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peDiem♬♪ [252220] · MS 2008 · 쪽지

2011-02-15 06:4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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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 희망과 꿈의 차이가 그릇의 차이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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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솜씨가 없어서....스크롤의 압박이 심하고 횡설수설하더라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ㅋㅋ
아참..일기의 성격이 강하다보니 반말이 자주 나옵니다. ㅜㅜ 오르비 분들의 깊은 아량을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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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현재 꿈은 의사이다. 그 이유를 내게 묻는다면 꽤나 당황스러운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세뇌교육에 당해서"...
물론 반 농담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반 진담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 어머니께 이렇게 물은 기억이 난다.

"엄마, 나 나중에 뭐할까?"
"음.. 의사나 한의사?"
"엄마, 나 의사는 피 봐야되니까 싫어~"
"한의사는 피를 볼 일이 거의 없을걸?"
"그럼 나 한의사할래~"

이렇게 내 장래 희망이 결정이 났다.
그러고는 초등학교 4학년 이후로는 꽤나 오랜 시간동안 장래 희망에 "한의사"라고 써놓았다.
물론 장래 희망이였을 뿐, 꿈은 아니였다. 그러니까.. 미쳐볼 만한 꿈은 하나도 없었다.
꿈이 생겼을 때는.. 한참 뒤였다.

장래희망과 꿈의 차이를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장래희망은 말 그대로 장래에 뭘 하고 싶은 건지 희망하는 것이고.
꿈은 눈을 뜬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 까지 꾸는거라고...



무엇에 미쳐본다는 것. 그것의 시작은 아마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지 싶다. 그 전까지는 무슨 일을 해도 하나 진득하게 해본적도 없었고...
어느 것 하나 흥미가 없었다. 그냥 내신 기간은 시험 공부해야하는 기간이니까 공부를 했을 뿐이였고, 의외로 그것이 동기부여가 잘 되어서 300명 중에 20등 정도를
했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아직 장래희망이 내 꿈인 것은 아니였다.

그런 삶을 지내다가 중학교 2학년 때 미쳐볼만 한 것을 발견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스페셜포스(스포)'라는 게임이였다.
그런데 우리집 분위기는 상당히 독특했다. 토요일 게임 30분, 일요일 게임 30분. 참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살았나 싶다 -_-.... 그래서 스포를 하고 싶어서
매일 몸을 배배꼬아야만 했다. 거의 중독이였던 것 같다. 어머니가 장거리를 보신다고 나갔을 때 조차 그 20분을 이용하고 싶어서 몰래 컴퓨터를 해댔으니....
그렇게 살다가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내신기간'... 무슨 뚱딴지 같은 얘기냐 하면 다음과 같다.

내신 기간을 넉넉잡아 1달을 잡는다. 그리고 1주일 동안 책으로 내신 공부를 끝낸다(;;;) 그리고 남는 약 3주동안은 어머니께 인터넷 공부를 한다고 뻥을 치고는...
새벽 4시까지 열심히 게임을 했다. 물론, 그러다가 어머니께 걸린 적도 많았고, 죄책감도 많이 느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스포라는 게임이 너무나도 재미가
있었고, 날 미치게 했다. 이 생활은 중3때까지 계속 되었고.., 담임선생님께 모태솔로인 나에게 '너 연애하냐?' 이런 소리까지도 들었다..;;;
결국은 성적은 쭉쭉쭉 떨어졌고 등수는 40등까지 내려갔다.(내가 사는 곳은 서울이랑은 달라서 40등이면 지방 국립대를 비빌 '수' 있는 수준이다)
이놈의 스포라는 게임은 날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내신기간 때면 어김없이 찾아와서 내 내신점수를 경험치로 환산해 갔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잉여로웠던 2년이 지나가고, 중3이 끝났다. 갑자기 중3 특유의 '정신차리기' 스킬이 발동되었다. '이제 고등학생인데...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다!!'이런 생
각이 날 정석을 붙들게 했다. 이는 방학때는 내신기간이 없었던 것도 한 몫했다.(내신기간이 아니면 밤새서 게임할 수 있는 핑계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
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때 10-가, 10-나를 정석으로 훑지 않았더라면.. 고1 때 수학에 엄청 시달렸을 것이다.
그렇게 반짝이는 불꽃 정석으로 입학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이제 3월모의고사를 봤다. 아마 총점은 375점이였고.. 언수외는

언어 1등급 커트라인
수리 3등급...
외국어 1등급 중위권
사탐 3~4등급
과탐 6등급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언어는 다행히도 초등학교 때 책으로 방황(?)한 덕에 감이 있었다.(토일 컴퓨터 30분 통제+집안 외출 금지의 협공 덕에 할 만한게 독서 밖에 없었다 ㅡㅜ..)
외국어도 어머니가 열성적인 학습지 광팬이셔서 꾸준히 학습지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수리였다. 수리 3등급.. 대략 전교생 165명 중에서 등수가 100등 밖이였다..평균 미만..나름 정석을 열심히 팠다고 생각했는데.. 결과가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 덕에 내신 시험에서 수리를 망칠까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 내신 등수는 잘 나왔다. 그 당시 머리는 내신에만 최적화 되어있는 머리였나보다...
그 이후로 수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내 문제 풀이 방식은 양치기였다. 정말 친구들이 날 '양치기 소년'이라고 부를 정도였으니까....
정석 1번 훑은 이후로는 개념서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문제풀이+문제풀이+문제풀이+문제풀이.... 였다. 개념은 문제풀면서 충분히 배울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
다. 그렇게 열심히 문제만 풀어대다 보니 슬슬 모의고사 문제의 유형이 감이 왔고. 결국 6월 모의고사는 2등급, 9월 모의고사 이후로는 1등급을 찍게 되었다. 이 때부터
고3의 몰락기 때까지는 수리는 효자과목으로서의 역할을 다 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의 공부법은 정말 멍청한 공부법이였다. 재수하면서 깨달았다. 수리에서 말하는 개념의 중요성을.... 조금 더 본격적으로 얘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개념 습득 뒤에 문제풀이는 물론 중요하다. 사실.. 참고서에 있는 개념은 2% 부족한 개념이라 생각한다. 문제풀이에 바로 적용하기에는 아직 정제가 덜 된, 거친
원석과도 같은 것이 참고서에서 습득한 개념이다. 이걸 정제하려면 문제풀이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문제 풀이를 하면서 문제에 적용되는 개념들을 문제에 맞게
다듬어 내고, 이름표를 새겨서 문제 풀이 할 때 어떤 문제를 보면, '아! 이런 개념이 필요하다~'라는 감이 와야 한다.(거창하게 말해서 그렇지 이 말은 '유형을 안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의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적당히 정제를 했으면 마지막으로 담금질이 필요하다. 그 담금질은 다름이 아니라 오답에서 빠뜨린 개념이나 실수
를 찾아내는 것이다. 현역까지의 나는 이 단계를 거치지 못했다. 무작정 문제 풀고 채점하고, 그게 끝이였다.(심지어는 채점도 안했다. 풀 수 있다면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실수로 틀려도 그냥 실수로 틀렸지, 이건 내 실력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곤 했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이 담금질을 생략한다면 2학년 모의고사까지
는 잘 견뎌낼 수 있지만 수능 수리 가형에서 1등급 이상 받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이 단계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얘기는 2010 수능 실패 때 얘기하기로 하고
다시 고등학교 생활로 돌아갈까 한다.



드디어 문이과를 정하는 2학년... 항상 사회과목이 과학과목보다 등급이 좋게 나왔고, 1학년 때의 담임선생님께서도 이과보다는 문과를 추천하셨지만, 나는 '한의사'라는
장래희망만 가지고 이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2학년이 시작되기 전의 겨울방학때 열심히 수학1을 팠다. 수학2를 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거의 수학1 진도 나가는데에만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겨울방학이 훅 지나갔다. 그 동안에 언어는 감각유지를 해주었고, 외국어는 학원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는 한 자도 하지 않았다. 왜 그랬
을까......(언외 할 시간도 없었으니... 과탐 선행학습은 꿈도 못 꿨다. 수학 선행학습(개념위주)은 수1정도는 이과라면 1학년 2학기 때 잡는게 나을 듯하다.)
고등학교 2학년 모의고사는 1학년에 비해서 진동이 심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수학 진도를 따라잡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2학년 1학기는 수학1 진도를 따라 다니
느라 바빴고, 2학년 2학기는 수학2를 잡느라 바빴다. 미적은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언수외의 불균형이 일어났고, 과탐은 공부하는 시간이 내신 기간을
제외하고는 전무한 사태로 치달았다. 수리는 그래도 열심히 때려잡은 보람이 있었는지 96~100을 진동했고, 언어 1~2등급을, 외국어 또한 1~2등급을 왔다갔다 거렸다.
과탐은 1~3등급을 왔다갔다 거렸다. 내신 기간때면 1등급이 되었고, 내신기간이 지나가면 2~3등급 진동.... 그냥 내신 치고 잊어버리는... 그런 스타일이였다.
이 당시에 가장 걱정이 되었던 것은 외국어였다. 그 당시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었지만 별 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쉽게 나오는 교육청은 1등급 컷과 2등급 상위에서
줄넘기 놀이를 하곤 했으나, 조금 까다롭게 나오는 사설 모의고사는 80점대는 기본이고 항상 2등급 중하위권이였다. 그러다가 반환점이 하나 생겼는데, 그것은 7월
쯤에 친 대성 모의고사였던 걸로 기억한다. 외국어를 82점 맞았고, 3등급 중하위권을 기록했다. 참 할 말이 없었다. 그 때 어머니를 붙들고 징징 짜댔던게 기억난다.
남자 체면이고 뭐고 그딴 거 하나도 필요 없었다. 정말 힘들었다. 수리 공부 하는 것도 벅차서 죽겠는데.. 다른 과목들이 말썽을 부리니...

각오를 했다. 이제 수리 영역은 잠깐 보류하고 외국어 영역이란 놈을 때려잡기로... 복수를 위한 칼날을 다듬는 돌로 나는 '인강'을 택했다. 먼저, '왜 점수가 1학년에 비해
많이 떨어졌을까?'를 생각해봤다. 어휘, 독해속도, 독해정확도, 듣기, 문법 정도로 나누어 봤는데.. 아무래도 내가 부족한 점은 독해속도와 듣기였다. 따라서 나는 독해기법을 가르쳐 주는 것을 택했고 듣기는 매일 1 set씩 듣기로 했다. 인강은 pmp로 매일 꼬박꼬박 챙겨서 들어주었고.. 내가 이제까지 살다가 평생 안 해본 복습마저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사설을 쳐도 90점 이상을 유지했다. 물론, 부동의 1등급... 그런 영역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나름 만족했다.



1학년 때 수리, 2학년 때 외국어를 중점으로 공부했다면.. 이제 고3때 남은 과목은 언어와 과탐이 남아 있었다. 고3 초기에는 수리는 아직까진 효자과목이 되어 주었고, 외국어는 불효자 신세는 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언어와 과탐에서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먼저, 언어는 오르비를 돌아다니다 알게된 '가랑비(언어의 기술의 고전판
이다)를 위주로 공부하기로 했다. 그것을 보고 언어의 공부방향을 잡아갔다. 그전까지는 사설모의고사를 막 풀어제낀 것을 피눈물 흘리며 후회하고, 기출로만 공부했다. 하지만, 공부로 끝났다. 그 당시의 수리영역과 마찬가지로 오답 분석은 커녕, 지문 분석도 하지도 않았다. 정말 비효율적인 공부였다. 과탐은 1과목들의 개념은 일단 2학년 내신 때 열심히 공부했으니 기출 문제 풀이를 위주로 했다. 이때도 마찬가지, '분석이 뭐야?'를 외치고 다녔다. 그 당시의 내 눈에는 분석은 이상한 놈들(죄송 ㅡㅜ..)만 하는 걸로 보였다. 채점하고 맞으면 그만, 틀리면 실수로 간주하고 자만심에 찌들은 생활을 했다. 2과목으로는 화학2를 선택했고, 화2의 공부법은 2학년 당시의 1과목 공부법에 기출문제 풀이를 얹어 놓은 것 뿐이였다. 내신기간 때 개념을 열심히 익히고, 그 이후에 다량의 문제풀이..... 어떻게 공부를 미련 곰퉁이 같이 이렇게 일관성 있게 했는지.... 아마 재수의 마수는 내 공부법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공부하다보니 그래도 모든 과탐 과목이 1~2등급 진동을 하게되었고, 총합 180이상은 꾸준히 나와주며 대부분 1122에서 찍신이 내리면 1112정도를 찍곤 했고, 언어는 아무리 공부해도 오르지 않았다. 항상 잘봤다가 못봤다가.... 외국어도 마찬가지였다. 언외 모두 1~2등급에서 진동을 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였다. 수리.... 수리 영역이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수1이 많이 나오는 4월달까지는 연속 백분위 100을 찍으며 승승장구 했으나, 수2가 일부 포함되는 6월 평가원 때는 백분위 98, 9월 평가원 때는 백분위 95를 찍었다. 급기야는 10월 모의고사에서는 백분위 92를 찍으며, 완벽한 하락세를 보여주었다. 불안했다. 너무나 불안해서 문제만 풀어제끼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문제풀이에 편향된 학습으로 성적이 떨어지고, 성적이 떨어지면 또 양치기를 해대며 뿌듯해 하고, 양치기만 하다가 또 다시 성적이 떨어지고..... 이제 10월 달이 지나자, 수리 영역은 더 이상 효자과목이 아니였다. 그냥... 배신때린 과목에 불과했다.

그렇게 불안해하며 효율이 0에 수렴하는 공부를 하고, 드디어 11월이 다가왔다. 여전히 복습의 중요성은 깨닫지도 못했다. 그냥 모의고사 풀이를 계속하고, 또 계속했다.
그래야 불안이 그나마 덜어졌으니까.... 그렇게 살다가 드.디.어 수능이 포함된 달이 내게로 왔다. 이 말은 수험생, 특히나 수능을 처음 치루는 현역들에게는 상당한 부담감을 준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실패에 대한 부담감, 미지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 이런 부정적인 심리적 요소들 때문에 공부가 안되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며 달래기도 했지만... 여전히 부족한 건 마찬가지였다.

<2010수능>

드디어, 결전의 날이 왔다. 성적은 비록 의대에 모자랐지만,(고등학교 2학년 때, 의사가 되고 싶어서 한의사에서 의사로 장래희망을 바꾸었다. 이 때도, 막연한 장래희망이였다.) 여전히 목표대학은 서울대 의대였고, 수능 만점이 목표였다. 고사장은 모교로 당첨이 되었다. 고3 특유의 극도의 후달림에 시달리던 나에게는 다행이였다. 여담이지만 나는 두려움을 통제하는 데에 재능이 없다. 발표시간에도 발표를 하면 목소리가 떨렸고, 이는 그냥 글을 읽을 때 조차도 해당되었다. 그런 그때의 나에게, 수능이란... 정말 두렵지만, 꼭 만나야 하는 강적이였다. 이제 수능 1교시로 돌아갈까 한다.

수능 1교시. 언어영역 시간. 그래도 모교라 그런지 모의고사 치는 기분이였다. 시험지를 받기 전까지는..... 시험지를 받아들자,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이 한 문제에, 대학이 갈리고... 내 꿈의 성공여부가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떨렸다. 듣기 문제를 들을 때는 정말 사람이 반 쯤 미쳐갔다. 한 단어라도 놓치면, 그걸로 끝일 테니까.... 그래도, 다행히도 듣기 영역은 잘 본 것 같았다. 이제 쓰기영역,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6~10번 사이의 한 문제에서 막혔던 것 같다. 평상시의 나라면, 그냥 2분만에 안되면 넘겼을텐데, 수능 특유의 긴장감 때문에 그 문제를 6분 정도 붙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풀지 못했다. 그냥 별표를 치고 넘어갔다.(나중에 매겨보니 틀려있었다...) 그렇게 처음부터 페이스가 말리자 문학 문제든 비문학 이든 모두 시력 테스트가 되어 갔다. 그렇게 풀다가, 한 지문이 남았다. 신뢰도 지문... 마지막까지 시간에 쫓겨서 풀다보니 막판에는 시간이 꽤나 남아있었다. 느긋하게 풀었다. 마킹하고 나니, 거의 딱 맞게 종이 쳤다. 나름 잘 푼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았다. 물론, 이것도 매기기 전 까지의 얘기다.
수능 2교시. 수리 영역 시간. 10월 이후로는 불효자 과목이였지만, 여전히 나는 수리영역을 믿고 있었다. 가장 자신 있는 과목하면, 여전히 수리였다. 그렇게 자신에 가득 차서 페이지를 넘겼다. 처음 바라본 순간 느낌은 그저 그랬다. 그런데 문제로 뛰어드니까 상황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2,3점짜리 문제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4점짜리 문제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렸다. 수리영역을 다 풀려면 반드시 4점 문제 중에 쉽게 느껴져야 하는 문제들이 반 이상은 되어야 하는데, 그런 느낌이 오질 않았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당황을 계속하다보니 실수가 생기고, 실수가 생기면 더 당황하게 되고, 다시 악순환이 시작되었다. 결국 모르는 문제를 10개 별표 치고 나자 40분이 남아있었다. 이제 남은 40분 동안, 10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한 문제에 4분. 충분해 보였다. 그런데 이게 왠 걸... 갑자기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분명히 아침에 이런 일이 없도록 확실히 볼 일을 보고 왔는데.... 결국 배가 아파오니 문제에 집중을 하지도 못했고, 결국 40분동안 문제와의 사투가 아니라, 배와의 사투를 하고 나니 종이 쳤다. 망했다. 거의 8문제 정도 찍은 것 같았다. 말이 8문제지.. 몇 개 찍어서 맞는다고 해도 80점 이상은 힘들 것 같았다. 수능을 포기하고 싶었다. 정말 수능이라는 놈만 아니였으면...... 조퇴해서 집에 가서 부모님 붙잡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내 3년 동안 한 공부가 아까웠으니까. 그래서 '찍은 것 다 맞았겠지...+ 3교시부터 만점 받으면 의대 갈 수 있다!'라고 외치며 우울한 점심을 먹었다.
수능 3교시. 외국어 영역. 이 영역은 항상 시간에 쫓기며 풀어서 수능 날에는 더욱 긴장이 되곤 했다. 듣기는 경우가 더 했다. 듣기 특유의 1회성 때문에 나는 모의고사 때도 심하게 긴장하는 편이였고, 쉽게 당황하는 편이였다. 그래서 긴장을 바짝하며 그와 동시에 자기 암시를 하며 수능에 임했다. 처음에는 느낌이 괜찮았다. 이렇게 느리게 천천히 들려주는데 누가 틀리나 했다. 그런데 결국 사건은 터졌다. 놀이 공원이 나오는 3점짜리 듣기 문제를 놓쳤다. 결국 찍었다.(나중에 매겨보니 이 문제 또한 틀렸다. 아마 2010 수능 때 찍은 문제는 수리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들은 모두 틀린 듯 하다.) 그런데 아무 느낌이 없었다. 이제 자포자기라 할까... 여튼 그런 기분이 나를 엄습하며, 이제 점점 찍은 문제에 해탈의 태도를 보여갔다. 그에 따라 긴장감도 풀리고, 희망 또한 사라져갔다.
수능 4교시. 과탐 영역. 어떻게 풀었는지도 모르겠다. 시험 문제 풀때는 푸느라 바빴고, 쉬는 시간 2분은 답안지를 수험표에 옮겨 적느라 바빴다. 바쁘다는 말 빼고는 딱히 얘기할 게 없는 과탐 영역이였다.

그렇게 수능이 끝났다. 정신 없이 끝나서 화2 영역 마킹이 끝나고, 종이 치는 순간에도 고등학교 3년의 끝맺음을 했다는 사실이 와닿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는 순간, 느낌이 왔다. '아, 이제 수능이 끝났구나.... 내 고등학교 생활이 이렇게 끝을 맺는구나...' 허탈했다. 이 짧은, 1일을 위해... 3년을 투자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렇게 찍어버릴 문제들을 위해, 내가 하고싶은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공부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사실.. 가장 허탈했던 순간은 수능 성적표를 받은 순간이였다. 이 종이표 한 장을 위해서 내가 밤을 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참 힘이 들었다.) 그렇게 반 설렘 반 허탈함으로 집에 도착했다. 바로 컴퓨터를 켰다. 메가스터디를 들어가서 채점을 하려 했으나, 아직 답안지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네이버에 수능 정답표를 피고, 하나 하나씩 내가 적어온 것과 대조해봤다.
언어영역부터 채점을 시작했다. 45번까지 2문제 밖에 틀리지 않아서 우와~~라고 외쳐대며 기뻐했는데, 끝까지 매겨보니 마지막 신뢰도 지문에서 -4점이 나갔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결국 92점. 원점수로만 보면 나름 괜찮은 점수였지만, 수험장에서의 느낌에 비해서는 점수가 좋지 않았다.
다음으로 수리영역 84점.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내가 2교시 당시에 6문제 정도를 찍었어야 했던 것에 비하면 선방이였다.
다음으로는 외국어 영역 93점. 듣기 3점짜리 문제에 피눈물을 흘렸다. 나머지 문제들은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내 실력부족이였다.
마지막으로 과탐영역. 성적이 기억이 안 난다.... 여튼 그렇게 해서 총점이 442점인가 그랬을 것이다. 총점만 보고 의대는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해 6월 9월이 너무나도 어려웠기 때문에..... 그런데 다음 날 학교에 갔다. 학교에 가니 애들이 참 표정이 가지각색이였다. 웃는 아이, 힘든 아이, 별 감흥 없는 아이말고도 더 있었다. 그렇게 눈으로 아이들의 표정을 구경할 동안, 귀에는 잘친 애들의 소식이 들려왔다. 겉으로는 잘 쳤다고 웃어주었지만... 속으로는 너무나도 쓰렸다. 나는 원래 이런 놈이였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와 함께, 내가 잘 친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뼈저리게 느꼈다. 그렇게 힘들어하면서 잉여생활로 현실 도피를 하다 비정한 그날, 성적표 통지일이 왔다.
백분위로 언수외 물1화1생1화2가 94 92 95 / 96 85 99 96... 등급은 221/1312였다. 외국어 영역이 1등급인데 백분위가 95, 화2 영역은 2등급인데 백분위가 96이라는 것 보고 신기해 한 것 빼고는 별다른 사항이 없었다. 의대갈 성적이 아니라는 것만 다시 느끼면 되는 성적표였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너무나도 낙천적이였던 것 같다. 안될 걸 알면서도 왠지 쓰면 그 학교는 펑크가 나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매일 나를 가지고 놀았다. '그냥 잘 될꺼야...'하는 막연한 생각이 나를 잠식해 갔다.
그렇게 막연히 잘될꺼라는 긍정적 마인드로 가나군 모두 의대를 쓰고 다시 잉여생활로 돌아갔다. 사실, 그 성적으로는 배치표 상으로 연세대 공대도 힘들었고 한양대 공대를 지원했어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내 헛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반드시, 의대를 쓰고 싶었다. 결국, 결과는 3패. 이 때 세상을 배웠다. 사실, 그 전까지는 원하는 대로 세상이 돌아갈 줄 알았다. 그래서 '될대로 되겠지'라는 생각이 항상 나를 지배했다. 그런데, 3패라는 현실은 나를 일깨웠다. '망상은 꾸는게 아니구나.. 냉혹한 현실이라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조금씩 싹텄다. 그 싹은 이제 무럭무럭 자라서 나에게 꿈과 망상을 구분하게 해주는 약이 되고 있다. 참 감사한 일이다.


재수를 결정한 1월.(예비 번호를 보고 이미 포기했기 때문에 빠른 재수 결정이 가능했다.) 개강 날짜 까지는 대략 한 달이 남아있었다. 이 한 달 만큼은 내가 원하는 것들로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결심한게 5년 동안 미뤄둔 '고백'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미친 짓이였다. 재수를 하러 간다는 놈이 이러고나 있었다는게... 그래도 그 때 그 순간 만큼은 정말 하고 싶었다. 그래서 소심하게 크리스마스 날에 편지를 써보기도 했지만, 역시 나는 ASKY였나 보다. 한 번도 그의 얼굴은 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1월에서 2월 사이에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았다. 매일 숨마쿰라우데로 2시간 정도 수학 복습하고 언외에 30분씩만 투자하고, 과탐은 아예 보지도 않았다. 여튼 그렇게 시간은 흘러 갔고, 꿈도 사랑도 이루지 못한 채 겨울의 눈이 어느새 따뜻한 봄햇살에 녹아 내렸고, 초라하게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수능을 망친 고등학생의 졸업식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내가 가고 싶은 대학에 붙은 아이들과 나를 비교하면, 이미 늦어버린 나를 생각하면.... 졸업식은 너무나도 가고 싶지 않은 행사장에 불과했다.(그래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졸업식 때 참가한 건 잘했다고 생각한다. 열폭은 그 순간이지만, 3년의 치열했던 추억의 끝맺음을 제대로 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다. 재수를 결심한 현역들... 반드시 무슨 일은 있어도 졸업식은 가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 막 재수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그 당시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자신과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넌 왜... 재수하는 건데? 이렇게 힘들고 하고 싶지도 않은 걸 왜 해?"
"꿈이 있으니까. 내가 하고 싶지도 않은 걸 평생동안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럼 네 꿈은 뭔데?"
"글쎄......"

답이 없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너무나도 많았다. 펜 하나로 사람들을 웃게, 울게 만들 수 있는 작가가 되고 싶었고, 학생들을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참된 교사도 되고 싶었고, 수학을 계속 공부하는 수학자도 되고 싶었고, 사람들을 살리는 의사도 되고 싶었고, 그 말고도 하고 싶은게 너무나 많았다. 또 다른 기준이 필요했다. 내가 하고 싶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직업은 무엇일까.... 첫째, 가장하고 싶었던 작가는 성공할 확률이 너무나도 희박했고, 내게 그런 재능이 있을지 생각조차 안해본 나에게 그런 모험은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래서 실패해서 주변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짐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싫었다. 그 다음에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교사는 내 자식들을 똑바로 키우고, 주변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금전적 여유가 생기진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포기했다. 다음으로, 수학자를 생각해 보았지만, 이것 또한 작가와 비슷한 생각으로 포기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의사였다. 의사는 사람들을 살리는 보람도 있고, 금전적으로 생각했을 때, 최소한의 마지노선이 다른 직업에 비해 높았다. 최소한 자식들 학비 걱정, 부모님 용돈 걱정은 안 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이 아플 때 병원내의 절차를 좀 더 간단하게 해서 도와줄 수 있다는 것도 정말 나를 끌리게 했다. 그래서, 결국은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에, 한 가지 소원을 더 넣자면 환자들의 몸의 병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병도 치유할 수 있는, 인술을 펼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종합하자면.... "나도 살리고 내 주위의 사람들도 살리고 환자들도 살리는, 인술을 펼치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 너무 세속적이라는 소리를 들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게 내 꿈이 된 이상 후회없이 이 길을 믿고 쭉 나아가고 싶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순간부터, 나는 인생의 방향을 아직도 개략적이지만 전보다는 좀더 구체적으로 잡을 수 있었다. 장래희망이 꿈이 되는 순간이였다. 의사라는 직업이 '장래 희망'이였을 때는 유혹에 쉽게쉽게 넘어갔었지만, '꿈'이라는 존재가 내 가슴에 품게된 순간부터는 유혹을 좀더 절제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꿈을 향한 질주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좀더 쉽게 말하면, 나 자신의 그릇이 좀 더 많은 것들을 품기위해 커지는 순간이였다.


2월 중순에 드디어 학원 개강을 했다. 지방에서 사는 나로서는 서울의 5층짜리 학원이 너무나 신기할 따름이였고, 재수에 대한 부담감보다는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컸다. '여기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 한명도 없는데.... 어떻게 친구들을 사귀어야 하나'와 같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힘들었다. 친구들이, 가족들이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그런데 휴대폰마저도 없애야 했기 때문에 외로움을 달랠 방법마저도 차단 당했다. 아무나 붙들고 미친사람처럼 이야기하고 싶었다. 입이 너무나도 근질근질했다. 그 때, 너무 힘들어서 휴대폰을 끊기전에 어머니에게 하소연했다.

"엄마... 나 여기가 너무 싫어. 여기 있으면 사람이 갑갑해서 죽을 것 같아. 여기 말고.... 내가 아는 친구가 있는 곳에서 재수하면 안될까?...."

라고 설득하고 설득했지만. 아버지의 반대가 너무나도 완강하셨다. 이것도 못할 것 같으면, 나중에 더 큰 시련들이 기다리고 있을텐데, 그땐 어떻게 할꺼냐고... 이런 환경에서도 힘들다고 징징댈 것 같으면 그냥 인생을 포기하라고....말씀하셨다. 지금은 아버지의 충고에 감사하지만, 그 순간의 나로서는 아버지가 그렇게 원망스럽고 야속할 수가 없었다. '인생을 포기하라'라는 말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나는 인생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다른사람들에게도 인생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인생에 '꿈'이 포함되어 있었다. 만약, 이 꿈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꿋꿋히 의견을 개진시켜나가며 학원을 친구가 다니던 학원으로 갈아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꿈이 있었기 때문에 그 학원을 계속 다녀야 했다. 그렇다고 힘든 현실이 바뀌는 건 아니였다. 오히려 그 이후로 2주동안은 이제까지 겪은 고생중에 가장 힘들었던 고생으로 내 머릿속에 박혀있다. 오죽했으면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라지도 않으니, 미워할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을까. 그 2주가 내 주변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힘들었던 2주가 가고... 이제 나름 친구들도 생기고 학습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완성되었다. 공부를 제대로 시작하겠다고 마음을 먹자,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수능 실패 원인'이였다. 내가 왜 수능을 망쳤을까... 어떻게 3학년 때 본 모의고사 중에서 최악으로 친 모의고사보다도 못칠 수가 있을까.. 하며 자신을 자책하며 원인을 찾아갔다. 고민을 해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었다.

1. 자만 - 학업성취도가 그렇게 높지 않은 지역에서 살다보니, 평상시의 성적이 지방의대도 간당간당할 전국 1%에 해당하는 성적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교에서 최상위권 축에 들수 있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보면 매우 좋은 성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는 잘한다는 소리만 들었다. 항상 겸손하는 척 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자만에 가득차 있었다. 그렇게 살다보니 어느샌가 '문제를 무시하는 경지까지 오르게 되었다. 모의고사에서든 일반 문제집에서든 틀렸으면, 왜 틀렸는지, 어디가 부족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냥 '실수겠지~ 나중엔 맞을거야'하는 생각에 똑바로 오답을 체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실수의 빈도는 점점 늘어나게 되었고, 이는 수리영역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게 되어서, 내 고3 수리영역의 몰락기를 데려왔다.
2. 양치기에 치우친 학습 - 나는 항상 양을 중시해왔다. '무엇을 어느정도로 공부했느냐'보다는 '얼마나 공부했느냐'에 중점을 두는 스타일이였다. 이는 3등급 정도였던 내 수리영역과 매우 저조했던 과탐영역을 2등급까지 끌어올리는데에는 기여를 했지만. 그 뿐이였다. 운이 좋아 1등급을 맞게 되는, 그런 실력까지였지, '부동의 1등급' 이런 경지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3. 개념 부족 - 2번과 어찌보면 비슷한 맥락이다. 양치기에 집중하다보니, 어느샌가 문제풀이만 하게 되었고, 이는 개념을 등한시하게 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다. 이는 '수리영역'과 '과탐'영역에 치명적인 결과를 끼쳤다.

이렇게 3가지 요인을 강제재수의 원인으로 잡은 나는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먼저, '자만'의 해결책으로는, 뻔한 답이지만 '모든 문제에 겸손하자'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두번째로 '양치기에 치우친 학습'의 해결책으로는 '공부의 질을 중시하는, 예를 들자면 문제 하나하나를 풀더라도 꼼꼼히 보며 해설지를 볼때도 꼼꼼히 보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가지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념 부족'은 '개념서를 항상 끼고 공부하는 습관'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이 세가지 해결책은 내 재수 생활의 좌우명이나 다름없었다. 재수하려고 하는 학생들도 '실수'라고 합리화 하지말고, 냉혹한 현실을 자각하고 그 실패에 대한 요인들을 제거해나가는 것을 재수 생활의 목표로 삼았으면 한다.


고독이라는 맨땅에 헤딩을 해서 이마가 한참 얼얼할 무렵, 슬슬 학원 생활도 적응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얼굴도 점점 익숙해 갔고, 없던 말주변도 생겨서 어색하게나마 인간관계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제 인간관계가 진정되어가자,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
방황기를 끝내고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있는 재수생활은 내 고등학교 3년과는 차이가 있어야 했다. 그래야 내 재수 때의 수능 성적과 현역 때의 수능 성적이 다를 수 있으니까. 뭔가 달라진 나를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가슴 속에 지니고 있는 것이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꿈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 단계의 첫번째는 다름아닌 '수업 잘 듣기'였다. 내 3년 동안의 고등학교 생활은 대학수업이나 다름없었다. 마음에 안들면 뒷자리에 앉아서 다른 과목을 공부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로 듣는 수업들은 한 학기동안 '2~3개'에 불과했다. 나는 그렇게 과목을 취사선택하여 공부하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여겼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의 허세끼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너희들과는 다르게 수업도 골라 듣는다~'이런 식의 유치한 자부심 같은 것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쪽팔리는 일이다. 여튼 그때는 그러한 공부 방식이 좋은 줄 알았는데.... 막상 재수하면서 '나름대로' 나를 "객관화"시켜보니 상당한 단점들이 눈에 보였다. 그 단점들은 다음과 같다.

1. 공부의 불균형
수업을 취사 선택하다보면 자연히 자습시간이 느는데, 그 시간을 죄다 수학에다 투자했다. 그러다보니 수학을 편식하게 되었고, 이는 공부양의 과목간 불균형을 불러와서 자연스레 언외탐, 특히나 탐구영역은 빈약하게 될 수 밖에 없었다.(사실 이 수학에 투자한 것도 지나친 양치기로 인해서 시간당 실질 공부량은 0에 수렴했다... 뭐든지 '적당히' 공부 해주는게 좋은 듯 하다. 실질 공부량의 그래프는 대충 그리면 y=루트x의 그래프와 비슷하게 되는데, 이를 생각하면 지나치게 하나에만 투자하는 것 보다는, 적당히 여러 과목에 시간을 분배하는게 각기 효율을 극대화 키는게 바람직한 것 같다.)
2. 복습의 부재
이는 어찌보면 핑계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선생님들의 수업을 무시하다보니, 독학을 많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독학할 때는 선생님들의 수업을 들을때와는 달리 "복습"할 때(예를 들어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다면 선생님의 수업을 들은 야자시간)를 찾지를 못하게 된다. 독학하면 어디서 진도를 끊고 다시 되돌아가야 할지 감이 안 잡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되돌아가자니 너무 복습의 양이 적은것 같고.. 그래서 진도를 더 나가다 보면 복습의 양이 감당할 정도를 벗어나게되어 복습을 포기하고. 그래서 내 생각으로는 수업을 듣는 것이 수업을 듣지 않는 것보다 복습의 측면에서 더 바람직한 듯 하다.
3. 약점체크 시간의 부재
이는 상위권에서 최상위권으로 올라가는 학생들 이상의 향하는 학생들에게 비교적 많이 해당될거라 생각된다. 이 학생들 같은 경우에는 그 과목에 대한 자신감이 어느정도는 있겠지만 자신의 약점들을 똑바로 체크하지 못한다. 물론 이는 모든 학생들에게 해당하는 항목이겠지만 특히나 이럴 때는 공부의 빈틈을 찾기 힘들고, 문제 풀이때도 타성에 젖어서 풀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수준의 학생들보다는 약점을 찾는 것이 힘들다. 이때, 사실상 공부의 목적은 '실력 향상'이 아니라 '실력 유지'가 되어버린다. 이렇게 되지 않을려면 무협 소설들 처럼 절정고수가 되는 순간의 '깨달음'과 같은 비슷한 개념이 필요한데, 이를 체득하는 방법은은 아무래도 학생 자신들이 혼자 찾기보다는, 선생님들의 수업을 듣다가 하나를 건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고3시절의 국어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신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선생님들 수업에서 1교시에 아는 9개를 듣다가 모르는 1개를 알면 그 수업은 건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맞는 말씀인 것 같다.
여기서 2번 같은 경우에는 나의 경우에만 해당 될 수도 있지만 1,3번의 경우에는 많은 학생들이 해당될거라 생각한다. 좀 참고하셔서 공부할 때 왠만하면 선생님들의 수업을 들어주셨으면 한다.(죄송하지만 고백을 하자면 말만 이렇게 하고 재수할때도 물리 선생님은 좀 아니신것 같아 재수 중반·부터 듣지 않았습니다;;.. 할 말이 없네요....;; 그냥 자신만의 기준, '2교시에 약점 하나만 건지면 이 수업은 성공!'와 같은 기준을 두셔서 수업을 고르시는 것이 나으실 듯 합니다.)

이런 3가지를 고려하여 공부법을 바꿔가자, 공부의 초점을 독학에서 수업으로 차차 옮겨갔고, 이제 복습에도 점점 비중을 두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재수 시작했을 때부터 이 시기가 오기 전까지는 후회가 없었고, 이는 다른 재수생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는 나도 다른 이들과 차이가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여기까지만 수기라고 생각하고 이 이후로는 실패기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6월 모의고사를 쳤다. 별로 긴장은 되지 않았다. 작년에 이미 겪어봤기 때문이다. 모의평가와 수능과의 괴리감을.... 그래서 사설 모의고사 치는 마인드로 시험을 치렀다. 문제는 그냥 평이했다. 언수외 합 292. 채점하고 “대박이다~ 올레!~~”이러면서 씩 웃었지만... 막상 성적표를 까고 나니 0.2~0.3%. 소위 말하는 메이저 의대에는 원서조차 못 써볼 성적이였다. 그런데 그 성적에는 함정이 하나 있었는데.. 이는 다름아닌 백분위와 등급으로 인한 성적 착시효과였다. 98 99 99 / 100 99 98 98이였고 등급은 111/1111이였다. 이런 성적은 고3 4월달 모의고사 이후로는 처음이였고, 특히나 올1은 처음이였다. 그 덕에 조금 헤이해지게 되었다. 굳이 풀어 말하자면

“재수하니까 성적이 오르네? 작년 수능은 의대 광탈 수준이였는데... 벌써 이 정도면 수능 때는 0.1%안이 가능하겠지?”
라는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고도 썩어빠진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 이 때를 기점으로 해서 망하는 재수생들이 나 말고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재수를 하는 학생들은, 특히나 6월달 모의고사를 잘 친 학생들은, 6월달까지도 충분히 노력했겠지만, 그 이후로 더 노력을 해야 한다. 학원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6월 모의고사는 잘 친 학생한테도 문제가 되고, 못 본 학생들한테도 문제가 된다. 잘 친 학생들은 6월 모의고사 이후로 자만할 가능성이 크고, 못 본 학생들은 그 이후로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6월 모의고사 이후로 더욱 조심해야한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생각하면 재수 중반에 가장 와닿았어야 했을 말이 아닐까 싶다.

내게 재수 때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돌아가서 시작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 때를 택할 것이다. 그 때 전에는 후회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는 후회와 실망이 가득찬 시기뿐이니까.



사실 그 이후로는 늘 같은 생활이였다. 하루하루마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방황의 빈도, 혹은 정도의 차이였을 것이다. 어제 1시간을 놀았다면, 오늘은 1시간 5분을 놀고... 늘 그런식이였다. ‘저번에도 그렇게 놀았으니까.....’하고 웃기지도 않게 자기 합리화를 해대고 항상 지켜오던 생활리듬 마저도 깨졌다. 정말 가장 후회되는 것이 이 생활리듬 문제다. 앞에서 언급을 하는 것을 깜빡했는데, 생활리듬의 문제도 내가 생각한 재수실패 요인에 들어갔다. 난 고등학교 3년 내내 낮에 잠이 오면 자는 스타일이였다. 그래서 매일 오전 1시부터 6시까지 잠을 자서, 학교에서 쉬는 시간 10분씩을 2~3번 해서 잠을 보충하는 그런 스타일이였다. 사실, 잠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이는 정말 효율적인 잠의 스타일이다. 잠.의. 효율에서만 본다면.... 그런데 정신상태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스타일은 정말 비효율적이다. 다름이 아니라 ‘복불복 낮잠’ 때문이다. 낮잠을 잔 후의 정신 상태는 개인적으로 2개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멍~’, ‘반짝’. 이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반짝’의 경우는 정말 좋다. 잠을 자고나니까 상당히 기분이 상쾌한 경우로, 공부를 10분을 하더라도 다른 상태보다 거의 1.5배의 효율을 지닐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아주 바람직한 낮잠이지만, 반전이 있다. 이는 ‘멍~’ 상태인데... 이 상태는 10분이 아니라 심하면 1시간 까지도 날려버린다. 이 상태에 걸린 사람은 보통 잠을 자는 상태도 아니고, 완전히 깨어있는 상태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상태가 되어서 공부효율이 땅을 긴다. 이 상태가 안 걸리는 사람들은 낮잠을 강추한다.(물론 수능 2달 정도 전까지만... D-60부터는 몸 관리를 하셔야죠 ^^) 그런데, 이 ‘멍~’상태가 걸리는 사람들은 정말 낮잠을 비추천해주고 싶다. 차라리 잠을 7시간을 자더라도 낮잠은 안 잤으면 한다.
이렇게 낮잠에 대한 나름의 고찰(???)을 끝낸 나는 재수 때, 낮잠을 자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고, 그래서 9월달 전까지는 학원 책상위에 누운 적이 10번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9월달 이후로는 완전히 생활리듬이 망가져서, 10월달 쯤이 되자... 심지어 새벽 4시까지 혼자 방에서 노느라 밤을 새고..4시가 되면 잠을 자서 7시에 일어나고, 부족한 잠을 학원에서 보충하게 되었고... 그 덕에 10월달 초까지는 책상은 내 배게가 되었다.



10월 중반까지의 나는 슬럼프였고, 좀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자기관리가 전혀 안되는 상태였다. 항상 우울하지만 빠져 나올 수 없는 악순환에 빠진 상태였고.... 도저히 탈출 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과 통화를 할 일이 생겼다.

"아들아, 공부가 잘되가니?"
"(뜨끔) 응..... 그냥 그럭저럭....."
"그래.... 아들아 믿는거 알지? 지금까지 잘해왔고,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마지막 까지 힘내구 파이팅!"

분명 대화는 이것보다 길었다. 그런데 이것밖에 기억에 안 남는다. 이 때가. 한 없이 추락하던 나를 위한 구명밧줄이였던 것 같다. 이때 이후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제까지 날 믿어주시는, 아니 이후에도 쭉 믿어주시는 부모님과 동생을 배신하기는 싫었다.
이렇게 망가지는 나를 그래도 믿어주는 분들을 나보다 먼저 떠나보내기는 싫었다. 반드시 지키고 싶었다.

다시 내가 내 꿈을 원하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솔직히..... 의사가 되고싶은 이유는 금전적인 이유, 그런게 아니였고, 단지 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가장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는 직업이 의사였기 때문이다. 주위에 가족들이 아프다면, 미약하게나마 상담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의사 친구들에게 좀 부탁한다면 의사 인맥이 없는 사람들보다는 나은 환경에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내가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좀 이기적이고 싶다.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다.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내 생활패턴도 다시 안정되어갔다. 잠이오면 항상 뻗곤하던 내가 재수 초기의 모습으로, 안 졸려고 악을 쓰고 잠에게 덤벼들었다. 돌아갔다. 한 순간에 사람을 이렇게 바꿀 수 있다니....지금 생각해보면 꿈은 계속 안전히 품을 수 있는 심장만 있다면 정말 무궁무진한 힘을 지닌 것 같다.



잠깐 논지에서 이탈을 할까 한다. 꿈과 장래희망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장래희망 : 의사가 되고 싶다.

꿈 : 내가 지켜주고 싶은 사람들이 나를 부를 때, 언제든지 달려갈 수 있는 의사,
육체적 질병말고도, 정신적 질병까지도 치료할 수 있는 심의,
환자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의사가 되고싶다.

이렇게 막상 써보니... 어떤 책에서 "꿈은 최대한 구체적으로 잡아라"라고 말했던 것과 별반 다른게 없다. 여튼..... 어떤 것을 생각하면 구체적인 장면이 떠오르고, 가슴이 벅찬다? 이 대답에 Yes라면 그건 100% 꿈이다. 그 꿈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11월이다. 학원 종강을 했다. 뭔가 씁쓸했다. 그렇게 어서 나오고 싶어했던 학원이였는데... 막상 나가려니까 6월부터 방황했던 내가 생각나서.... 창피해서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그래도 발을 이끌고 나가야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나에게도 수능은 불가항력이였다. 친구들과 종강파티 비슷하게 단촐하게 아웃백을 갔다. 그 중에 어색한 친구들도 많았다. 내가 꼴에 공부한답시고 친구들을 몇몇 안 사귀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나 싶다. 그렇게 방황할 때, 차라리 친구들과 허심탄회하게, 가식없이 얘기를 나누었더라면... 지금의 나 정도는 아니지 아니였을까 후회가 되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후회는 항상 늦는 것 같다. 여튼 내 재수 베프친구들과 재미있게 밥을 먹었다. 선생님 뒷담화도 하고.. 역시 재수생활의 재미는 학원 선생님들 까는 얘기가 제 맛인것 같다....;;;;(선생님들 죄송합니다 ㅠㅠ 그냥 재미있었어요.....;;)
그렇게 서울 상경기가 끝이 났고, 고향으로 왔다. 집에 오자마자 그토록 보고싶은 가족들과, 재수하던 친구들을 만났다. 끽해야 5시간이였지만... 회포를 잠깐이나마 풀었다.아마 G20이였나? 이 놈때문에 빼빼로데이에서 7일 미뤄졌었다. 재수친구들은 G20을 욕했지만...그동안 계속 방황하던 나에게는 정말 고마운 시간이였다. 정말 알차게 써야했다. 좋지도 않은 집안형편에 삼수를 한답시고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삼수를 한다고 다시 방황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언제 다시 꿈이 가출할지.. 불안했다. 이번 막판에 올인해야했다.
재수하는 친구들과 도서관을 갔다. 정말 그때만큼 즐겁게 공부한 적은 없었다.

그땐
내겐 꿈이 있었고
주위엔 친구들이 있었고
집에 가면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으니까.
정말 행복했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공부를 하고나서 밥시간에 친구들과 나누는 입담은 최고의 반찬이였다. 매일 하루하루가 감사한 하루였다.

아... 이때부터(약 수능 2주 전) 수능을 철저히 기출문제로 공략했다. 작년에 수능에 실패한 이유 중에 하나가 '막판까지 질적인 공부를 안하고 넘기는 모의고사를 푸는 식으로
공부를 했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언어영역부터 이야기하면, '철저한 기출분석+감 유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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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마무리 중입니다 ㅠㅠ 최대한 빨리 마무리 하려 노력하겠습니다~ 치열한 하루 되세요 ^^ 저처럼 후회하시지 마시구요 ㅠㅠ(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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