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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안밝힘. [46353] · 쪽지

2005-02-20 01: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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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대학은 붙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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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누구라고 밝히고 글을 쓸 정도로 숫기가 넘치지는 않아서...이름은 밝히지 않습니다. 재수했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수시 2학기에 합격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장난을 치는 걸 좋아했다.

중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중학교 3학년 때 남녀 공학이 가고 싶어서 외고 입시 공부를 조금 했다. 이 때 당시 30~40등 (전교) 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인터넷에 판타지 소설을 쓰기를 시작했는데 고1 때는 정말 본격적으로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담임 선생님이 특기 적성 교육을 시키려고 하면 내 특기와 적성이 어떻게 수학과 영어일 수 있냐고 되묻다가 맞곤 했다. 나는 구타나 욕설을 그렇게 나쁘게 받아 들이지 않기에 학생 인권이 어떻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다. 그냥 맞으면서도 웃어 넘겼다. 솔직히 별로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ㅡㅡ;

학생회 활동도 하면서 문예반도 하면서 공부는 적당히 했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어느 정도는 좋은 편이었던 모양인지 내신은 1학기에 420명 정원에 14등 정도를 했다. 모의고사는 2등급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던거 같다. 학교가 상태가 별로 안 좋은 서울 강북 평준화고였기 때문에 이 정도로도 전교 2~4등의 모의고사 성적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2학기 때 갑자기 공부를 시작하게 됐다. 계기는 나도 잘 모르겠다. 여러가지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문예반에서 축제 준비를 하면서 혹독한 환경에서 굴러 먹은 것도 이유의 하나다. 일주일 동안 다 합쳐서 10시간을 잤으며 다 합쳐서 10끼 정도를 먹어가면서 선배의 기합을 받아 가면서 축제를 준비했다. 사람이 극한 상황을 경험하게 되면 느끼는 도전하고 싶은 욕망...그런게 있었다. 거기다가 이 당시의 나는 인생이 참 재미없다고 느꼈다. 내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인류의 역사에 비했을 때 지극히 작다고 느껴졌고 죽음에 이를 수 없다고 여겨지는 정도의 높이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다. 다행히 밑에 낙엽이 수북히 깔려 있어서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죽음을 순간적으로 경험해 본 이후 뭔가를 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같다.

저 웃기는 자살 시도 후 성경을 갑자기 펴봤던거 같다. 모태 신앙으로 교회를 다녔지만 그 전까지는 교회 생활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냥 주일이 되니까 교회에 가고 예배가 끝나면 집에 오는 삶의 \'사이클\' 이 존재했을 뿐이다. 휙휙 읽던 중 직관적으로 어떤 생각이 왔다. 내가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그것들을 모두 던져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동 복지 재단을 세우고 싶었다.

그러자면 능력과 힘과 돈이 필요했다.

일단 공부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다.


원래 하나를 시작하면 미친듯이 빠지는 성격인지라 고1 10월달부터 나의 학습량은 미친듯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밥 먹고 잠 자고 공부만 했다. 이전까지 소설가가 되기 위해 인생 경험 쌓는다고 야밤에 쏘다니며 폭주족한테 찡얼 대다 싸대기 맞는 일 같은건 하지 않았다. 공부를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를 않았다. 국영수를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기초가 중요하니까... 국어는 내가 소설가가 되려고 해서 독서량이 풍부하니 어떻게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고 수학은 상당히 자신이 있었다. (고1 1학기에 있던 모의고사에서 2문제인가를 실수로 틀렸다. 괴수급은 아니었지만 영어에 비하면 상황이 좋았다.) 영어는 도통 단어를 모르겠기에 해석이 안 되서 영어 공부를 좀 많이 하기로 했다.

이비에스 10주 완성? 여름 방학에 고3 대상으로 하는 교재를 들고 해석하면서 문제 풀고 단어를 단어장을 만들어서 옮겨 적고 외웠다. 나중에 학원이나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문법 체계를 세웠지만 이 당시 나는 문법은 전혀 몰랐다. 단어의 뜻이 있으면 그걸 적당히 말이 되게 섞어 놓아서 해석했다. 해석되지 못하는 부분 which 이런 식으로 수식되는 부분은 아 이런건 이런 식으로 해석이 되는구나. 하고 머리 속에 집어 넣었다. 수십가지 경우를 모아 놓자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하나의 체계가 세워졌다.

그리고 11월 즈음에 고1 대상의 모의고사가 있었다. 이 때도 2등급이었다. 언어와 사탐은 무난했으며 (실력은 아직 부족했지만...) 영어는 80점 만점에 70점대를 기록했다. (독해는 거의 틀리지 않았다.) 다만 믿었던 수학이 59점인가를 기록하면서 3등급이 턱! 하니 떴다.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겠지만...나는 수학에서 실수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이 잘못된 버릇은 이후 수학 실력이 좋아진 이후에도 고쳐지지 않았다.

겨울방학이 되고 언어는 어떻게 되겠지...하는 생각이 있었기에 수학하고 영어를 방학 중에 잡기로 결심했다. 이 때 수학 공부를 정석책으로 했다면 당시로서는 좀 어려웠겠지만 더 옳은 방향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수학은 교과서를 보았고 당시 다니고 있던 동네 학원 단과에서 푸는 문제집 (지금 봐도 그럭저럭 난이도가 있는 듯 하다.) 을 예습으로 한 번. 수업 들으면서 한 번. 그리고 돌아와서 독서실에서 다 지우고 다시 풀었다. (아 난 독서실에서 공부했다. 집에서는 아무래도 해이해져서 놀았기 때문에...) 이외에도 학교 특기 적성 교육에서 푸는 수학 문제집이 있었는데 그것도 같은 방식으로 풀었다.

영어는 학교 수업이나 학원 종합반 수업 (동네에 있는거 있잖은가.) 에서 진도 나갈 부분을 풀어가고 수업 들으면서 한 번 더 확인하고 집에 와서 복습하고 이렇게 했다. 그리고 큰 누나가 이화외고에 외대 영문과(영어과인가?)를 나왔기 때문에 큰 누나에게 영어 과외를 받았다. 교재는 종합 영어였는데 문법은 하지 않고 장문 독해와 단문 독해를 공부했다. 퇴계 이황도 문리를 트게 하는데 암기를 강조했다. 해석이 안 되거나 모르겠으면 머리 속에 집어 넣고 생각하면서 결론을 냈다.

어머니는 내가 공부를 시작하자 매우 좋아하셨다. (나에게는 누나가 둘 있는데 위에 말한 첫째 분은 외대 영문과를 둘째 분은 연대 생물학과에 다니거나 이미 졸업하셨다. 중학교 때의 어떤 학원에 갔더니 상담실장이 내가 갈 대학을 삼육대학으로 지적했었다. 어머니는 조금 충격을 받으셨던거 같다. 그러던 중 내가 공부를 시작하자 어머니는 정말 좋아하신거 같다. ㅡㅡ 막내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다고)

사과탐은 최강학원에 다녔다. (나는 대한민국의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상당히 유리한 조건에 있었다. 부끄럽게 생각한다. 나는 과외나 학원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스스로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 자신이 이미 사교육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사교육의 불필요성을 부르짖을 자격이 없다.) 학원 스타일이 교과서 위주였기 때문에 잔기술을 싫어하는 나의 기질에 맞았다. 정정당당하게 맞부딪히는 스타일이었다. 요점을 짚어주는 강의~ 이런 식이었으면 나는 차라리 1시간 동안 교과서 목차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편이 낫지 강의는 안 듣겠다고 했을 거다.

장승수 씨는 자신이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때를 백지(한지?)가 먹물을 빨아 들이듯이... 라고 비유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계속해서 공부를 했으며 자거나 먹거나 기타 생리현상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공부를 했다. (아니 생리 현상이 이루어지는 속에서도 공부를 했다. 머리 속으로...) 심지어 자기 전에 머리 속으로 수학 문제를 풀다가 자고 일어나서 꿈 속에서 답을 내고는 답을 입 밖으로 외치면서 깨어나기도 했다. 아침에 학교 특기 적성 수업을 들으러 갈 때면 집을 나서기 전에 정석책 (그러고 보니 연습 문제를 안 보면서 이것도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문제를 몇 개 외워서 머리 속에 넣고는 그걸 풀면서 등교했다. 가끔 가다 차에 치이기도 했다. 심하게는 아니고 가볍게...

하루 공부 시간은 17시간 정도였던거 같다. 냉정하게 평가해서...잘 될 때는 19시간도 했던거 같다.

겨울 방학이 지나고 다니던 동네 학원에서 모의고사를 보았다. 사람들이 별로 응시하지 않았는지 성적은 기대에 훨씬 못 미쳤음에도 2% 로 처음 1등급을 받아 보았다. 나중에야 우습게 여겨지는 퍼센테이지가 되었지만 이 당시에는 1등급이란 것 자체를 넘지 못할 벽으로 여겼기 때문에 정말 놀랄만큼 기뻤다. 수학은 1문제를 판단 착오로 틀렸고 영어는 문법 2문제였던가? 아무튼 2문제를 틀렸다. 각각 77, 76 점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사과탐은 방학 동안 열심히 해서 (그럴 필요가 있었는지는...) 거의 만점에 육박했다.

다만 자신있다고 생각했던 언어가 74 점으로 영어나 수학보다 낮았다. 읽는 속도나 글을 받아 들이는 능력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으나 생각하는 방식이 출제자와 너무 달랐다. 이런 나의 안 좋은 버릇은 재수할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언어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내 수험 생활의 바이블이었던 장승수 씨의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를 참고해서 교과서를 완벽하게 해놓기로 결심했다.

한샘 자습서? 그것을 처음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래에 나와 있는 설명같은건 다 외워버렸고 문제도 다 풀어나갔다. 4월? 이 때부터는 어머니의 요구에 납득해서 압구정동의 정보학원에 들어갔다. (나는 의리 같은걸 극도로 중요시하기 때문에 동네학원을 끊으라는 어머니의 요구에 끝까지 저항했던거 같다. 하지만 나도 결국 속물인지라...내 뜻을 관철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내가 다녔던 학교 선생님들의 수업 태도를 별로 성실치 못했다. 나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공통과학을 배워 본 적이 없다. 한 나이 든 선생님은 수업을 잘 들어오지 않았고 어쩌다 들어오면 발표 수업을 했는데 애들이 자습서를 칠판에다 그냥 베끼면 참 조사를 잘 했군~ 하는 식이었다. 다른 한 분은 주식 장세를 보느라 수업을 들어오지 않으셨다. 실력있는 분들도 있었지만...노력하지 않는 분이 더 많았고 실력도 없다고 생각되는 분들도 많았다. 모의고사를 볼 때 언어 시험지를 뺏어서 찢어버리고 반미교육을 하시는 분도 있었다. 교무실에서 소주와 김치를 드시는 분도 있었으며 교무실에서 자위하다가 학생에게 들킨 분\'들\'도 있었다. 수업 준비는 왜 그렇게 안 해오시는지...영어 5문제를 풀다 2문제를 틀리는걸 보고서 아연실색해서 지적도 못 하게 되는 경우는 참 싫었다. 수학 선생님들은 왜 그렇게 보는 문제마다 못 푸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수업 준비만 해 오셨으면 풀 수 있었을 텐데...영어 선생님들은 제발 문제집 정도는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며 언어 선생님들은 문제를 답 없이도 어느 정도는 풀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모를까 봐 무서워서 질문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있었던 능력있고 성실한 선생님들을 싸잡아서 욕해서 너무 죄송하다.

그래도 있었던 능력은 없지만 성실하지도 않지만 인간적이었던 선생님들 역시 싸잡어서 비난해서 너무 죄송하다.

학원 수업은 정말 황홀했다. 단순히 수업 이런걸 떠나서...수학의 경우 어려운 문제를 맘껏 맛볼 수 있고 다른 과목의 경우 질문을 마음껏 해도 좋은게 좋았다. 나를 사교육에 찌든 사람이라고 한다면...사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뭐 그렇게 말해도 좋다. 나는 적어도 친구들보다는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게 사실이니까...하지만 나는 정말 질문을 하고 싶었고 제대로 된 답을 듣고 싶었다.

계속 미친듯이 공부했다. 쉬는 시간은 당연히 공부하는 시간이었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 언어는 디딤돌 기본편이란 걸 같이 풀기 시작했던거 같다. 2달? 정도에 끝내고 디딤돌 종합편도 풀어 나갔다. 한샘 자습서도 같이 보면서. 12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는데 하루 공부 시간은 한 15시간 정도였던거 같다.

그러다가 6월달에 교육청에서 보는 모의고사를 보게 됐는데 원점수로 357점인가? 를 받았다. (나는 이게 성적이 발표되기까지 347인 줄 알았다. 사과탐 점수 10점을 잘 못 계산한 결과였다.) 고2 들의 모의고사 성적은 그렇게 높지 않기 때문에 대충 1% 안에 들었던거 같다. 사과탐에서 20점 정도를 깎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긍정적인 점수구나...하고 생각했다.

이후에도 계속 미친듯이 공부했다. 공부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으면 도중에 문예부 부장으로 축제를 준비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어떻게 축제가 끝나기는 했지만 나는 당시 공부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이 너무 없었기 때문에 선배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나는 계속 공부만 했다. 예습 복습을 철저하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을 몇 개 더 했다. 수학은 교과서를 위주로 갔다.

수업 시간도 절대 그냥 흐르게 두질 않았다. 선생님이 잡담이라도 할라 치면 재빨리 영어 단어장을 꺼내 외우거나 그 과목의 다른 부분을 살펴봤다. 이런 식으로 나는 내신 공부를 대개 그 수업시간에 끝내버리고 시험 기간은 한 일주일 정도 전에 국어, 수학, 영어, 한문 (국어와 한문 시험이 문과 내신 등수를 결정지었다. 전교에서 90점 이상이 3명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정도만 한 번 스윽 봐둔 채 시험에 돌입해서 전날 벼락치기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전부 수능 공부에 쏟아 부었다. 이런 방식으로 2학년 때 전교 등수는 1~3등 정도를 기록했다. 나는 1학년 때 내신이 서울대 지원자 치고는 그렇게 좋지 않았는데 2~3학년 때 내신의 석차 백분율이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수시를 쓸 때는 상당한 내신이 되어 있었다. 2학년 때 내신 시험 과목 11과목 중 8과목 정도는 1등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사설 모의고사를 하나 보았는데 0.7% 정도가 찍혀 나왔다. 아직 목표로 하던 서울대 법대와의 거리는 컸다.

11월에 교육청 모의고사를 하나 보았는데 372점인가? 가 채점의 결과였다. 다만 성적표에는 369점으로 찍혀 나왔다. 수학에서 마킹 실수가 하나 나왔던 모양이다. 언어가 114점이어서 상당히 기뻐했다. 퍼센트는 잘 모르겠다. 0.5%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고3 이 되기 직전의 겨울 방학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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