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만의 재수 이야기 (下)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1443899
한편으로 수능 직전에 그렇게 상태가 나빴는데 왜 성적이 잘 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내가 머리가 좋아서일까. 혹은 지난 1년간의 노력이 진실로 멋진 것이고 노력은 언제나 배신하지 않기에? 학평의 모의평가에서 성적이 잘 나왔던 건 믿을만하지만, 그 뒤에 내가 치렀던 사설 모의고사는 형편없었고 거기서 성적이 떨어졌다고 해도 하나도 믿을 게 못 되는 것일까?
솔직한 개인적 생각으로는 아마도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신문에 나오는 학생처럼 국영수를 교과서 위주로 예습복습 철저히 공부한 탓이고 사실은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할 수 있으면 나도 좋겠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노력 없이 단지 운만으로 뭔가를 얻고 잃는다는 건 별 의미없는 일이지만, 가끔은 운이란 게 사람 인생에 있어서 꽤 큰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최소한 애매한 문제 한두 개 맞춘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전반적인 수능 출제 양상은, 내가 자신있었던 언어와 외국어가 다소 어렵게 나오고 수학이 쉽게 나온 건 천운이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또한 불행히도 그 운이란 게 실제로 있다면 약간의 아쉬움을 내게 남기기는 했다.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거창한 해피엔딩은 못 된다. 나는 이 오르비 옵티머스라는, 7년 전에는 존재 여부도 몰랐던 사이트를 발견하고는 뭐 대단한 것이라도 찾아낸 양 생각했고 거기서 나오는 입시 관련 정보들을 한치의 오차도 없으리라 철썩같이 믿었다. M모 사이트 같은 다른 곳의 유료 예상 서비스가 훨씬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았음에도, 그리고 부모님 역시 그쪽을 믿는 게 훨씬 낫다고 내게 간곡히 부탁했음에도 나는 싸우고 또 싸워서 과감히 상향지원을 했다.
재수는 있을 수 없으니 최대한 하향해서 가군 나군 넣고 혹시 모르니 만에 하나를 대비해 다군까지도 하향지원하자는 부모님의 말에 말 그대로 신경질을 냈던 것이다. 운 좀 붙어서 시험 하나 잘 치고 나니 뭐든지 문제없을 것 같았다. 성적 잘 나왔으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고 어디든 넣어도 문제없이 붙을 것 같았다. 내가 그토록 경계하던 과욕이었고 내 자신의 희망에 내가 취해버린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거의 뭔가에 홀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최초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에야 나는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다. 2월 말까지 추가합격 통보가 오기를 기다리며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내가 가고 싶던 대학을 가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어른 말 잘 들으면...으로 시작하는 속담이 아주 빈 말은 아닌가 보다. 안 들어서 손해본 게 입시 관련해서만 벌써 두 번째니까.
아쉬운 일이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짧다면 짧은 인생에서도 후회할 일은 얼마든 많다. 조금만 원서를 더 하향해서 넣었더라면, 수능의 그 수학문제에서 검산 한 번만 더 했더라면, 재수할 때 3월달부터 국사와 제2외국어를 했더라면, 군대 갔다와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졸업하려고 노력했더라면, 아니 대학 1학년 때 술먹고 놀러다니지 말고 공부를 했더라면, 점수 맞춰 아무 대학이나 등록하지 말고 바로 재수를 했더라면, 자연계가 아닌 인문계를 선택했더라면...이러다가는 젖먹던 시절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고 밤을 새우고 새워 방구석에 앉아 후회만 하기에도 인생이 모자랄 것이다. 아무리 아쉽고 후회되더라도, 언젠가 어느 순간에는 선을 그어야 한다. 넘어가면 안 되는 무언가, 더 이상 후회하면 안 되는, 결국은 포기하고 깔끔히 잊어야만 순간은 반드시 필요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재수를 시작하면서 그 순간을 정했고,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다.
아무튼 다행히도 다른 원서는 합격했고, 이전에 다니던 K대학보다는 평가가 좀 낮지만 그래도 인문계 자연계 차이를 고려하면 그닥 큰 차이없다고 할 만한 한 대학에는 장학금까지 받고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어디 붙었다고 말하자 친구가 "이번 수능 잘 쳤다며?"하고 반문했던 기억이 아직도 속쓰리지만, 최소한 수능 성적 얼마와 맞바꾼 대가로 돈 걱정 덜을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꽤 큰 의미가 있다. 원래 썼던 원서가 붙었더라도 어쩌면 진지하게 고려했을지 모를 옵션이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제 새롭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 뿐이라고.
물론 단지 다시 새로운 출발선에 서기 위해 7년이란 시간을 낭비한 것은 분명 아쉽고 또 아쉬운 일이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도록 내 발목을 잡고 손해를 끼칠지도 모를 일이기도 하다. 남들이 앞으로 뛰어가는 동안 혼자 뒤로 갔으면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죽을둥 살둥 달려도 모자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아무리 행운 불운 핑계를 대봐야 궁극적으로는 모두 다가 내 공과 내 과로 인한 것이고, 결국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일 뿐이다. 어쨌건 일이 결정난 지금은 후회하지 말아야 할 순간이 드디어 되고야 말았다.
2011년 3월의 서울. 27살 늦깎이 대학 1학년생에게도 새로운 학기의 시작을 알리는 봄이 왔다. 외모만 보고도 진작에 신입생 아닐 거라 지레 짐작하고 동아리 가입 권유 팜플렛 한 장 내게 주지 않는 2, 3학년 학생들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조잘대며 오가는 캠퍼스를 몇 번이고 걸어 보았다.
이 3월은 누군가에게는 닭장 같은 고등학교 교실이나 재수학원에서의 봄일 것이고, 누군가에겐 개강파티가 즐거운 대학교 첫 경험일 것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취업 스펙을 만들기 위해 도서관에서 토익공부로 밤을 지새는 날의 연속일 것이다. 혹은 군 입대를 앞두고 있건, 인턴생활, 과외, 알바, 뭘 하건...이 글을 읽고 있는 이 땅 이 나라 위의 젊은이들 누구나에게 자신만의 사연으로, 기쁨과 슬픔과, 즐거움과 짜증과, 희망과 좌절과 또 그 모든 것으로 점철된 수많은 길고긴 이야기가, 지나간 과거와 지나갈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현재 역시 매 순간순간마다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줍잖게 들리겠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자고. 뒤에 드리운 과거가 맘에 안 든다고 뒤늦게 후회하지 말고, 앞으로 펼쳐진 미래가 어두워 보인다고 미리 앞서 절망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현재를 치열하게 살자고 말이다. 최소한 타임머신은 아직 아무도 못 만들었지 않은가.
모쪼록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건투를 빈다.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오늘의 공부 1 0
국어 : 강기분 독서 033~035 (인강)수학수1 수능 기출의 미래 1등급...
-
6모대회 상금 감사합니다ㅎㅎ 3 3
잘 쓰겠습니다
-
센츄달아보려고 성적표봤더니 2 3
98.7만 두번이네 수학 좀만잘했어도
-
본인의 전애인이 0 1
똥까시 장인이었으면 개추요
-
어떡하지 2 0
중앙대랑 안정으로 쓸 경북대나 부산대가 시간이 안되는데 그냥 안정을 건동홍 써야되나
-
이번 월드컵 재밌었다 2 2
홀란드랑 로드리 응원하게 됐음
-
1.7 수시카드 어떻게 쓸까요 0 0
국영수만 하면 1.3인데 탐구가 잘안나와서 총내신이 1.7정도임여 자연계 낮은...
-
정답을 공개합니다. 7 0
정답은 4번이요.
-
할거임? 병원이름도 나중에 병원차리면 김똥꼬병원 이렇게 지어야함 무조건 그렇게 살아야함
-
김성은 선생님 정말 인간적으로 실망 많이했습니다 4 5
어떻게 교육청 문제 유출을..............
-
사실 내 꿈이였는데 어쩌다가보니까 못했지만 근데 사람 미래는 모르잖아? 그리고...
-
미친놈인가 1 0
6시간동안 한게 숏컷 20문제라고?
-
뭐하지 17 1
뭐해 제발공부하라는나쁜말은ㄴㄴ
-
근데 문제는 2컷이 72정도 나온거같음.. 3컷도 60넘긴듯.. 만표가 1컷대비 너무 낮아..
-
이감 5-2 0 0
답 알려주실 분 있나요 이모앱으로 답지 보고싶어서 30점만 넘기면 되는데 독서나...
-
미쿠 스케일 피규어를 달라 3 0
-
아니미친영어에서만19점이까이네 12 1
영어왤케많이봄ㅡㅡ
-
일본 모 배우와의 만남을 위해 23 1
열심히 공부했지만 n2따리.. 그래도 만나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건 중요하지.
-
아 메인 김성은쌤 저거 2 0
궁금해서 강의 신청해서 듣고왓는데 먼가 ㅈㄴ 재밋네 ㅋㅋㅋㅋ
-
내일 n제 하나 풀어야지 1 1
국바 2회.
-
반수생 국어 수특수완 살까말까 3 0
문학은 kbs로 하고 독서는 딱히 안하기도 해서 원문은 풀어보는게 나으려나
-
가위바위보 이기면 500덕 19 0
양심적으로해야대알앗지?스크롤내리기전에 머 낼지 생각해보기 생각다햇으면 더 내려도...
-
공부기록(103) 17 2
-
앙 3 1
앙앙앙
-
나빼고 슐마시네 2 0
나쁜넘들 ㅠㅠ
-
진정한 이과만 푸는 문제 8 1
수정:4번은 현실의 수직선 상이고 3번의 k를 '수'라고 정의함. 1번의 절대영도를 K가 0일때임.
-
될거같다가 안될거같다가 0 0
국어 사설보고 97떠서 기뻐하다가 6모 85점이었던거 생각하면 우울 해지다가...
-
본가에 있었던 아스카 7 1
딴거 사고싶어서 팔앗음
-
양치기에 대하여 1 0
약한파트 푸는 속도 늘리려고 양치기 하려고 하는데 양치기 할때 어떻게 양치기를 해야...
-
맞팔구 0 0
친구하자
-
저는 분당단과 다니고있고 이거 오늘 봤눈데 저거 백분위 90은 뭘 의미하는 거야요?...
-
이해원 어려운거 맞지? 0 0
오늘 배터리 4칸짜리 했는데 너무 안풀림
-
노벨오르비똥글상 5 3
저주세요
-
13등이네 1 1
영어 싫어
-
2022 현역때 통합 첫 수능 봤던 03틀딱인데.. 군대 갔다오고 27수능을...
-
수시 결정 고민중 5 1
경희한 인문 가천한 수리 이거 두개는 확정 나머진 고민중 인문은 걍 쓸게 없고...
-
7모 수학 0 0
미적분 28번 틀 96이면 백분위랑 표점 몇임요?
-
여름방학 올오카 0 0
5,6등급 노베이스입니다. 여름방학 3주 안에 올오카 독서,문학 전부 다 하기엔...
-
실모의 모순 1 2
수학기준 80-88: 기분 안좋음. 운영 개박고 킬러도 못건드림. 오답하기도 귀찮고...
-
작년 강x가 진짜 개좋았는디 3 0
강x와의 추억이 아직도 기억남..
-
제목만보고 글 판단하지마 6 3
똥글을 가장한 인증일수잇음
-
근대나왜6모대회10등이지 27 0
내가그렇게못봣다고
-
오직 토요코인만 사용함 나는 가난함
-
제얼굴이 프사랑 닮았나요 5 1
생각보다 그런소리를 꽤듣네요
-
낫배드인가
-
일본보다 멀어지면 비즈니스를 못타는 가난뱅이구나(O)
-
ox퀴즈 풀고 채점도 하시나요? 그리고 1단원 끝내고 바로 보시나용?
-
오래간만에 맞팔구 5 1
-
좀 늦은 6모 대회 글 8 3
오.. 위로 갈수록 천외천이네요.. 3만덕은 좋은 곳에 쓰겠습니다! 문과화이팅 이...
-
맞팔 하실분 16 0
댓 남기면 해드림
잘봤습니다!!
감동이네요ㅠㅠ
군필 독학인데 이 글보니 힘은 나지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ㅠ
잘읽고갑니다.^^
잘읽고갑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늦은나이에 다시 수능을 준비해야하는 입장에서 많은 위안과 동시에 동기부여를 얻고 갑니다
저도 군제대하고 24살에 공부하는데 님 글 읽고 다시 마음 잡고 해야겠네요. 힘내세요.
잘 읽고 갑니다^_^
멋지십니다!!
저도 다시 수능 준비 하려고하는데 글 읽고 좋은거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고 가요^^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댓글남기고 갑니다 3수 독학인데 많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글써주셔서 감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