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4/11 [686128] · MS 2016 (수정됨) · 쪽지

2017-10-16 18: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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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팅까이고 카이스트 자퇴후 연의간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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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 대전 KAIST 학생정책처장실
"아무튼 1학기부터 휴학은 안 돼."

04/06 대전 어은동
"미친 건가? 휴학을 하던가 하지.."
"하긴.. 지금이라도 빨리 말려라"
"힘들거야, 그게 한다고 점수가 딱 나오질 않아"

04/10 집 근처 술집
"그래 군대 잘 갔다오고, 오늘을 기억할 날이 오긴 올거야"
"넌 내가 보기에 된다. 잘 하고. 잘 할거야."
"고맙다. 진짜. 딱 끝나고 연락할게."

04/25 서울 노량진 **학원
"6월 모의고사 신청하려는데.. 자리가 있나요?"
"일주일 전에나 이미 다 찼죠.. 다른 곳도 마찬가질 겁니다."

04/28 서울 노량진 **고시원
"알아서 하죠. 요 앞에 딸기를 파는데 하나에 3000원인거에요. 좋아요"

05/11 서울 노량진 고시식당
"괜찮아요, 밥은 맛있으니까. 네. 네. 걱정 마시고, 사람 밀려서 끊을게요."

05/28 집 엘리베이터
"어, 9층 그 친구구나. 학교는 다닐만 하니? 오늘 주말도 아닌데 집에 왔네?"
"아.. 네 그 수업이 없어서.."

06/02 집 6월 모의평가
"뭐요? 배수의 진이요? 이게 무슨 배수의 진이에요, 이게.. 내가 미친 짓을 했어.."

06/20 충북 **사(절)
"잘 모르겠어요. 어쩌다가 내가 여기 있는건지, 벽에 대고 대화를 하고, 혼자 방에 누워 잘 때면 그냥 다 포기하고 싶네요."
"저녁이나 먹자. 괜찮아. 고기도 잘 못먹었을거 아냐. 갈게. 좀 이따 내려와."

07/03 충북 **사(절)
"열심히 하고 있는 걸까요? 내가 이렇게 의지가 약한 사람이었나. 오늘도 그만 몰래 내려왔어요."
"... 그래 힘들지? 힘든거야 이해해."

07/19 서울 ****학원 첫날
"이렇게 해서 된 사례가 있을까요? 이젠 가능한지도 모르겠어요."
"그 사례의 주인공들은 사례가 있어서 잘했을까? 열심히 해 임마."

08/15 서울 한강변
"너 수능 못보면 빠뜨린다."
"에휴 잘해봐라. 삼수한단 헛소리나 하지말고."
"그래.. 삼수는 안되지"

10/15 서울 교대역 근처 독서실
"형, 이게 가능하기는 한거에요?"
"불가능하진 않아. 수능에서 세 개. 그럼 돼."
"하 말이.."

10/30 서울 ****학원 10월 사설모의고사
"너, 이러려고 자퇴했냐. 수능이 보름이야. 맨날 졸고, 정신 차리자."
"......죄송합니다..."

11/05 서울 ****학원
"모르겠어요... 자신이 없네요. 왜 저는 재수생인데 수능은 처음일까요.."

11/16 집 앞
"내일 저녁에 웃으면서 보려나?"
"잘 볼겨, 열심히 했잖아."
"고맙다. 내가 저지른거, 끝내고 온다."

11/17 충북 **고등학교 2017 대수능
종이의 감촉, 잉크. 수능 시험지도 별반 다르진 않다. 오늘 정말 끝나는 걸까? 눈앞엔 국어 영역이라는 글자가 담담한 글씨체로 쓰여 있다. 평생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수능 시험지. 종이 쳤지만 잠시 노려본다.

수고했다는 말을 뒤로 하고 계단을 내려가 운동장이 보이는 문을 여니 들어오는 햇빛.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노을빛에 물든 학교 전경, 햇빛의 각도와 내 앞의 차종, 그리고 조금씩 느껴지는 해방감마저도 선명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터덜터덜 교문으로 걸어가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나.

"잘 봤니?"
얼마나 틀렸을까. 아득하다. 나는 이미 최악을 각오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웃어야만 했다. 왜냐면 붉어진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네, 어떻게 되든 인정하려고요. 가서 만족하며 살고 싶어요."
"그래, 고생 많았어, 정말. 정말 고생 많았어."
이미 울고 계셨다.

- (에필로그)


12/07 청주 집 수능 성적표 발표일
"선생님, 이거 가채점이랑 다른데요."
"뭐야?"
"아... 이거... 국어 하나 더 맞았네요."
"하, 이런 걸로 장난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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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조금 자극적이었나요? 한줄로 요약하면 저거라서.. 하지만 글은 진지하게 썼습니다. 아직 작년 수능의 여운에 갇혀사는데 벌써 이번 수능이 한 달 남았다는 사실에 복잡한 생각이 듭니다. 작년에 오르비 많이 방문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긴 글을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네요.


 저는 작년 카이스트 16학번으로 입학해서 한달 가량을 다니다가 4월 초에 자퇴했습니다. 사실 수시로만 대학을 보내는 고등학교 출신이라 수능을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했던 결정이었습니다. 그렇게 7개월간 공부하게 되었고 연세대 의대에 합격하였습니다.


 카이스트를 자퇴하게 된 이유는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럽기도 합니다만, 이제는 1년도 더 지난 이야기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네요. 카이스트에 입학 후 서울에 있는 한 여대와 미팅을 했는데 저는 한 분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분은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서울에 올라가 한 번 더 보기는 했지만 연락이 끊기게 되었고 저는 낙담했습니다. 이젠 나갈 미팅도 없고 구하기도 힘들었습니다. 대학 와서 연애 한번 해 보고 싶었는데 왠지 힘들 것 같다는 사실이 저를 슬프게했습니다.


 연락이 끊기던 날, 저는 카이스트 근처 강가에 가서 고민했습니다. 뒤돌아 보니 가득한 연구실 불빛. 그때 결정을 어느 정도 한 것 같아요. 목표는 서울대, 서울에 가서 청춘을 빛내고싶었습니다. 아마 그 다음날에 자퇴 신청을 내고, 일주일 뒤에 자퇴했습니다. 새터반 친구들은 송별회까지 마련하고 동영상도 찍어서 보여주더라고요. 좋은 친구들을 떠나 아쉬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작년 수능을 뽑아 시간을 재고 푼 것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국어 70점대..영어 70점대.. 과탐은 고르지도 않아 아무거나 뽑아서 푸는데 풀다가 다 찍을수밖에 없어서 시간 전에 그만두었습니다. 그때 나온 성적이 기억상으로 32476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아서 그렇다, 하면 얼마든지 오른다고 믿고 부모님께 제 계획을 통보드리고 서울로 올라갔죠.


 4월 11일 노량진의 한 고시원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었고 학원은 등록하지 않았지만 근처 독서실을 왕복하며 독학 재수를 했죠. 그렇게 한달 반이 지나니 생활도 익숙해지고 자꾸만 혼자서 놀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부모님이 알아보신 충북의 한 절로 갔습니다. 그때쯤 6평은 혼자 시간을 재서 풀었는데 22266 이렇게 나오더군요. 


산속 조용한 절에서 채식을 하며 조용히 공부만 할 생각이었습니다. 한달 정도는 정말 공부도 잘 되고 건강도 좋아졌던 것같습니다. 절밥도 익숙해지니 맛있고 공부가 힘들면 산을 좀 걷다 오면 되니 우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두달이 넘어가니 마음이 지치고 일탈을 하게 되더라고요. 결국 혼자 마을에 내려가기도 하다가 서울에 몰래 올라가 학원을 알아보고교대역 근처 한 재수학원을 다니기로 합니다. 그리고 목표를 서울대에서 인서울 의대로 바꾼 것도 이때쯤이었습니다. 화2가 너무 어려워서 지1으로 돌렸죠. 아무튼 제 궁극적인 목표는 서울 생활이었으니까요. 


역시 근처 고시원을 잡아 수능 때까지 학원에 다녔습니다. 원래도 수업을 잘 듣지는 않았는데 수능 한 달 전부터는 그냥 독서실을 잡아서 몰래 아침에 카드찍고 바로 독서실가서 점심먹으러 학원에 돌아왔던 것 같습니다. 독서실에서 주로 인강을 들었는데 저는 아마 인강이 더 잘 맞았나 봅니다. 학원에서는 수능은 보지 않았어도 전적 대학이 있으니 위에서 두번째 반에 넣어주더라고요. 첫번째 반이 압도적으로 잘해서 모의고사볼 때마다 주눅들고 자극받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음.. 9월 모의고사가 처음으로 시험장에서 본 평가원 시험이 되는데 올1등급을 받았습니다. 아마 지방대 의대 정도 점수였던 것 같습니다. 


수능은 집 근처로 돌아와 보았고 국어 1개 수학 1개 물리1 1개를 틀려 연세대 의대 정시 2차 추합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가채점에서는 4개를 틀렸었는데 국어 한 문제를 더 맞아 실제 성적 발표날 3개로 줄었죠. 그럼에도 애매한 점수대여서 고려대 의대를 쓸까 고민도 많이 했지만 후회없는 선택을 하고 싶었습니다. 


합격하던 날 정말 눈물이 나더라고요. 폰으로 확인하고 그걸 멍하니 보고 있는데 노량진, 절, 좁디 좁은 고시원이 가득 생각나면서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부모님이 절 꽉 안아주시던게 생각나네요. 얼마나 고생 많으셨을까요. 갑자기 자퇴한다고 하더니 7개월간 거의 연락도 없이 지냈으니... 정말 제 상상 이상으로 걱정하며 불안하게 지내셨겠죠. 그렇게 친척 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돌리고 제 재수 생활은 끝을 보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책상에 앉아 공부하던 순간이 아니라, 잠자리에 누워 오늘을 되돌아 보았을 때 밀려오는 후회감과 자괴감에 몸을 뒤척이던 순간이었습니다. 또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하루가 더 다가왔다는 부담감은, 그 어떤 아침도 상쾌할 수 없게 했죠.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데우던 수많은 아침들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송도에서 이제 저녁 먹으러 기숙사를 나가기 전에 쓰는 글인데, 1년 전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상상이나 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합니다. 당시엔 오늘같은 이 순간을 간절히 바랬겠죠. 늘 생각했었습니다. 언젠가는 기차를 타고 이어폰으로 여유롭게 음악을 들으며 여행을 떠나고, 그땐 참 힘들었었지 추억할 거라고요. 눈 감았다가 뜨면 기차 안에 앉아 있을 거라고요. 지금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네요. 


이제 수능이 정확히 한 달 남았군요. 수험생분들의 심정, 저도정말 잘 이해합니다. 지치고, 힘들고, 억울하고 또 슬프죠. 그러나 수능이 끝나고 웃으며, 아련하고 소중한 재수 생활로 남기를 바라겠습니다. 


음.. 정보를 너무 많이 담아서 제가 누군지 아는 사람들도 나올 것 같네요. 그래도 저격은 하지 말아주세요. 작년에 수능 잘보면 꼭 수능 한 달 전에 이렇게 수기글을 남겨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글을, 위로와 희망이 되는 글을 쓰기로 다짐했었거든요.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그뿐이니 저를 아시더라도 조용히 넘어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2018 수능 수험생 여러분, 화이팅입니다!!

올해가 여러분의 인생을 빛낸 한 해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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