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움 [492552] · MS 2014 (수정됨) · 쪽지

2017-01-24 03: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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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하고 포기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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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재수할때 한창 들어오던 오르비, 삼수때부터는 제 자신이 너무 쓰레기같이 느껴지게 하는거같아서 잘 안오다가..오랜만에 왔네요. 입시 포기하니까 들어오게되는....ㅋㅋ

정시결과 발표시즌에, 사수...인지 오수인지 감도 안잡히는 정신머리로 남들 합격수기 보다가 그냥 허탈해서 글씁니다. 제 이야기 다 쓰는거라 길어요. 그래도 한번 읽어주시면 감사할거같습니당.


초딩때부터 꿈이 의사였어요. 이유야 뭐, 한번쯤은 다 생각해봤을 이유죠. 제가 많이 아팠었고(심장 판막에 약간 이상이 있었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친할머니도 평생 제 이름 한번 제대로 불러주지 못했을만큼 힘들어하시는걸 보면서 '나 치료해준 의사쌤이 되서, 할머니같은 사람들 낫게해줘야지!' 라는거요. 그게 시작이었고, 24살인 지금까지도 그건 제 꿈을 향한 도전의 근원이 되어주었습니다.

그 어리숙한 다짐 하나로 공부해왔어요. 의대 가려면 공부 잘해야한단 말에 초딩때도 한문제 틀리면 울었으니까요. 중학생때는 국비로 장학생도 돼보고, 고등학생 때는 고대 학추도 받고싶으면 말하라고 하더라고요. 내신이 진짜 딱전교 2등이었습니다ㅋㅋㅋ근데 모의고사가 안나왔어요. 국어랑 영어는 항상 100점을 찍어도, 수학은 3등급이었죠. 내신은 잘 풀지만 수능스타일이 아니었어요. 과탐도 그때 화1화2생1 선택했었는데 각각 1 2 3등급정도구요. 중딩때 화학올림피아드 은상도 탔으니 화학 열심히 하면 오겠지 싶었습니다.그상태로 수능보고 수리 5등급 나왔습니다. 수리 풀다가 망삘이 오니 영어 과탐 전부 말리더군요. 지방 의대 1차 붙어서 최저맞추면 되는게 있었는데 당연히 탈락이죠.

 재수했습니다. 의대는 가고싶지만 갈 대학이 없으니까요.

강남종로에서 했는데...수학이 좀처럼 오르질 않았어요. 사실 그렇게 열심히 살지 않았거든요. 그 당시에는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의 수험생활에 비춰보면 시간을 버렸더라고요. 수능에서 132243...ㅋ(과탐이 정확하진 않아요. 하도 옛날이라.그때 아마 과탐이 3개였던거같은데..화1화2가 지옥불이었죠..??) 또 의대는 개뿔이죠. 대학도 뭐 국민대정도 얘기했던거같은데, 무슨 자존심인지 갑자기 내신이 아까워지면서다시 삼수하러갔어요. 더 솔직하자면, 같이 공부하던 친구가 설의가서 오기도 났던거같아요. 같이 장학금받으며 공부했는데 왜 쟤는 되고 나는 안되나, 그런 질투..

 이번엔 강북 어딘가에있는 메가스터디로 갑니다. 열심히 했어요. 진짜 하루하루 지옥처럼 공부했죠. 지금 생각해도 그때 참 치열했다 싶어요. 주변 애들과 말한마디 안하고, 혼자 화장실에서 울고 셔틀에서 울다가 졸다가 그렇게 살았어요. 그렇게 답없던 수리가 올랐어요. 처음으로 모의고사 100점도 맞아보고, 이해원모의고사도 사보고..과탐이 2개로 바꼈던 해같은데, 결과는 12221..화2는 모의고사가 안오르길래 화1생1으로 했구요. 뭐 여튼 그때, 정말 더이상 공부할 힘이 없었어요. 의대는 죽도록 가고싶었지만 또 학원 들어가기가 무서울정도로 겁이났고, 내 자신이 싫었고, 부모님께 죄송했고..성적이 나쁘니 내 노력을 모두 쓰레기취급하는 부모님이 미울때도 있었지만 그런 감정조차도 사치라고 느껴질정도였어요.

성적 맞춰 대학교 갔습니다. 원서영역도 망한건지 뭔진 모르지만 중대 공대 갔어요. 수시로는 전부 의대써놔서 정시로는 저게 최선이었던거 같기도 하고...

저땐 오직 의대만 목표여서 치대나 한의대, 편입이나 의전은 생각도 안해봤죠. 저 점수로 치대는 가능했을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ㅎㅎ

학교 다니는데, 재미도 열정도 없더군요. 길가다 흰 가운입은 의대생 보면 눈물이 나고, 지하철에서 가톨릭대 의대생들 엠티가는거 보다가 역에서 내려서 화장실로 뛰어가 통곡하고. 지하철이 지나가는걸 보면 뛰어내리고싶어서 선을 넘어가다가 옆사람이 가방을 당기고, 햇빛에 내가 비춰지는게 싫었고, 수능 후에 자해했던 곳을 더 후벼파고 싶어지는 그런 기분.

집에서 펑펑 울며 말하니 휴학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메가스터디로 다시 갔어요. (어마어마한 부자가 아님에도 딸년 죽을거같아 몇번이고 공부시킨 부모님께 이자리를 빌어 감사를...ㅎ)

공부가 재밌더라구요. 신났어요. 틀리는게 없으니까, 대학 다니다 왔어도 학원성적장학금 타니까 행복했죠. 학원에서는 기대주다 뭐다 얘기가 나오고..저도 자신이 있었고요. 근데 수능 봤더니 12214 나오더라고요. 수학 92점이었는데 2등급떴고, 이때 화1생1 봤는데 생1이...영어는 왜 매년 수능에서 2등급밖에 안뜨는지 고민하다가 어이가 없었고요. 22살 겨울도 그렇게, 중대로의 복학만이 남게되었죠. 이쯤 되니 부모님도 포기하시더라고요. 넌 안되는 애라고, 돈낭비 이제 안한다고.

그렇게 23살이 되었는데, 미련한건지 집착인건지 의대는 가고싶었어요. 여전히 어린시절의 다짐이 또렷했고, 친척들 보기 쪽팔린것도 있었고, 의대 말고 다른 길은 찾아본 적도 없었으니 겁도 났고요.

복학은 2학기여서, 1학기때는 학원아르바이트와 수능공부를 병행했습니다. 수능은 망쳤지만 재수학원에서 애들 질문받아주는 데는 문제가 없더라고요..?수학이든 과탐이든 다 답해줬어요. 근데 그러다보니 어이가 없더라고요. 실력이 없는것도 아닌거같은데(건방진 생각인거 압니다만 그당시엔 좀 속상해서...) 왜 수능은 망치는건지, 답답하고 화가나고...진짜 열심히 했는데 제기랄 뭐 그런 생각도 들었구요. 

그러다 2학기에 복학했고, 사실 아무도 모르게 수능 접수를 했어요. 목요일 수업이 교양 하나인지라 째고 수험장 갔죠. 틈틈이 이비에스로 한국사도 보고, 오르비 봉투 모의고사랑 고난이도 문제들도 풀어보면서..

수능은....21114떴습니다. 한국사는 1이고요...ㅋㅋ근데 5번의 수능 만에 국어가 2로 떨어졌더라구요. 지하철에서 확인하고 그대로 내려서 화장실 갈 새도 없이 승강장에서 펑펑 울었어요. 수학영어 올라서, 국어만 평소대로 1 떴으면 전 의대 갔겠죠. 이번에도 1차 통과한 의대들 몇개있었거든요.지금까지 입결로만 보면 무조건 최초합인 곳도 있었는데...쳇

여튼, 정시도 써보긴 했는데 벌써 하나는 탈락했고 두개 남았는데, 어차피 안될걸 알기에 마음이 편하네요...아이 편하다.....ㅎㅎ


수능 5년 하는동안 남은건 초췌한 제 모습과 땅에 떨어진 자존감, 자해 흉터와 중대 헌내기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친구들 연락도 다 끊고 공부했어서 주위에 친구도 없고..고딩때 애들은 제가 의대 목표했던거 알아서 만나기 부끄럽기도 하고..(저 알아보는 동기 있을수도 있을듯..?있으면 모른척 부탁합니당)지친 정신상태도 있네요. 더이상은 수능 공부 뭣같아서 못하겠다 싶은 마음이요. 여자라 망정이지 남자였음 군대 어쩔뻔했나 몰라요ㅋㅋㅋ

근데 계속된 실패를 겪으면서 생긴 가장 큰 문제는, 난 뭘 해도 안될 애야 라는 허무함입니다. 솔직히 진짜 자신 없거든요. 취직이건 뭐건 그냥 다 도망치고싶어요. 의대 하나 보고 달려왔는데, 15년 가까이 품어온 꿈의 결말이 포기와 좌절이란게 참 힘들더라구요.아직도 혼자 있으면 가끔 울어요. 현실이고,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그래서 단념하려고 노력하는데 쉽진 않네요. 참 멍청하다는게 여기서도 티가 나요. 그쵸?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보다가 아빠가 무심코 "너도 저렇게 되길 바랬는데..너 흉부외과 가고싶어했잖아"라고 하신 말씀에 눈치없이 울어버렸습니다. 말없이 토닥여주던 아빠께 "의료기기 만드는 방향으로 진로를 잡아서라도 의학쪽에 붙어있고싶다" 라고 말씀드렸을때,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시던 그 마음이 어땠을지 사실 상상이 잘 안됩니다. 그냥 제 자신이 죄인같고 그래요. 죄인은 죄인이죠 뭐..태어난거부터가 잘못인건가 수없이 생각하니까. 나름의 어려움은 있었겠지만 엘리트코스 착착 밟아 포스텍 붙은 동생에 비해 전 참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든요.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하는건 아는데 어렵네요. 음...아마 당장 고치기는 어렵겠죠?


의대, 의사라는 단어는 아직도 제게 가슴 두근거리는 단어에요. 국경없는 의사회 들어가서 오지도 가고싶었고, 정말 좋은 의사가 되서 사람들을 만나고도 싶었는데 할수 없게 되어서 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작년까지와 약간 다른게 있다면 정말정말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수능이고 입시고 ×까 라는 느낌이라는거?

입시판에서 경력이 굵직하신 분들이 보신다면 우습고 어리석은 소리일테고, 실제로 5년 해도 의대 못간거 보면 멍청한게 맞을수도 있겠죠. 뭐가 문제여서 수능만 가면 죽쑤고 오는지 아직도 모르겠거든요. 올해는 분석도 잘 안해봤지만ㅎㅎ


지금 제 마음이 어떤건지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의대가 여전히 가고싶긴 하지만 수능을 다시 겪기에는 지쳤고, 공대생으로 살기에는 이제 뭘 해야하는지 잘 모르겠는 그런 상태거든요. 뭐 당장 정시 불합격 글자 보고서도 눈물이 안나는건...익숙해진건지 진짜 마음 접은건지.


쓰다보니 글이 좀..뭔가 목적도 없는 그런 글이 되버렸네요ㅋㅋㅋㅋ현재는 수능 생각이 전혀 없지만 또 내년 이맘때쯤 들어와서 좋은 소식 전하고있으면....어....나이가 너무 많은거 아닌가.....

여튼 5년동안 공부는 실컷, 정말 토하다가 병원 실려갈만큼 열심히 해봐서 후회는 없습니다. 결과는 불만이지만, 적어도 과정에서만큼은 당당하기에 그렇네요. 여전히 미스테리인건 모의고사와 수능 점수의 갭...??ㅋㅋㅋㅋ


혼자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많았어요. 여전히 낮은 자존감이지만 이걸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도 최근에 잡았네요. 좀 더 성숙해지고 나잇값 하게 될 계기로 삼아야겠죠. 

요즘 제가 조금씩 의대에 대한 미련을 지워가고있는걸 부모님이 아셨는지, 일본으로 여행을 다녀오자고 하셨어요. 제가 재수 시작한 이후로 단 한번도 어디 여행가자는 말씀을 안하셨는데 말이죠. 조용한 시골마을도 갔다가, 시내 한복판도 구경하면서 제가 굉장히 좁은 틀에 갖혀있다는걸 실감했어요. 몇년간 수능만 보고 학원에 갖혀살아 그런가, 좀 충격도 받았네요. 다녀온 이후 제 새로운 진로 방향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못한 경험들도 다 해보기 위해 동아리와 교환학생 등등도 알아보고있구요. 이것도 나름 재밌고 기대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고있어요. 여전히 새로운 시도가 두렵고 겁나지만, 적어도 도전해볼 마음이 생겼다는 것에 의의를 두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제 미래도 조금씩 색깔을 찾아나갈거라는 희망을 품고싶어요.


몇년 후에, 아니면 당장 내년에라도, 제가 여기에 또 와서 좋은 소식을 적고 있으면 좋겠어요. 또 중간에 삘꽂혀서 수능을 봤건, 아니면 학교생활이 즐겁고 행복해죽겠다는 내용이건간에...

아, 당장 좋은 소식이라면 제가 학교 다닌 두 학기 평점이 4.4라는거죠!!ㅋㅋㅋㅋ1학년이라 쉬운거긴 하지만, 이런거라도 자랑할 수 있다고 해주세요ㅋ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모두 희망찬 하루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수능 패배자라고 5년간 땅굴 파던 제가, 인생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기어나올만큼 좋은 나날이니!여러분도 모두 힘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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