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민간인 사찰 증거를 은폐한 혐의로 기소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진경락 전 과장 등 3명한테 법원이 유죄를 선고함에 따라 이 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1차 판단이 끝났다. 하지만 가시지 않는 의혹이 많다. ‘디가우저’(컴퓨터 하드디스크 삭제 기기)를 이용해 증거를 인멸한 사실은 드러났지만, 청와대 행정관의 ‘대포폰’(차명 휴대전화) 사용 의혹 등은 여전히 미궁에 빠졌다. ‘윗선’ 개입과 관련이 있는 대포폰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만큼 야권의 ‘청와대 개입설’ 공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의원은 없고 피켓만… 22일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 1심 판결이 났지만 정치권 논란은 확산일로다. 이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가 진행 중인 가운데 민주당 의원석엔 의원들 대신 대포폰·불법사찰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종이피켓이 놓여 있다. 민주당은 이날 오후 예산심의 참여를 결정하면서 국회는 부분적으로 정상화됐다.
이범석 기자

◆판결문으로 재구성한 증거인멸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정선재 부장판사)는 진씨와 부하인 장모씨가 지난 7월5일 컴퓨터 데이터 삭제 프로그램 ‘이레이저’를 사용해 윤리지원관실 컴퓨터 속 자료를 없앤 사실을 인정했다. 총리실이 검찰에 공식적으로 수사를 의뢰한 바로 그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들은 이틀 뒤인 7월7일 다시 컴퓨터 하드디스크 4개를 떼어내 경기 수원의 한 업체로 들고 가 디가우저 작업을 의뢰했다. 당시 총리실에도 디가우저가 있었지만, 증거인멸 시도가 탄로날까봐 일부러 수원까지 갔다.

이들은 자료를 삭제하며 총리실 내 담당부서인 정보계와 전혀 상의하지 않았고 아무 관련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컴퓨터는 총리실 공용물인데도 디가우저 작업비 전액을 자비로 부담했다.

증거인멸 과정에선 전자공학을 전공한 장씨 역할이 특히 컸다. 그는 나중에 업체에 전화해 “디가우저 작업 뒤에 나오는 ‘SAFE’(세이프)라는 붉은 표시를 지워 달라”고 요구했다. ‘SAFE’는 업체 이름의 일부다. 이는 결국 “디가우저를 썼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말아 달라”는 주문으로 장씨가 ‘완전범죄’를 꿈꿨음을 보여준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여전히 남는 청와대 개입 의혹

장씨는 업체와 통화하는 과정에서 대포폰을 사용했다. 대포폰은 장씨 소유가 아니고 청와대 최모 행정관한테 빌린 것이었다. 장씨는 7월7일 최 행정관한테 대포폰 대출을 요청하며 “감청을 당할까봐 걱정된다”는 이유를 댔다. 이날은 그가 업체를 찾아가 디가우저 작업을 부탁한 바로 그날이다. 장씨가 단순히 감청을 피할 목적이었다면 굳이 청와대 행정관한테 부탁할 이유가 없다. 최 행정관은 같은 대포폰으로 장씨 상관인 진씨와도 통화한 사실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청와대의 부인에도 대포폰이 증거인멸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정황이다.

윤리지원관실 직원 수첩에서 청와대를 뜻하는 ‘BH 지시사항’이란 문구가 발견된 점, 총리실이 디가우저를 오래전부터 자체 보유하며 이용한 점 등도 청와대와 총리실의 조직적 개입을 뒷받침하는 정황이다. 물론 이들은 검찰이 기소한 공소사실에서 빠진 탓에 법원의 판단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검찰은 “수사 과정에서 이미 다 밝혀낸 사실이다. 범죄 혐의와 무관해 기소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해명한다. 그러나 대포폰 등 의혹이 명확히 풀리지 않는 한 재수사 또는 특별검사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조민중·정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