대해 간단히 답변드리고자 합니다. 니체 이전에는 저 옛날 트라시마코스라는 사람이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지적한 바 있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 파스칼이 정의란 단지 힘이 센 자의 목소리일 뿐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의 계보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탐구를 한 것은 역시 니체가 사실상 처음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니체 이후인데, 현대 철학의 중요한 한 분과가 해체주의 철학입니다. 해체의 핵심이 바로 정의를 비롯한 보편적인 가치들이 사실은 이익을 대변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 라는 폭로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해체주의 철학자들은 아주 많습니다만, 현재로서 제가 얼추 설명할 수 있을만큼 자세히 아는 사람은 데리다 정도가 유일한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해체주의 철학자들이 니체를 계승하여 도덕이란 이익관계로부터 유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뭐 그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니체에 대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해본 결과, 이제는 제 스스로 얼마간 생각이 정리되어 다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플라톤을 필두로 한 많은 철학자들은, 불완전한 우리가 닮아야만 할 저 완벽한 이데아의 세계를 상정했습니다. 누군가는 그 이데아의 세계를 신이라고 불렀죠.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단일한 밑그림이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니체는 신을 죽입니다 -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하나의 신은 없다고 그는 선포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고대의 소피스트들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니체와 소피스트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어요. 소피스트가 '지금,여기'에 안주한다면 니체는 부정과 초월을 변함없이 강조합니다. 다만 지금-여기의 나를 부정한 끝에 언젠가 되어야만 할, 초월의 지향점으로서의 나중-저기에의 나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많다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변함없이 부정과 초월의 정신을 강조합니다. 그리하여 지금-여기에 안주한 채 저 하늘의 별을 향해 동경의 화살을 쏘아올리지 못하는 자를 그는 종말인이라고 부르고요.

    결국 인간이란 끊임없이 자기자신을 극복하는 존재, 끊임없이 (단일하고 미리 주어진 신이 아닌) 내가 직접 그려낸 위버멘쉬를 향해 초월해나가야만 하는 존재. 그리고 그런 존재에 가까운 사람을 니체는 굉장히 좋아했고, 그 과정에서 물리적인 힘은 동원될 수도 있다고 그는 보았고. 히틀러와 나폴레옹-카이사르의 차이? 니체만이 알 것입니다만, 아마 저 하늘을 향해 어떤 동경의 화살을 쏘아올렸느냐에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따지고보면 사자의 자유를 뛰어넘는 어린아이의 자유를 니체는 상정하니까요. 차라투스트라~ 책에 그런 대사가 있습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무엇을 위한 자유'이냐가 진짜로 중요한 것이다. 뭐, 그게 히틀러와 나폴/카이사르의 차이 아니었을지요.

  • souvenir · 781763 · 18/08/13 17:52 · MS 2017

    너는 네가 자유롭다고 믿는가?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네가 멍에에서 벗어나 자유롭다는 것이 아니라 너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너는 멍에에서 벗어나도 좋은 그런 자인가? 예속을 던져버리지 마자 그 자신의 마지막 가치까지 저버린 자도 많이 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그런 자유가 차라투스트라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너의 눈은 분명히 내게 말해주어야 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