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현 [240141] · MS 2008 · 쪽지

2010-02-28 00:5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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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외고생의 대입 수기 - 1. 프롤로그에서 고2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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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수기엔 별로 글쓴이의 꿈이나 열정, 희망 같은 게 들어있지 않으며, 오히려 좀 자학성 섞

인 시각에서 서술됐으므로 수기를 읽고 공부 좀 하려는 기분 내려는 사람들은 읽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0. 프롤로그

나는 지금도 종종 생각해본다. 중 3때 학원 담임 선생님에게 내가 들었던 말을….

"XX야 넌 영어를 잘하니까 OO반(당시 학원에서 외고 진학반 역할을 했던 반)에 들어가서 외

고 한 번 노려보지 않을래?"

그 때 나는 별 생각 없이 "네 그래 보죠"라고 대답했었다. 그리고 외고에 들어갔고…지금의

나에 이르렀다.

만일 이 때 내가 "아니오 선생님 저는 지금 있는 반이 익숙해서 좋으니 그냥 이 반에 머물러

있겠습니다."라고 했다면…. 지금쯤 나는 어디에 있을까? 별 생각 없이 그냥 외고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고, 적당히 주변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상위권을 하면서 지냈다면?

내가 그 때 외고반에 들어가겠다고 한 건 거의 우연에 가까웠다. 어쩌면 내가 이룬 모든 것

들이 그냥 우연히 성취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입시에서 한 번의 좌절을 맛보고 한 번

의 영예를 안았다. 나는 결과에 만족하지만, 이 결과는 과연 내가 받을만 한 것인가? 정말

내 노력으로 성취해 낸 것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가? 그냥 그 때 그 때의 우연이 겹쳐

나타난 하나의 사건이진 않을까?

이런 섬뜩한 의문들은 지금도 머릿속을 맴돈다. 수능을 치고 입시가 끝난 지금은 더욱 더….

하지만 그런 의문들을 잠시 밀어두고, 우선은 중 3 때부터 내 기억을 재생시켜보겠다.


1.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 말까지-빡공의 시기

조금 이질적으로 보이는 2년을 묶은 이유는, 내가 돌아보건데 나름대로 이 시기를 관통하

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무감 혹은 강박 관념에 쫓기는 공부였다.

지금 돌아봐도 솔직히 중학교 3학년 때의 나는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 내신은 전교

30~40등 대를 오가는 그저 그런 상위권이었고, 외모도 그냥 평범 혹은 그 이하였으며, 딱

히 체육 활동이나 게임을 잘 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중학교 3학년 초에 뭔가가 바뀌었다.

목적의식이 생긴 것이다. 물론 그것은 프롤로그에 언급한 것처럼 외고반에 들어갔기 때문

이다. 평범한 나, 특별할 것 없이 하루하루 묻어가듯이 살아가는 나 자신에 질린 나는 중

3때 좀 급 빡공을 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 때는 좀 미친듯이 했던거 같다. 점심 시간에도

식사 줄에서 영단어를 외웠으며, 쉬는시간이 5번 있으면 그 중 4번은 공부했던 거 같다. 구

술면접용 수학 문제도 미친듯이 풀었고 언어 문제집 꽤 두꺼운 걸…중간중간 고전시가의 개

압박에도 불구하고 해치웠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직도 중 3 때 반 애들이 누가 있었는지 잘

기억하지를 못한다.

말할것도 없이 그건 강박 관념에 쫓기는 공부였다. 중 3 1년동안 내 의식의 포커스는 오로지

외고 합격에 맞춰져 있었다. 사실 당시만 해도 외고가 그리 내신을 쳐주던 때가 아니라서 내

내신 평균이 13% 정도였는데도 영어 듣기 한 문제 정도로 커버할 수 있었다. 특히 이 때는

영어 듣기가 꽤 변별력 있었고 구술면접(말이 구술면접이지 그냥 국어-수학-영어-사회 필기

시험)의 비중도 컸기 때문에 내가 비교적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내 내신으론 외고

는 물 건너 간 꼴이라고 보는 것 같다.

아무튼 난 모 외고에 입학했다. 꽤 메이저한 외고였다. 이걸로 나는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별 노력 안해도 당연히 SKY 쯤은 갈 수 있을 것이고, 인간 관계도 사회성도…모두

외고라는 딱지 하나로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나는 외고에 모든 것을 걸

었었던 것이다.

물론 그건 순전히 내 착각에 불과했다.

나는 고 1때 와서도 여전히 그냥 사교성 없고 별 볼일 없는 놈에 가까웠다. 뿐만 아니라 외

고의 실상은 전혀 내 기대와 달랐다. 내는 돈에 비해, 아니 일반고에 비해서도 시설은 형편

없었으며, 교사들은 학벌은 SKY인데 가르치는 실력은 하늘을 날기는 커녕 바닥을 기었다. 물

론 좋은 교사들도 있긴 했다. 허나 그들은 정말 소수에 불과했고, 나머지 대부분의 교사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뉘었다.

1. 실력도 없는데 성질 더럽고 자존심도 세다.
2. 실력은 없어도 사람은 괜찮고 수업도 느슨하다.

특히 나이가 든 교사일수록 1번의 성질을 강하게 띠었다. 이런 교사들 수업 시간엔 딴 짓을

할 수 조차 없었고 그렇다고 수업을 듣자니 졸려 죽을 지경이었다. 결국 듣는 척 하다가 자

는 걸로 타협 볼 수 밖에 없었다.

역시 외고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1년에 네 번 있는 중간-기말고사였다. 정말 3년 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라고 하면 자살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외워도 외워도 설마 이런 쪼잔

한 부분이 나오겠어 라고 생각했던 이상한 부분에서 나와 틀리게 하는 시험도 있었고, 상당

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내놓고(특히 영어에서 이런 경향이 심했다. native에 가까운

애들은 주관식 문제에서 이의 제기를 많이 하곤 했다.) 복수정답 처리도 안 하고 말 그대로

[교사 꼴리는 데로] 채점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더 괴로웠던 건 외고 내신 시험은 한없이 암기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수학만 살짝 예외였고

국어, 영어, 전공어 조차 그냥 수업 교재 달달달 외우기 싸움이었다. 중학교 때도 암기과목

에서 패망을 많이 해서 30~40등 대에서 머물렀던 나에겐 너무 힘든 고역이었다. 처음 1학기

성적표를 받았을때 그래도 3등급 대 후반은 나왔단 사실에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쉬었는지

모르겠다. 결국 내 내신은 3학년 2학기 때 애들이 공부 안 한 틈을 타서 살짝 오른거 빼곤 3

등급 대 중반을 유지했다. 전교 등수로는 아마 70~80등 정도 했을거다.

또 나를 화나게 하는 건 외고의 어처구니 없는 자뻑이었다. 월요일 조회를 가끔 할 때마다

선배들의 진학 실적을 자랑하는 걸 보면 딱 이 생각밖에 안 들었다

-재주는 학생이 넘고 자랑은 학교가 하고 있구나 ㅅㅂ…. 난 왜 또 거기 낚여서 여기까지 온

걸까.

1학년 때, 그리고 3학년 끝까지 내 유일한 해방구랄까, 그런 존재는 전국 모의고사였다. 전

국 상위 0.몇퍼 라고 찍힌(물론 교육청 모의고사는 그 반대로 99.xx 이렇게 찍혀있었지만)

성적표를 받으면 내가 무슨 굉장한 능력자라도 된 느낌에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마치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게임에서 상위 랭커가 된 느낌과 비슷했다.

1학년 때도 나는 중3 때처럼 정말 ㅂㅅ처럼 공부만 했다. 학교가 하라면 방학 때도 나오고

야자 하라면 야자하고…(사실 튀어서 할 것도 없었지만…피씨방은 담배 냄새가 싫었고) 충실

한 학교의 공부하는 기계 혹은 노예였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냥 목적 의식도 소명감도 없

이, 희미하고 모호한 자부감 (내가 전국 상위 몇퍼고 괜찮은 외고에 소속된 고등학생이다!

라는)에 취해 무식하게 공부하고 있었다. 노력에 비해 성적이 잘 나오지는 않았고, 모의고사

성적은 언수외를 기준으로 봤을 때, 0.4%~0.01%까지 편차가 심했다. 어쨌든 나는 2학년으로

올라가게 된다.



2. 2학년 시절-별 생각 없이 천천히 공부한 시기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몇 가지 개인적인 경험들을 겪고 충격도 받으면서 나도 사회성이란 것

을 좀 갖추게 되었다. 뭐 그렇다고 내가 무협지에서 환골탈태하듯 변했단건 아니고 ㅂㅅ수준

에선 조금 정상인 수준에 가까워졌단 것이다.

가끔씩 수능 공부를 왜 하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문일뿐

이었고 곧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곤 했다. 내 의식을 지배한 것은 어디까지나 진학의 논리였

다. 공부 잘하고 대학 잘가면 된다. 다 잘될 것이다.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라는.

6월 달에 처음 사탐을 4과목으로 나눠서 시험을 쳤다. 다 좋은데 한국지리가 3등급을 찍어버

렸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나는 한국지리라는 과목과는 영 안 맞는거 같아서 그 김에 사회

문화로 바꿔 버렸다. 학교 내신에서는 조금 괴로웠지만 결과적으로 잘 한 선택이라고 생각한

다. 나중에 사회문화도 버리게 되지만….

2학년 때는 경시대회에 정말 많이 참가했다. 경제한마당, 증권경시대회, TESAT(
때였나?) 등등…큰 상은 거의 못 탔고 작은 상들은 꽤 탔다. 개인적으로 경제 관련 경시대회

스펙은 전국권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 나는 특기자전형도 염두에 많이 두고 있었기 때문에

쉼없이 대회에 참여하고, 입상했다. 물론 특기자전형을 노렸다면 내신을 더 잘 했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봐도 그럴 순 없었다. 정말 내신이란 분야에선 나에게

이랄까. 그런게 느껴졌다. 내신 시험이 너무 수능에 비해 수준이 별로라는 생각만 자꾸 들었

다. 해봐야 보답을 못 받는 경우가 너무 많았던 것도 내 의욕을 꺾었다.

2학년 여름방학때는 언어 기출을 풀고, EBS 사탐 360제 4과목을 풀었다. 미친듯이 빨리 풀었

다. 딴 공부랑 병행하면서 8일간 4권을 풀었으니까…. 여름방학 수업은 올 자습으로 했다.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다만 자습 끝나고 2시쯤 집에 와서는 오늘 공부 끝났다는 마음에

너무 노는 날이 많았던 것 같다. 그런 이유로 난 2학년 겨울방학부터는 학교에 나오지 말아

야 겠다고 결심하게 된다.

2학년 9월 모의고사가 조금 충격적이었다. 전국 상위 0.48%로 받아 본 것중에 최하 백분위를

찍었다. 나는 이 때 조금 더 공부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옥 같은 2학기 중간-기

말고사가 끝나고 겨울방학에 돌입했다.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넘어가는 겨울방학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본

다. 나는 과감히 학교에 가지 않고 집 근처 도서관에서 자습하는 생활을 택했다. 모의고사

성적이 나쁘지 않은 터라 다행히 담임에게선 금방 허락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이건 정말로

다행이었다. 2학년 수업은 국어 사회탐구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수학은 정말 수업시간에 문

제풀이조차 버벅거리고 삽질하는 선생이었고 영어도 걍 졸리기 그지 없었다. 방학 때 수업을

들으면 이런 교사들을 한번 더 봐야 했다. 그래서 내게 등교 없는 자습 허가를 받아 낸 건

축복이었던 것이다.

이 때 부터 나는 나만의 공부 패턴을 대강 확립했다. 하루 패턴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오전 8시 기상

8시 반까지 아침 먹고 씻음

9시까지 도서관으로

9시부터 10시까지 언어 문제집을 푼다.

10시 반까지 원하는 책을 밑 층 열람실에서 읽는다.

12시까지 수리를 푼다. 시간이 남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경우엔 열람실로 가서 독서.

오후 2시까지 점심을 먹고 독서한다.

4시까지 사회탐구 문제를 풀고 공부한다. 필요하면 인강도 듣는다.

6시까지 열람실에서 독서한다. 이 때쯤 빵을 하나 뜯어먹었다.

7시까지 모자랐던 과목 보충하던지 더 독서한다.

7시 반까지 집에 도착한다.

8시까지 저녁을 먹는다.

10시 혹은 좀 더 넘어서까지 컴퓨터를 하고 게임도 한다.

11시 이전에 잔다.

정말이지 나에게 딱 맞는 패턴이었다. 심심할 때마다 독서도 재밌게 할 수 있고 게임도 충분

히 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공부량이 부족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점심도 도서관 근처의

푸드코트에서 골라먹어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공부]

였다. 그래서 겨울방학은 공부를 꽤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었다. 학교 안 나가기를 잘했

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다만 문제집 선정은 좀 미스였던거 같다. 내가 여름방학때 언어는 기출문제 모음을 한 번 다

풀었기 때문에 사피엔스21에서 나온 LEET 대비 언어 문제집을 샀는데 난이도 이전에 질이 썩

좋지 않았다. LEET 기출도 아니고 예상 문제여서 별로 깔끔하게 만들어졌다는 느낌은 안 들

었다. 결국 2권 산 걸 한 권만 다 풀고 나머지는 버렸다.

나머지 과목들은 뭘 풀었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마 그 해(2008년)에 나온 수학/외국어

EBS N제를 풀었던것 같다. 썩 괜찮았다.

또 후회되는 것 하나는 이 때 국사 개념편 인강을 하나쯤 들어뒀어야 했는데…나는 독학으로

해보겠답시고 연표 만드는 삽질을 하다 나중에 국사를 심하게 털리게 된다. 그리고 나는 3학

년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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