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 Müller [427516] · MS 2012 · 쪽지

2016-02-05 15:00:24
조회수 1,789

설대숲 현대 문학 열전 (ㅎㄷㄷ)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7888096

(가)

작품명 : 뒤집기

결재 서류에 서명을 했다
올해 우리 회사에서 몇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해고되어야 하는지,
오십 명쯤 되었나,
휘갈긴 나의 싸인이
그들의 삶에 칼날처럼 꽂혔을 것이다

늦은 밤 집에 돌아오니
내 서류가방 보다도 작은 아이가
첫 뒤집기를 하려 애쓰고 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온 힘을 끌어 모아
저도 천장을 한번 보겠다고
끝나지 않는 사투를 벌인다

아이를 확 안아, 마음 같아서는,
뒤집는 것을 도와주고 싶다
구원의 손길을 내밀다,
부끄러운 두 손을 다시 거둔다
첫 뒤집기는 스스로 해야
제 삶에 닥칠 역경을 스스로 이겨낼 수 있단다

잘 익은 배추만한 작은 몸에
생명임을 증명하는 듯
꼬물거리는 작은 손가락과 발가락들
한 몸 뒤집을 힘도
도저히 짜낼 수 없는 것인지,
결국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온다

힘을 내라, 아이야
기형도 시인의 말처럼
너는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나중에는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훗날 네가 너의 신념을 뒤집어야 할 때
너는 차라리 육신을 뒤집던 이 날을 그리워할 것이다

해고 통보를 받은 쉰명의 가장들이
아무 일 없다는 듯,
통닭 한 마리씩 사들고 집에 돌아갈 때
그들이 만약, 눈물을 흘리며
아이의 뒤집기를 바라본다면
그 눈물은 내가 나의 신념을 뒤집은 탓이다

힘을 내라, 아이야
지금은 그 쪼고만 육신을
뒤집기 위하여.
이담에 훌륭히 자라거든
더 힘을 내거라, 아이야
어떠한 힘 앞에서도, 너의 커다란 신념과 믿음을
뒤집지 않기 위하여.


https://www.facebook.com/560898400668463/posts/975430732548559






(나)

작품명 : 

씨발, 이 씨발 것의 돈


메일로 날아온 휴대전화 요금 명세서를 보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군 정지로 깎인 돈이라곤 만 원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번 달은 요금이 평소보다 만 원은 더 나왔다. 주제넘게 연말연시 분위기를 좀 내본답시고 세일하는 게임 몇 개를 지른 것이 화근이었다. 일 년 전에 폰팔이 아저씨의 세 치 혀에 홀렸던 죄로 적지 않은 기기 할부금이 남아 있는 것도 보였다. 씨발.

머리는 재빠르게 자동이체 계좌의 잔고를 떠올렸다. 오천 원 쯤 모잘랐던 것 같다. 오천 원을 나랏님께서 하사하옵시는 개좆만한 월급에서 어떻게 변통한다고 해도 글쎄 내가 거렁뱅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한참 남았지만서도 생각의 다음 단계는 전역 이후의 생활에 이르렀다. 보자, 통신비가 대충 이만큼에, 식비하고 교통비. 방값이랑 뭐를 좀 더하면 다달이 백만 원은 우습게 차오를 테다. 방이라 함은 물론 보증금 없고 몸만 누일 수 있는 고시촌 쪽방이다. 휴학을 더 하고 돈을 벌까. 그만큼 돈이 모일 리가 없다. 돈을 모은다는 것은 이미 돈푼 있는 사람들에게나 유의미한 표현이다.

한국장학재단에서 생활비 대출을 받는대봐야 한 학기에 고작 백오십이다. 뭐 다른 좋은 장학금 같은 게 있으려나. 있다고 내가 선정이 되기나 할까. 아니다. 사람이 벌 생각을 해야지. 과외도 좀 두어 개 하고 다른 일도 좀 하려면, 이런 씨부럴, 과제는 언제 하고 시험 공부는 또 언제 하고 친구들은 언제 만난담.

집에다 말하면 용돈이 튀어나오는 선후임들이 부럽다. 나의 가족이라고 있는 무리는 물심양면으로 나에게 가정의 기능을 한 적이 없다. 군대만 갔다 오면 기필코 문짝을 박차고 나가서 살리라 벼르는 차에, 이 개 같은 돈 새끼가 발목을 턱 붙잡는 것이다.

대학생이 되면서 나는 늪과도 같은 열등감의 수렁에 더욱 빠져들었다. 하루 끼니를 건사치 못하는 내 눈에 비친 이 학교 사람들의 삶은 차라리 비현실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삶의 다른 가능성이었다. 나의 생은 어째서 이토록 비참하고 끔찍한 가능성을 택하게 되었나. 참기 힘든 분노와 허망함이 급류처럼 날뛰었다.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나를 안에서부터 찢어발기고 있었다.

방학이면 유럽으로 뜨는 동기들. 과외로 번 돈은 저축을 하고, 생활비는 집에서 받아 쓴다던 그 친구. 새 계절에 맞추어 새 옷을 사는 이들. 나도 옷이랑 신발이랑 가방 바꾸고 싶다. 몇 개 없는 거 다 낡고 헤졌는데. 군인이란 핑계로 미루고 있지만 사실은 돈인 것이다.

다 커서야 알게 된 것이,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생각을 좁은 데 가두게 되는가 보다. 그게 썩 나쁜지는 모르겠다. 진리를 논하고 이성을 가꾼들 굶어 뒤진다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이 있어서 그걸로 벌어먹는 일을 꿈이라고 갖고 있지만, 실은 나에게는 인간다운 삶이면 충분하다. 먹고 자고 입는 것을 남들 다 하는 만큼만 해보고 싶다. 그 정도면 좋다. 그렇게 살아볼 수가 있다면 나는 어떠한 철학도 윤리도 죽은 글자로 여길 수가 있을 것 같다.

허나 제일 쓰라린 것은 나의 못 먹고 못 입는 일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이다. 밥 한 끼 사주고 싶고 술값도 턱턱 내보고 싶은 마음이랴 가난하다고 없을 리가 없다. 보고 싶은 속내를 감추며 약속을 미루고 얼버무리는 날에 나는 괴로워하였다.

질척한 고민과 밭은 한숨 따위는 밥 빌어먹는 데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런 것들은 내다버려도 좋으니 돈이 갖고 싶다. 돈이란 걸 몽땅 가져버려서 돈을 전부 죽이고 싶다. 내 지옥 같은 청춘의 보상은 그밖에 있을 수 없다. 언젠가 반드시 돈다발의 목덜미를 붙들고서 나는 세상의 모든 물욕을 실컷 경멸할 것이다. 언제나 성가셨던 탐욕과 질투의 뺨을 돈으로 후려치면서 후련한 작별을 고할 것이다.

그러나 씨발. 어찌된 게 그 돈이란 것을 도무지 손에 쥐어볼 수가 없으니. 그 씨발 것의 돈이 없으니, 나에겐 오직 나를 목 졸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뿐인 것이다.


https://www.facebook.com/560898400668463/posts/978795392212093





나중에 2010년대 초반의 사회상을 잘 보여준다며 수능 문학으로 나오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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