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cid [143] · MS 2002 · 쪽지

2003-06-21 14:5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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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의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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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의 이야기

0. 2002년의 이야기 (intro)
1. 방향 찾기
2. 공부 (1)
3. 공부 (2)
4. 여름방학
5. 수능이 하루하루 다가오면서
6. 20021106 동북고에서
7. 20021117 서울대에서, 20021230 고려대에서, 20030116 그리고 다시 서울대에서
8. 2003년의 이야기 (1)
9. 2003년의 이야기 (2)
10. 꿈 (outro)








1. 방향 찾기

그렇게 2002년의 첫 한 달은 허무하게 지나갔다. 수험생의 기준에서 보면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룰 생각도 없었을 뿐더러, 손을 쓸 수 있는 방도도 없었다. 당시의 나는 문제집은 한 권도 몰랐고, 유명강사들의 이름도 당연히 알지 못했다. 달이 바뀌고 2월로 넘어가도 마찬가지였다. 2월 7일에 중앙 모의고사가 있다고 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만 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어머니께 "이번에 공부를 많이 안 해서 점수가 안 나올 거에요"라는 말씀밖에는 드릴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내심 종전 수준의 유지는 기대하고 있었고, 어서 1년이 후딱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시험을 보았다. 결과는 대폭락이었다. 총점은 35점 하락하고, 가장 뚜렷하게 점수가 떨어졌던 언어 (99.8), 수리 (62)를 비롯하여 모든 과목이 고1,2때에 비해 5~10점씩 하향세였다. 집에 오면서 눈물이 났다. 사실 그 때의 눈물은 공부를 안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라기보다는, 아무리 공부를 안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하는 알량한 자존심의 발로였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에) 어머니는 별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다만 앞으로는 죽어라고 하라는 한 마디만을 남기셨을 뿐.

정신이 멍했다. 내가 왜 이짓을 하고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공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강 고수부지에 가서 필통을 던져 버렸다. 그래, 어차피 남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나지도 못할 공부 해서 뭐하나. 성공따위는 나하고 거리가 먼데... 하는 말들을 주워섬겼다. 며칠이 지났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나에게는 목표가 없었다. 아니 목표가 없었다기보다는 만들기 싫었다고 하는 것이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공부했다는 것이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해야지, 하는 생각을 버리고 싶었다.

현실조건이 완벽히 충족된다면 사실 나는 서양사학과를 가고자 했다. 역사를 가지고 조물락거리기 좋아했던 어린 시절도 물론이거니와 전반적으로 사회탐구를 가장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사학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의 장벽이 있었다. "순수한" 학문을 하는 길의 험난함을 잘 알고 있었고, 고3의 작은 시련 하나 감당하지 못하는 내가 어떻게 그 길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래서 남들이 인문계에서 공부 좀 잘하면 다 간다는 법대만을 쭉 바라보고 살아왔다. 그런데 그건 뭔가 아니었다. 법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고시용 법이 아니라 대학에서 배우는 법의 내용이다) 을 배우면서 내가 내 인생에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까? 내가 정말 바라는 게 그거였을까?

나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역사 앞에 놓인 벽과, 현실 사회서 최대로 그 보상이 되는 학문인 법의 앞에 놓인 벽에서 헤맸다. 내가 택했던 것은 역사도 법도 아니었다. 정치학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국제정치학, 더 정확히 말하면 국제정치경제학이었다. 역사를 가장 좋아했던 나에게 이것은 차선책이었다. 국제정치학을 공부하면, 국제관계사에 대해서 폭넓게 공부할 수 있고 더 나아가 국제정치경제에 실력을 쌓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경제학부와의 복수전공도 생각했다. 국제금융시장이 날이 갈수록 커져 가는 시점에서 도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에 하나 고시를 보게 되더라도 내가 그나마 가장 좋아하는 고시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목표를 정했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03. 물론 사회대가 광역화라는 것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일단의 목표는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03학번이었다.

내가 ORBI의 고3 여러분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 중 하나는 "자신이 진짜로 바라는 것을 찾으라" 이다. 어느 대학이 더 낫고, 어느 대학이 무슨 영역을 반영하는 것 등등. 물론 입시라는 큰 틀 안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대학은 그것만으로 다닐 수 없다. 점수를 따지고 학과간 서열을 따지는 행위는 대학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 (물론 일부 악성 훌리건들은 예외지만) 더군다나 공부 안한다고 잔소리 하는 부모도, 수업 늦게 들어오거나 안 들어온다고 꾸짖는 교수도 없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한다. 자신이 신청한 과목에 대해서, 자신이 전공으로 선택한 학문에 대해서 애착과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실력을 쌓아 나가야만 어느 방면에서는 승리하는 곳이 대학이라고 생각한다. 흥미를 잃으면 남는 것은 재수강, 더 나아가서는 대학 4년+a를 취업 준비를 위해 투자하는 (주 : 물론 고학번이 되면 누구나 장래에 대한 준비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1학년 1학기 때부터 그런 행위를 일삼음을 뜻함) 것은 내 개인적 가치로 볼 때 불행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처럼 현실과 어느 정도 적절한 타협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이 명예와 부를 원한다면 그런 방면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지만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의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만, 그것이 외부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철저히 자기 혼자서 여러 가지 조언을 주관있게 구해 보고, 실제로 그 방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공부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본 다음 자기의 원칙과 소신에 따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일단 결정되면 그 다음부터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쓰지 말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함은 물론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무차별곡선을 그리고, 현실의 제약요소인 budget constraint를 그어서 그 접점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equalibrium에서 최적의 선택을 하기 바란다. 작년에 나와 함께 ORBI에서 혹은 YDtown에서 2003입시를 겪었던 사람들은 모두 그런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대부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2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고, 그 공부의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2~#3에서 자세히 털어놓고 싶다. 여기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이상"과 "현실"의 "균형점"이다. 이상을 향한 무차별곡선은 누구나 다르고 현실에 따른 제약조건인 예산식 또한 누구에게나 다르다. 중요한 것은 접점을 찾는 일이다. 그 접점은 누구에게나 다를 수 있지만 누구에게나 다르기에 또 중요한 것이다. 절대로 남의 기준을 자신에게 끌어다 붙이는 일은 피하기 바란다.

이야기가 많이 길어졌음을 느낀다. 하지만 목표는 그 무엇보다도, 심지어 공부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일이기에 거듭 강조하고 싶다. 나는 현재 광역화되어 있는 소위 '공포의 학부제' 단과대학에 재학중이고, 시험 때면 고등학교처럼 하루하루를 마음 졸이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고 거기서 보람을 얻으면 대학입학은 성공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인기학과를 지원한 친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두 그들 나름대로의 꿈이 있고 현실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미래를 결정했으리라.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공부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상기해 보고, 공부와 더불어 치열한 고민과 현실 의식을 해 보기 바라면서 #1을 이만 줄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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