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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눈]想齋. [65023] · MS 2004 · 쪽지

2006-02-10 10:5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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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눈이의 합격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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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나약했다.

나는 나약했다. 그리고 그 나약함에 비례해 또 민감했다. 그래서 너무나 심각하게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가 전해주는 그 타지에서의 외로운 학생의 모습, 그것이 나의 나약함과 겹쳐지는 것을 느꼈고,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가 말하는 옹졸한 분풀이가 나의 소극적인 반항에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실패했고, 또 성공했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는 나의 나약함과 민감함이 나를 어디로 밀어 넣었고, 결국 나를 어디로 끌어 올렸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2004년 11월 17일은 나에게 유난히 추웠다. 수능 날의 추위는 예삿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날따라 나는 너무나 춥게 느껴졌다. 분명 날씨는 그렇게 춥지 않았을 테지만, 아마 시험을 보고 나온 많은 사람들의 가슴은 그 당시 나처럼 황량했을 것이다. 언어도 마지막 문제를 상당히 어렵게 여겨서 결국 찍다시피 했고, 수리도 처음엔 쉽게 생각했는데 주관식으로 넘어가니 생각 외로 어려웠다. 게다가 중간 점심시간에 친구와 답을 맞춰보다 수학문제 하나가 틀렸음을 알았을 때, 영어시간은 이미 망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문제를 풀고 교문을 나서는 순간, 아버지와 어머니가 맞아주셨지만, 부모님의 체온보다 더 먼저 느낀 것은,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그 찡한 슬픔이었다. 그리고 나의 맘에서 들려오는 한마디가 있었다. \"실패했다.\"

시험 직후의 절망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결과는 생각 외였다. 고등학교 1학년 이후 나는 460점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400점 만점에 383까지 나왔지만, 그 이후 이과에 있을 때는 400점대를 왔다 갔다 했었다. 전과한 이후에 가장 잘 봤던 점수가 440점대 이었던 걸로 기억하니 내가 봐도 460점을 맞는 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상당히 좋은 점수였다. 시험을 치르고 몇 일 후 성적표가 나왔을 때 원점수는 464점이 나왔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반 친구 하나는 평소 나보다 낮게 나오다가, 수능 당일에 뒤집어 470점이 넘는 점수를 맞았다. 평소에는 친한 친구 라고만 생각했던 그 친구가, 그 성적표가 나오는 날, 나의 눈에는 마냥 좋게만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다 내 나약함 탓이리라. 내 옹졸한 분풀이가 그 친구에게 돌아가는 것이리라. 그 친구는 그 해 연대에 입학했고, 나는 가군과 나군을 모두 실패한 채, 다군 한양대에 3차 이후 추가 합격으로 붙었다.

집에서는 여러 가지 대안을 내놓았다. 하나는 한양대 법대를 다니면서 반수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집안 어른 대부분이 반대하셨다. 일단 대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하게 되면, 대학교 생활에 흥미를 느끼면서 재수의 의욕을 상실할 것이라는 게 주 이유였다. 또 하나는, 한양대 법대를 다닐 경우 로스쿨이 도입될 지가 미지수라는 것도 작용했다. 그래서 부모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재수를 하길 원하셨다.

중대한 결정이 필요했다. 나는 대학을 모두 포기한 채 재수를 해서, 과연 점수가 오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주변에 재수한 선배들을 보았을 때, 성공하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 나의 나약함은 또 한번 개입했다. 편하게, 편하게. 그렇게 대학교로 가자는 생각이 자꾸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내 나약함이 한 번 깨지는 계기가 생겼다. 언젠가 친척에게서 연락이 온 적이 있었다. 내가 재수를 생각한다고 말하자 그분은 “재수해 봤자 오르지도 않아. 그냥 거기 다녀.” 라고 툭 내뱉으셨다. 평소에 우리와 관계가 껄끄러웠던 분이 갑작스레 전화를 하셔서 하는 말이 이런 것이었다.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그냥 한양대를 다닌다고 치자. 그러면 그 쪽에서 우리 집을 보는 시선은 비웃음일 것이다. 언제나 나를 좋지 않게 생각해 왔던 차라, 내가 수능에서 조금 잘 나왔다는 것이 굉장히 껄끄러웠을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는? 나는?’ 이런 생각에 까지 미치자, 나는 더 이상 재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위해서.

대신 아버지 어머니도 한 가지 약속을 하셨다. 올 한해는 가능하면 외부의 요인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나의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집에 오면 편하게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고3때는 그러지 못했던 부분이 꽤 존재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일이 항상 늦게 끝나셔서, 언제나 어머니와 다툼이 있었다. 하지만, 올 한해는 가능한 한 그것을 자제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결과는 정말로 아버지, 어머니가 약속을 지키셨다. 그 때문에, 나도 역시 내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2. 재수

재수학원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다. 그나마 아는 것이라고는 J학원과 D학원이 전부였다. 여러 가지 조건을 따져봤다. 일단 이동이 편리한 곳을 최우선으로 꼽았다. 집과 거리가 멀면 시간낭비가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강사들의 실력도 고려해봤다. 하지만, 강사들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는 내가 직접 봐야 아는 것이고, 나는 강사의 실력과 별개로 나의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왔던 터라, 그것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다. 결국 나는 2005년 1월 말 강북에 있는 J학원을 선택했다. 서울역 부근이라 교통이 편리했던 것과 우리 집 앞에서 직행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큰 선택 이유였다.

같은 학교 친구 몇몇과 같이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에서 등록을 하기 위해 성적표를 내밀었을 때, 인상이 상당히 무서운 선생님이 나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이정도면 할만 하겠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은 우리 반 국사 담당이셨다. 그 당시에는 상당히 어리둥절했지만,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나는 그 한마디에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재수 생활을 시작한 것 같다.
나는 N05반에 배정되었다. 나랑 같은 반에 배정된 친구들은 없었다. 재수생활을 아웃사이더로 시작하게 될 느낌이었다. ‘그까짓꺼, 아웃사이더면 어때, 공부만 하면 되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교실에 들어섰다. 하지만 반 분위기는 아웃사이더가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미 삼삼오오 모여서 친목을 다지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나는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옆에 있는 사람은 상당히 어려 보였다. 원래 나는 처음에 말을 잘 꺼내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한 일주일 정도를 조용히 지낸 후에야 그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참고로, 우리 반은 앉았던 사람끼리 거의 1년 내내 앉아서 갔다. 고정석은 아니었지만, 처음에 앉은 짝과 앉는 날이 90% 이상이었다.)
\"저,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삼수 했어요.”
이정도 동안이면 현역이라고 해도 믿는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 형은 나에게 편하게 말을 놓으라고 했지만, 나는 결국 지금까지도 존댓말을 사용한다. 그 형은 내 재수 생활 1년의 가장 큰 동반자였다. 재수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어떤 불안감과 말못할 사정을, 그 형과의 단짝 생활을 하면서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 형은 이미 내가 겪었던 모든 것을 이미 작년에 겪어봤기 때문에,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이미 대안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 덕인지 몰라도, 내가 재수생활에서 흥미를 느끼고, 또 지루함때문에 벗어나거나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재수생활을 하면서 반드시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고 말할 친한 벗을 하나정도는 만들어 둔다면, 충분히 재수는 해볼만한 싸움으로 나타날 것이다.

재수생활을 하게 되면 보통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반 아이들과의 친목 도모에 힘쓰거나, 아니면 다른 하나는 아웃사이더로 남거나 이다. 하지만 나는 이 둘 모두를 추천하지 않는다. 차라리 정말 끝까지 서로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한 둘이면 재수생활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재수생활을 하면서 단 한번도 학원에서 자율학습을 한 적이 없다. 학원의 그 꽉 막힌 공간 안에서는 답답함을 계속 느끼기 때문이다. 그 답답함은 수업시간에 느끼는 것으로 족했다. 그래서 항상 수업이 끝나는 3시 40분 쯤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나와 내 학교 친구는 언제나 그런 말을 했다.
“우리, 올해는 정말 잘 할 수 있을 거야. 힘내자!”
\"까짓거, 그거 1년 먼저간 게 대수냐. 우리가 더 잘하면 돼!\"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면서 1년을 보내는 것도 재수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다. 그것이 언제나 스스로에게 되뇌어 지면서 재수학원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아 주었다.

재수를 시작한 지 한달 쯤 지났을 때, 점수가 479점이 나온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시험은 상당히 쉬운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잘 인지하지 못한 채, 만용을 부렸다. 이정도 상승 페이스면 충분히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성적은 그런 만용을 용납하지 않는다. 학원 시험 자체가 어려운 것도 있지만, 4월, 5월이 되자 점수는 다시 440점대 밑으로 떨어졌다. 반 등수는 한자리에서 두 자리로 떨어졌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공부해서 6월에 470까지 올렸다. 이쯤이면 자중해야 하는데, 나는 또 그러지 못했다. 고3때와 같이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셈이었다. 6월에 처음으로 학교 동창회에 나가서 술을 마셨다. 마음이 풀어진 것이다. 거기에, 학원생활의 매너리즘은 ‘공부를 해서 무엇 하나‘라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그 때문일까, 9월을 기점으로 점수는 하락하기 시작했다. 9월 모의평가에서 469를 맞은 이후, 점수는 계속해서 하락했다. 10월 마지막 점수는 450점대였다. 이 점수로는 내가 원하는 곳은커녕, 재수 이전보다 낮은 점수였다. 물론 학원에서 백분위가 절대 낮게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1~2% 이내), 그래도 내가 원하는 부분까지 나오지는 않았다. J학원의 모의고사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 점수가 나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불안함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나는 1년 사이에 바뀐 것이 없었다. 언제나 나약하고, 마음먹은 일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 슬픔이 하루하루를 채워갔다. 10월의 마지막 날까지 그 슬픔으로 보내는 시간은 흘러갔다. EBS 봉투 모의고사를 풀어봤지만, 점수는 형편없었다. 수학은 70점대를 벗어나지 못했고, 언어도 80점을 넘기지 못했다. 이제는 완전히 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지기엔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나는 이 1년을 손해보고 싶지 않았다. 1년의 시간이 나에게 더 큰 미래를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20여일만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20여일은 짧으면서도 길었다.

11월 1일부터, 하루에 하나씩 모의고사를 풀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 놓고 풀지 않았던 EBS 파이널과 학원 파이널 교재들을 하루에 하나씩 풀어가기 시작했다. 점수는 17일이 지날 때 까지 460을 넘지 못했다. 시간을 맞춰서 푸는 것은 여전히 서툴렀고, 수학에서 계산상의 실수는 지속되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여유를 가질 것을 권했다. 나는 잠시 공부를 멈추고 이틀간 수필집과 시집을 들춰 보았다. 그 중 눈에 띄는 시가 있었다. 정채봉 시인의 ‘첫마음’이라는 시였다. 나는 그 시에서 내가 재수를 마음먹은 그 날의 심정을 다시 찾았다. 재수를 시작할 때의 그 혹독한 마음은 그동안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수능을 앞둔 그 시점에 내 마음은 완전히 슬픔과 비탄에 잠겨있던 상황이었다. 그제야 부모님이 여유를 가질 것을 권했던 것을 이해했다. 재수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그 첫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수필집 한권에서는 한용운의 ‘최후의 5분간’이라는 글이 있었다. 그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시일을 두고 참담 경영하던 일이 최후의 종국은 5분간으로서 족한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이 간단한 말 한마디가 내 상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았다. 나는 최후의 종국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미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라면 중간에 포기해서는 안 된다. 최후의 5분은 언제나 힘들고 넘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일을 되돌아본다면, 최후의 5분은 결국 그 노력했던 부분의 일부일 뿐이다. 다만 처음 먹은 마음이 흐트러져 그것을 어렵게 느끼는 것일 뿐이었다.

결국 나는 남은 5일여를 평온한 마음으로 지냈다.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것에 자신감을 가지고, 나의 초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덕분일까, 나는 수능시험에서 처음으로 480점이 넘는 점수를 맞았다. 집에 와서 점수를 맞추어보고 나서, 나는 어머니, 아버지와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재수시절의 혹독함이 가져다 준 보상이 이제야 나타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입시는 성적뿐만 아니라 운과, 눈치, 정보가 작용하는 일종의 ‘심리 게임’이기 때문이다.

#3. 대학 입시

나는 수능이 끝나자마자, 목동에 있는 C 논술학원에 등록했다. 이것 역시 거리가 가까운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어차피 실력은 다른 학원도 그렇게 차이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같은 재수학원을 다니던 친구들 중 한 5명 정도가 같이 다니게 되었다. 다들 시험 성적이 괜찮게 나온 모양이었다.

논술학원은 정시반과 파이널반을 모두 등록했다. 정시반 에서는 이틀에 한번씩 나와서 한편의 논술을 쓰고 첨삭과 강의, 해제를 듣는 방식이었다. 약 5주의 기간동안 15편의 논술과, 5번의 구술 연습을 했다.

논술학원을 잘 이용하는 방법은 첫째, 선생님을 괴롭히는 것이다. 가능한 한 많은 질문과, 가능한 한 많은 논술문을 들고 첨삭을 받는 것이다. 우스갯소리지만, 논술학원에서는 “한 상자 정도의 글을 써서 첨삭 받으면 무조건 합격”이라는 소리까지 할 정도이니까. 나는 15번의 논술을 모두 써서 냈고, 가외로 한 두 편의 논술과, 그 외에 몇 가지 자잘한 개요들, 그리고 숙제 등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해서 냈다. 첨삭을 받을 때는 그냥 듣기보다는 왜 그것이 그렇게 바뀌어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어떤 방식으로 논술을 써내야 하는지를 집중적으로 물어보곤 했다. 구술의 경우, 나는 아까 말했다시피 누구 앞에서 말을 잘 꺼내지 못한다. 그래서 5주 내내 선생님께 구박을 받았다. 토론 역시 친하게 지내지 못한 사람들이어서 쉽게 말을 꺼내거나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게 5주를 지내고 나서 나는 후회를 했다. 조금 더 열심히, 조금 더 적극적으로 말을 했어야 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토론을 많이 활성화시켜야 그나마 더 남의 생각을 알아내고, 새로운 정보를 캐낼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재수학원에서 조직했던 토론회를 더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재수학원에 다닐 당시에 토론의 부재를 느끼고 약 대여섯 명이 모여 책을 가지고 토론하는 모임을 만들었었는데, 수능 전후 한 달간 거의 활용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토론회를 자주 참여하고, 나 스스로의 절박감으로 학원에서의 토론을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이끄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고, 또 토론이 활성화 되어야 각자가 서로 생각지 못했던 사실들을 들어볼 기회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나는 논술에 쓸 이야깃거리들도 상당수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쟁점이 되는 사안의 경우, 내가 지지하는 입장과 대비되는 의견을 듣고 나의 의견에 존재하는 논리적 모순점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대학교 지원 시기가 다가오자, 친구들은 대부분 점수에 맞춰서 학과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별로 없었다. 이미 고등학교 때 전과한 이유가 내가 원하는 학과를 가기 위해서였다. 보통 재수하면 배짱이 없어진다고 하던데, 나는 그래도 배짱을 부려보고 싶었다. 떨어질 땐 떨어지더라도 배짱을 마음껏 부려보고 떨어지고 싶었다. 결국 가-나-다군 모두 원하는 곳으로 넣었다. 안정지원은 없는 듯 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나는 확신을 가지고 지원했다. 작년의 결과를 보았을 때, 사람들은 \'X대 러쉬‘니 하는 말을 듣고서도 X대로 몰리는 특성이 있었다. ’나하나 쯤이야‘하는 생각과 함께,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다른 곳으로 돌릴 것이라는 생각이 합쳐져서 그대로 쓰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작년에는 그대로 했다가, 크게 낙심했다. 그래서 올해는 무슨 말이 있더라도 소신 지원을 하겠다고 맘을 먹었고, 결국 그 결과는 경쟁률의 심한 저하로 나타났다. 합격의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1월 7일. 연세대에서 논술 시험을 보았다. 연세대를 1년 만에 다시 시험을 보러 오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를 수시 2학기에서 떨어뜨린 대학교. 하지만, 많은 수험생들의 생각과 같이, ‘붙여만 준다면!’이라는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시험은 예상 외로 어렵지 않았다. 주제를 갈등과 불안 둘 모두로 잡았던 것이 흠이지만, 그래도 학원에서 배운 대로 했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면 적어도 평타 이상은 한 듯싶었다. 하지만 올해 나의 목표는 서울대였다.

1월 16일, 서울대 논술 시험이 시작되었다. 라디에이터가 고장 났는지, 소리는 시끄러웠지만 온기는 없었다. 손가락 끝이 얼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달려온 길, 여기서 멈추는 것은 달려오지 않은 것과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의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논제가 요구하는 바만 간신히 맞추어 썼을 뿐, 학원에서 쓰던 것에 비하면 정말 못볼 꼴을 보인 듯 했다.

1월 17일. 서울대 면접을 보았다. 학원에서 이미 여러 번 모의로 시험을 봤던 터라 그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날 논술을 잘 못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상당히 기분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면접을 시작하자, 그런 것은 싹 잊어버렸다. 손가락 하나를 잡으면 긴장이 풀린다는 아버지 말씀을 기억해 내고 손가락을 하나 잡고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말 떨면서 시작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거의 일상적으로 말하듯 하게 되었다. 교수님들은 모두 내 대답에 끄덕거리셨다. 결국 나오면서 느낀 감정은 상당히 뿌듯했다. 잘하면 논술에서 못한 것을 커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4. 결과

결국 나는 올해 가, 나 군에서는 최초 합격했고(연세대 사회과학, 서울대 사회과학), 다군에서는 예비 4번을 받았다.(상지대 한의대) 작년(가-고대언론 예비 20 / 나-서울대사회 1차탈락 / 다-한양법 예비3차합)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올 한해 ‘재수를 정말 성실하게 이행했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결국 드러나는 것’ 이란 명제이다. 성실한 자에게는 결과가 돌아오는 법이다. 07학번이 될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김광섭의 ‘일관성에 대하여’라는 구절 하나를 말씀드린다.
“시대를 핑계 삼지 말아야 한다. 목적지가 없는 사람들, 목적지가 있어도 사명감이 없는 사람들, 오직 그들만이 시대를 핑계 삼아 불순하고 나약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중략)- 작은 생활 하나하나에도 경건한 태도로 임하여 한 발씩 한 발씩 우리들의 목표에 접근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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