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베사K [723854] · MS 2017 · 쪽지

2018-02-17 09:3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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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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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은 탄소, 수소, 산소, 질소, 인, 황 등의 매우 단순한 화학원소들이 고도로 정교하게 조립되어 생명 활동을 갖게 된 존재(entity)이다.

내 몸을 구성하는 화학원소들은 137억 년 전 빅뱅에 의해 우주가 만들어지면서 생성된 그 원소들이다.

이 원소들이 때론 물질 속에 갇혀 있기도 하고 때론 생명체 속에 들어가기도 하면서 돌고 돌아, 윤회한 뒤 오늘 현재의 내 몸속에 들어와 있다.

이 화학원소들은 내 몸속에 오래 머물지도 않을 것이다. 내 몸을 구성하는 화학원소의 90퍼센트 이상은 1년 이내에 다른 원소로 치환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몸은 개울물과 같이 세월에 따라 흘러가는 하나의 물질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생명이 흐름 속에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생명은 탄소골격의 유기복합체

생명체에는 화학원소들 이외의 어떤 성분, 이를테면 영혼이나 생기력과 같은 초자연적인 어떤 것이 깃들어 있지 않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고귀한 생명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 생물학자들은 생물은 결국 유기물 덩어리라는 데 쉽게 동의한다.

그렇다면 물질이 생명이 된다는 말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반문의 답은 애석하게도 그렇다이다.

물질이 생명이 되는 이 경이로운 현상에는 창발성이라는 물질세계의 흥미로운 특성이 깔려 있다.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조직화되어가는 과정에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특성이 나타나는 것이 창발성인데, 이 때문에 조직화가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물질에서 생명성이 돌연히 나타나게 된다.

지구 생명체는 당연히 지구 상에 존재하는 물질들로 빚어져 있다. 이 물질들 중 탄소는 다양한 원소들과 결합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화학적 특성이 있어 지구 생명체의 골격을 이루는 원소가 되었다.

말하자면 생명체는 탄소골격으로 이루어진 고분자복합체인 셈이다. 탄소골격으로 이루어진 분자들 중 생명체를 구성하는 네 가지 거대분자가 탄수화물, 지질, 단백질, 핵산이다.

이들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75퍼센트의 물을 제외하면 나머지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네 가지 거대분자를 조직할 때는 그보다 간단한 단위분자를 레고블록을 쌓듯이 연결시킨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이라는 단위분자가, 탄수화물은 당이라는 단위분자가, 핵산은 뉴클레오티드라는 단위분자가 사슬처럼 연결되어 만들어진 고분자중합체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단위분자에는 없던 새로운 특성이 거대분자에서 창발적으로 나타난다.

이들 네 가지 거대분자들이 다시 정교하게 서로 결합하여 세포라는 생명의 단위가 만들어지고, 세포들이 다시 서로 정교하게 연결되어 하나의 생명체가 만들어진다.

단계별로 높은 수준의 조직화가 진행될 때마다 새로운 특성이 창발적으로 나타나서 인간과 같이 정교한 생물체가 되는 것이다.


단백질과 핵산: 기능과 정보

생명을 구성하는 네 가지 거대분자 가운데 생명체에 기능을 제공하는 분자는 단백질이고, 정보를 제공하는 분자는 핵산, 즉 우리가 흔히 DNA라고 알고 있는 분자이다.

단백질이 기능을 제공한다는 말은 생명체가 호흡을 한다거나 뛴다거나 광합성을 한다거나 꽃을 피운다거나 등등 어떤 기능이 나타날 때 그 기능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생명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궁극적 원인은 단백질이며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것 또한 단백질이다.

DNA가 정보를 제공한다는 말은 생명체의 생명 현상이 다음 세대에서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게 단백질 합성의 정보를 DNA에 저장하여 전달한다는 말이다. 정리하면 생명 활동의 근원은 단백질이고DNA 정보는 단백질 합성의 정보이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이라 불리는 20종의 단위체가 사슬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 고분자중합체이다. 이러한 사슬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종류와 서열이 단백질에 기능을 부여한다.

어떤 아미노산이 어떤 순서로 배열되었느냐에 따라 단백질의 3차 구조가 결정되는데, 이 구조로 말미암아 단백질의 기능이 결정된다.

즉 모양에 따라 각종 유기화합물과 결합할 수도 있고 각종 화학 작용의 촉매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단백질의 3차 구조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단백질을 끓여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단백질을 끓는 물에서 끓이면 아미노산 서열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 기능이 소실된다. 이는 열에 의해 단백질의 3차 구조가 변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핵산의 정보 저장 기능은 그 단위체인 뉴클레오티드, 혹은 염기(A, T, G, C 네 가지만 있다)의 서열에 있다.

DNA의 정보 기능은 화학적 변성이 일어나지만 않는다면 끓인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3차 구조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백질 정보는 3차 구조가 중요한 아날로그 정보이고 DNA 정보는 서열이 중요한 디지털 정보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맞서는 생명

우리 몸은 얼핏 보면 우주의 섭리인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무질서도) 증가 법칙에 어긋나는 존재인 듯하다.

세월이 지날수록 무질서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질서가 잡혀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를 깊이 성찰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는 생명을 음의 엔트로피를 먹고 살아가는 존재라 정의했다.

생명체는 모든 환경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닫힌 계가 아니고 열린 계이고, 생물체 내에 축적되는 무질서도를 감소시키기 위해 영양분을 끊임없이 섭취함으로써 자연의 법칙을 회피한다.

이를테면 우리 몸은 엔트로피 법칙으로 보면 끊임없이 굴러가는 자전거와 같다. 자전거가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 굴러가야 하듯이 생명체가 살아 있기 위해서는 음의 엔트로피를 흡수하여 계속해서 체내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물질대사는 자전거를 계속 굴러가게 하는 동력인 동시에 흐름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물은 끊임없이 파도에 씻겨 내려가는 모래성이다. 생명체를 구성하는 원소와 분자들은 계속해서 씻겨나간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원자들 대부분이 1년 안에 새로운 원자로 교체된다. 즉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낡고 무질서해진 분자들이 씻겨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생물체의 파도는 모래알을 씻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래알을 가져와서 모래성의 형태를 유지시켜주기도 한다.

모래성의 형태가 유지되는 메커니즘은 직소퍼즐 맞추기와 같다. 낡은 조각이 씻겨나간 자리에 그와 같은 형태를 가진 새로운 조각이 주변 퍼즐조각들의 형태 속에 상보적으로 맞춰져서 들어가게 된다.

생물체 내에는 이러한 분자 간 상호 작용이 수없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1년 전 내 모습이 대부분의 원소가 다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내 모습과 같게 유지해주는 메커니즘이다.

말하자면 생명체는 동적 평형 상태에 있는 모래성이며, 물질대사는 형태를 잃지 않고 그 모습을 유지해주는 힘이다.


생명의 에너지 대사

자동차가 가솔린이라는 탄화수소 연료로 작동하듯이 생명을 구성하는 세포는 ATP라는 유기분자를 연료로 사용해 작동한다.

ATP는 가솔린보다 분자량이 5배쯤 무겁지만 쉽게 쓰고 쉽게 재생하는 화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생명의 에너지 연료를 생산하는 장소는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이다. 세포는 미토콘드리아라고 하는 배터리를 가지고 있어 이곳에서 ATP가 계속 생산된다.

식물의 경우에는 미토콘드리아뿐만 아니라 엽록체라는 또 다른 배터리를 가지는데, 지구 상의 생물체는 모두 엽록체라는 배터리에서 충전한 태양 에너지에 의존하고 있다.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라는 배터리가 ATP를 생산하는 방식은 에너지 준위가 높은 전자를 전자전달계라는 통로 속에 콸콸 흘려 얻게 되는 힘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자가 전자전달계 통로를 흘러가는 힘을 이용해 발전기 모터를 돌리면 ADP가 ATP로 전환된다.

이때 전자는, 미토콘드리아에서는 포도당 등의 음식물에서 떼어낸 전자이고, 엽록체에서는 빛 에너지를 받아 들뜬 엽록소에서 떨어져나온 전자이다.

이렇게 생성된 ATP는 생명 활동에 필요한 거의 대부분의 반응, 운동, 생리적 작용에 연료로 쓰인다


출처

이일하 교수의 생물학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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