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생의 수능경험담.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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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를 다 끝내놨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내 수험표는 눈에 띌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었던 사실은 그날 잠을 설쳐 어쩔 수 없이 일찍 일어났다는 것과 시험장에서 수험표를 재발급 해준다는 사실이었다. 서랍을 뒤적이며 수능 원서사진을 찾았다. 다행히도 수험표와는 달리 내 사진은 제자리에 묵직하게도 앉아있었다. 그 잔망스럽던 증명사진의 표정이 그렇게도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엄마랑 아빠한테는 아무일 없는척 하고 일찍 집을 나섰다. 목이 타고 심장이 요동 쳤다. 분명 다시 발급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도 진정할 수 없었다. 수능 1주일 전까지 나는 실전에 강한 편이라며 전혀 긴장하지 않을거라고 호언장담하던 내가 생각났다. 같잖기 짝이없다. 이틀전부터 잠도 설친주제에 실전에 강한편은 무슨. 급기야 머리까지 아파온다. 3일째 제대로 잠을 못잤으니 당연한 결과였으리라.
수능장에 도착했다. 작년에 내가 서있었던 응원자리에는 지금 우리학교 1,2학년들과 다른 학교 학생들이 서있었다. 응원을 받을 겨를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아니었다. 고개를 푹숙인채 정문으로 뒤쳐들어갔다. 가슴은 내가 도둑이라도 된양 미친듯이 갈비뼈를 두드리며 힐난했다. 시팔 좀 작작 뛰어라 제발. 복도를 빠르게 걸어다니며 선생님처럼 생긴 사람들마다 어디서 재발급 받을지 물어봤다. 저 선생님한테 가봐요. 2층 올라가봐요. 어 그거 1층에서 해줄텐데. 우리나라 정보 전달 체계가 이렇게 후질 수 있구나 싶었다. 이름도 모르는 교육부 장관부터 대통령까지 씹으며 걸었다. 죽을 맛이었다.
"사진"
"네?"
"증명사진 없어요?"
증명사진을 요구하는 여선생님의 눈빛은 짜증이 가득섞인 눈빛이었다. 수험장에 온 고3에게 보낼만한 눈빛이냐고 화를 내고 싶었고, 잃어버린건 내탓이 아니라고 하소연을 하고싶었지만, 내탓이 맞았고 고3인것도 내몫이었다. 허겁지겁 주머니를 뒤져가며 증명사진을 꺼내어 건넸다. 도장이 찍히고 풀, 가위를 찾는 선생님들의 대화가 네댓번 오가고, 가위질 소리, 풀을 붙이는 손놀림 끝에 나는 간신히 수험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손목에 찬 시계가 보여주는 입실 시간까지는 30분이나 남아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는건 소설속 관용어구 쯤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직접 경험해보니 이건 리얼이었구나 싶었다. 3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다리 근육의 atp를 몽땅 소모해버리기 충분한 고문이었다. 여전히 심장은 왼쪽 오른쪽 고막을 번갈아가며 난타를 쳐댔다. 심장소리는 작아지기는 커녕 크레센도를 달리는듯 했다. 머리는 여전히 아프고 눈은 더욱 피곤했다.
터벅 터벅 걸으며 내 교실을 찾아다녔다. 찾아간 교실은 넓직하고 따땃 했으며 재수생으로 보이시는 형들이 종이 뭉치를 들고 스퍼트를 달리고 있었다. 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각을 하면 시험칠때 쓸 정신력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고 여기서 더 이상 피곤한 상황은 상상도 하고싶지 않았다.
앉아서 10분 20분을 비문학 지문을 읽으며 기다리자 같은 반 친구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친근한 얼굴들이 보이자 조금씩 안심이 됐다. 여전히 떨렸지만 심장의 bpm은 조금씩 느려지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농담을 던져가며 긴장을 숨겼다. 피곤함과 두통에서 오는 불안감을 애써 무시해가며 웃었다.
입실시간과 감독의 설명과 주의사항이 끝난 후의 공백은 1분이 하루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빨리 시작하길 바랬다. 잠시 멈춰둔 시곗 바늘은 십몇분째 같은 시간만을 가르키고 있었다. 피곤함과 긴장감에 토악질을 해버릴 것만 같았다. 연거푸 그 뜨거운 물을 홀짝댔다. 긴장감은 가시질 않았다.
종이쳤다.
시계를 돌리고, 페이지를 넘겼다. 국어 지문이 보였다. 글을 읽는지 그림을 보는지 문제를 푸는지 뭘하는지도 모르게 손과 눈을 움직였다. 꽤 열심히 하는 느낌이들어 기분이 좋았던것 같았다. 문학 문제 8문제를 남기고 5분 남았다는 감독관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시간이 그렇게 빨리갈리 없었다. 그럴리 없는데 하면서도 손은 맨 뒷페이지를 향했다. 지문을 대충 읽고 문제를 읽고 답이라고 생각되는 선지만 마킹하는데 2분, 나머지 문제를 마킹하는데 2분. 풀지 못한 네문제를 찍는데 1분.
최악.
내 19년이 한순간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6월 9월 중에서 시간이 모자랐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10월 마지막 시험은 그렇게 잘봐놓고 이게 뭐하는 짓이지.
씨발.
시험이 끝난후 내가 뱉었던 첫단말마였다.
주변에서 이곳저곳 몰려들며 문제가 어땠다느니, 답을 맞춰보는 소리가 들렸다. 남은 과목이 4개 씩이나 됐다. 좌절같은데에 정신을 낭비할게 아니었다. 또다시 친구들과 떠들며 시덥지 않은 농담. 불안을 감추는 웃음. 수학시간은 곧 찾아왔다.
사실. 충분히 예측할만한 결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예민해진 내 정신에 잠자리가 그렇게 불편했으리라고 생각 못한 내 잘못이었고, 미칠 것같은 신경통에 어깨가 까딱하지도 못할만큼 아플거라는 것도 미리 대비를 했었어야 했다. 그런 컨디션에도 문제를 풀 수 있을 그런 실력을 키워 놨어야 했다. 난 그만큼 노력하지 않았고, 이번 수능은 물수능일거야 라며 희희낙락 했다. 내가 선택한 결과였고, 그에따른 타당한 결말이었다. 인과 관계는 확실했다. 컨디션을 탓할게 아니었다.
그렇게 자신있던 수학을 30번을 못푼채 남겨두며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나보다 아래라고 생각했던 친구가 30번을 풀고 시간이 남았다는 소리를 듣자 속으로 미칠 것같았다. 분명 친구가 잘쳤으니 기뻐해 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혐오스러웠다. 엄마가 싸준 밥들을 대충 먹고 과일들은 친구들에게 다 내줬다. 밥을 다먹고 영혼이 빠져나간것 같은 기분으로 3교시를 기다렸다. 그와중에도 졸음이 몰려온다는 사실에 씨발 하고 조용히 비명을 질렀다.
영어는 생각보다 잘쳤다. 여태껏 제일 안나오던 영어였는데 수능에서 대박을 쳤다. 기분좋은 상태로 옆반에서 시험을 치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달려갔다. 표정이 좋지 않아보여서 말을 걸지 못했다. 옆에 있는 영어를 잘하던 친구랑 두어번 말을 섞고 다시 내반으로 돌아왔다.
영어까지 치고 나서는 더이상 버틸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모의고사를 치는듯한 기분으로 과탐을 쳤다. 20번을 마킹하자마자 종이쳤다. 우울했지만 문제를 다풀었으니 괜찮네 하며 마무리했다.
감독은 시험이 끝나고 정리가 끝날때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책상을 두드리며 심심해진 손을 있는대로 놀려댔다. 수능이 끝났다. 나는 현실을 도피하고 있었다. 결과가 어쨌든 끝났으니 된거다 라느니 하는 말을 나오는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다들 먼저 교실을 빠져나갔고 나는 조금 늦게 교실을 빠져나갔다. 조용해진 건물애서 느껴지는 적막감이 왠지모르게 무서웠고 하품을 하며 흐르는 눈물은 기분이 나빴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괜시리 머쓱해져서 집에 걸어갔다. 엄마에게 국어는 망친거 같은데 나름 선방했던거 같다며 문자를 보내놨다. 혼자걷는 하굣길은 수능이 끝난 해방감 마저도 우울감에 억눌리게 만들었다. 하굣길을 걸으며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수능 반응을 검색해보았다. 국어가 어려웠고 영어가 어려웠다느니 물리가 어려웠고 화학은 쉬웠고 생물은 미쳤고 등등등. 국어가 어려웠다니 내심 안심했다. 영어가 어려웠다는데서 기분이 좋았고 수학은 쉬웠던거 같다는 글들을 모조리 내눈에서 거르며 읽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컴퓨터를 켜서 정시 배치표를 살펴봤다. 어느 대학을 갈 수 있을까 알아봤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했고 내가 예상한것보다 한참 낮은 대학이었다. 기분이 더러웠다. 괜히 뒤에서 영화를 보며 깔깔대는 누나가 원망스러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답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수험표에 정답을 적을 시간조차 없었고, 기억에 의존해서 수능을 한번 더 쳐야했다. 결과는 참담했고 탐구는 내 뒷통수를 철빠따로 후려쳤다. 물리 20점대, 화학 30점대. 소름이 끼치는 점수. 상상도 못했다. 몇번이고 다시풀었다. 내가 진짜 이점수냐며 애써 부정해가면서 홀수 짝수도 다시 확인해가면서 다시 풀었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다시.
결국 울음이 터져버렸다. 컴퓨터앞에서 가채점 점수를 보다가 고개를 푹 숙인채로 눈물로 팔목을 적셨다. 내가 어떻게 1년을 보냈는데 이럴 수 는 없는거잖아라며, 들을 사람도, 원망할 사람도 없는 불가능한 원망을 하며 울었다. 결국 내책임이었을텐데 잘못한건 나라는걸 알면서도 너무 억울했다. 1년동안 친구도 만나지 않고 하루 왠종일을 공부만 해댔는데 이런결과라는게 억울했다. 내가 저질렀던 만행들은 생각지도 않고, 내가 해온것들만 생각했다. 그 순간 만큼은 너무나도 비참했고 너무나도 억울 했다. 시간을 돌리는 상상을 네번가량 해봤고. 방에 들어가 눈물샘이 마르도록 울었다.
침대에 엎드려 울다가
그렇게 울어 배게가 다 젖고나서야
그제서야 지쳐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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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수능의 경험을 되살려 써본 글입니다. 이번엔 헤이해지지 않길 다짐하며
내 미래 예고인가...ㅠㅠ
그건그렇고 필력 굿
수능에 나올정도의 수필
화이팅. 지금은 그냥 글로 쓸만큼 덤덤해졌지만 그땐 한 2주간 우울했어요 ㅋㅋ
글 되게 잘 쓰시는듯...이번엔 건승하시길 ㅍㅇㅌ
이번에는 꼭 대박나시길... ㅎㅇㅌ!
이어플러그(귀마개) 끼고 시험볼수있나요? 글고 제가 책상을 좀높혀서 시험보고싶은데 책상 밑에 깔창같은거 깔고봐도 괜찮나요?
저는 이어폰 안끼고 갔는데 감독관 따라서 가능한 경우도 있으니까 미리가서 여쭤보시고 깔창같은것고 한번 여쭤보세요 거의 감독관 재량임
앞뒤 꽉막힌 감독관분이면 못낄수도있을듯해요.
국어때 물어봤더니 안된다고 하심..
됨 안됨 비율 1:5인듯 싶어여
웬만하면 돼요
삼수생의 경험ㅜㅜ
저희교실엔 한명 있었는데 매시간 물어보고 매시간허락맡고 썼어요
이어플러그요? 책상높히게끔 하는거요?
이어플러그..
1교시부터는 15수능 저의 모습같네요.....올해는 좋은 결실이 있기를 바랍니다.
옴마... 멘탈 터졌었던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힘네요 ㅠㅠ
같은 재수생으로서..ㅠㅠ
누구보다 잘 아는 기분...눈물이 핑돌았네요. 저심정은 정말 겪어본사람만 알죠....제인생에 가장 선명하고 또렷한 과거는 2014년 11월 13일 수능날입니다
울컥했어요 ... 힘힘힘
ㅋㅋ진짜 사실적여서 살짝 무섭네요
무섭다진짜;
ㅠㅠ 힘냅시다!
와 진짜 물리1 ㄹ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