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삼수세끼 [585407] · 쪽지

2016-01-23 03:23:29
조회수 20,198

수능 전엔 엘리트, 끝나곤 잉여쓰레기인생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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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서없지만 드라마같은 사실이여서 써볼게요.


대치동 학원에서 나름 괜찮게 장학금 받으며 다녔다.
6월 성적은 12112
맨날 원장님이 불러서 짜장면 먹이고 우리 (세끼)는 한국사를 안했으니까 연대를 갈 것이라고 하시곤 하셨다.

대망의 9월을 죽쑴, 학원이 아닌 의정부 집 근처 학교에서 봤다.
국어가 3등급 나오고 수학이 4등급 영탐 만점이였는데 원장선생님이 그날 딥빡하시고...
시험날 쫄아있는데 원장님이 술 한잔 하자고 하셨다.

"우리 (세끼)는 내 아들같단 말이야.. 군대 간 내 아들... 걔도 곧잘 했는데 시험만 보면 긴장해서 4수했거든.."

아드님에 대해서 들은건 처음이고 뭐하러 그런 말씀을 하시나 했지만 그저 치킨과 골뱅이무침을 흡입하며 "제가 그만큼 원장님 믿음을 받는게 기쁘네요." 라고 했다.
원장님은 격하게 기뻐하시며 그날 꽐라가 되시고 다음날 출근을 늦게 하셨다.

단과지만 빈 강의실에서 혼자, 혹은 어떤 여학생들과 같이 있으면서 자습을 하곤 했다.
자습하는 학생들이 다 원장님이 아끼는 학생들이였는지 3시 쯤 되면 피자나 치킨, 햄버거 등을 사와서 먹으라고 하셨다.
덕분에 9월 전에도 후에도 나름 행복하게 공부했다.

대망의 D-10부터 불안장애가 왔다.
글이 안읽히고 수학은 기본계산도 실수하며 영어는 감으로 때려 맞추기 시작했다.
손이 가끔씩 떨려서 약을 복용했고 수능 전날 저녁엔 우황청심환을 2알, 생약성분수면리듬조절약 레돌민을 3알 먹고 2시에 잠들었다.

수능날, 수능신은 날 저버리고 토끼전에 호랑이가 나온 것도, 똥을 싼거도 모르고 국어시간을 마쳤다.
마지막 지문을 못본 것도 모자라서 종이 쳤는데 19번이 비어있다.
알고보니 밀려썼다.

수학을 나름 선방했고 30번을 수험생활 최초로 풀었지만 3점에서 감점이 많아졌고 영어는 주제에서 막혔다.
사탐은 닺아일체, 기상유우머도 못하고 공부 안한 아랍어는 나름 읽는 척하며 풀었다.

아랍어를 다 풀고 나니, 눈물이 쏟아져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젊은 감독관님이 바로 퇴근인데도 내 자리에서 떠나지 못하셨다.

"추스르고 어서 집에 가요 학생."

조금 추스르고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고 그 여감독관님과 나만 있었다.
죄송합니다라고 크게 말하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서 나갔다.

채점을 하고 논술컷이라도 맞춰야겠단 생각을 했지만 국어가 6이 뜨고 수학이 4 영어가 3 떴다.
사탐은 다음날에 올라오는데 상해보험이던 외대, 생명보험이던 숭실대를 어떻게든 가고싶은 마음이 생겼다.
다음날 채점결과는 4등급과 5등급.

그때부터 어머니께선 전문대라도 넣어보는건 어떻겠냐 하셨다.
하루에 한번 이상 꼭 말씀하셨다.
논술학원을 환불처리하고 집에 오는데 교복입은 학생들을 보고 또 눈물이 쏟아졌다.
친구도 잃고 시간도 잃고, 돈도 잃은 내 모습은 그저 아디다스 츄리닝과 삼선슬리퍼를 찍찍 끌고 다니는 한량이자 백수였다.
삼수를 하겠단 결심도 그때 무너졌다.





지금의 나는 아침에 자고 저녁에 일어나는 잉여쓰레기다.
삼수는 하기로 했으며 집에선 응팔의 정봉이에서 복권당첨의 영웅을 뺀 이미지다.
어머니는 날 보시면 그래도 내 새끼라고 하시고 아버지께선 남자가 결심을 했으면 끝까지 밀고 가라고 그 얇은 몸으로 말씀하신다.

내 옆에는 현재 강아지 두 마리와 온갖 책들이 있다.
행복하고 싶었고 부모님의 자랑이 되고 싶었던 자퇴 반수생은 이제 집안의 골칫거리이자 말도 안듣는 백수 잉여쓰레기가 되었다.

내일, 아니 오늘 편의점 알바를 지원하기로 했다.
6월 30일 공익근무 시작 전에 아침에 일어나는 습관을 들이고 계속 날 굴리고 싶었다.
시간을 파는 직업이 편의점 알바이기 때문에 내 선택에 후회는 뒤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알바 중 가장 내 시나리오에 가까운 일이다.




내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면은 내 미소다.


난 웃으며 수능판을 떠날 것이다.
목표에 미쳐서든, 정신이 미쳐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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