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ltree [1424751] · MS 2025 · 쪽지

2025-12-22 14:5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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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올립니다. 타치바나 미카리 사과문(비틀린 자아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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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치바나 미카리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타치바나 미카리입니다.

어떻게 글을 시작해야 할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하루를 마치고 휴식하러 오신 오르비언 분들에게 민폐지만, 사과문을 쓰며 제 비틀린 자아를 그대로 드러내 보려 합니다.


저는 부산의 한 일반고 전교 1등입니다. 부산에서도 그리 번화하지 않은, 중심지에서 좀 떨어진 변두리에 있는 학교입니다.


저는 중학교 무렵 근처 과학고 입시를 준비하려다 같은 학원의 똑똑했던 친구에게 재능의 벽을 느꼈습니다. 결국 입시를 포기한 뒤 열등감과 피해의식, 패배감에 사로잡힌 채 일반고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그동안 풀어왔던 문제들에 비해 비교적 쉬운 내신 시험을 치르며 어느덧 전교 1등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게 제 마음가짐이 망가진 첫 번째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천재를 마주하고 느꼈던 열등감과 패배감이, 운 좋게 전교 1등을 달성한 뒤로는 희열감과 우월감으로 치환되었고, 저는 사람을 성적으로만, 결과로만 바라보는 괴물이 되었습니다.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친구들의 시험 점수를 엑셀에 기입하고, 수행평가 점수를 하나하나 입력해서 1등급 컷까지의 점수를 추산해 나와 비교했습니다.


친구가 시험을 망치길 기도하며, 내가 제발 이 자리를 지키게 해줘. 나는 이것밖에 없어 이런 생각을 하며 하루 종일 정신병자처럼 시험에만 빠져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2학년 1학기 말, 화학 시험 서술형을 작성할 때 몰 계수를 잘못 적는 바람에 한 등수 차이로 2등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학교생활 처음으로 2라는 숫자를 눈앞에 마주하게 되었고, 1.0을 유지하던 내신에 금이 가게 되었습니다. 이게 제가 망가진 두 번째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뒤로 다시 패배감과 우울감에 잠식된 채, 비틀린 사고방식을 가지고 커뮤니티에 빠져 살았습니다.


친구들의 걱정 섞인 위로에도 저 좆같은 씨발새끼는 내가 시험 망친 걸 좋아하겠지? 내가 실패한 걸 즐기겠지? 라고 생각하며 친구들의 입장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주의에 빠져있던 제 입장에서 모두를 색안경을 낀 채 바라봤습니다.


그렇게 2학년 2학기가 끝나고, 저는 더 이상 패배자로 살 수 없다는 강박에 시달렸습니다. 친구들의 제 실수를 비웃는듯한 걱정 섞인 시선, 이번에도 실수하면 전교 1등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저를 잠식했습니다


하루 하루를 스케줄로 관리하고 미친 새끼처럼 프린트 암기에 매달려서 운 좋게 겨우 1등급을 사수하며 마지막을 1.0으로 장식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제가 망가지게 된 세 번째 원인 같습니다.


저는 패배감과 우월감, 다시 패배감으로 떨어졌다가 1.0이라는 점수에 또다시 우월감으로 오르는 비극의 롤러코스터를 탔습니다. 그 과정에서 더욱더 견고하게 결과만을 바라보는 기형적인 자아를 품게 되었습니다.


2학년을 마치며 단상에서 선생님이 장학상을 주셨을 때, 친구들이 박수를 쳐줄 때 저는 마치 제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마냥 착각에 빠져 살았습니다.


나는 우월해, 나는 노력하는 사람이야. 내 노력은 언제나 보답받고 나는 실패하지 않아. 나는 패배자가 아니야라는 비틀린 환희 속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수행평가까지 마치고 몇 개월 만에 휴식기가 찾아오자 저는 다시 오르비를 켰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오르비언들도 반가웠고, 스스로 성공한 사람이라는 자기암시에 빠져있을 때라 하루 종일 성적 자랑을 하며 우월감을 즐겼습니다.


저질 섹드립을 치고, 성희롱을 하고, 찐따같은 시니컬한 말투로 남을 조롱하고, 무시하고... 저는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채 오직 재미만을 위해 남들을 감정 쓰레기통 취급하며 모욕을 배설했습니다.


그렇게 저급함의 끝을 달리며 선을 시원하게 넘고 산화도 당하면서 커뮤니티를 할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자랑을 못 한다는 생각에, 내가 우수한 인간인 걸 증명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손이 벌벌 떨렸습니다.


어떻게든 전화번호를 구해서 수십 번 재릅을 해버리는 희대의 병크를 터트리며 다시 외줄을 타듯 병신 같은 오르비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그러다 어떤 글 하나를 보게 됩니다. 수시를 열심히 준비했는데 수능이 노력한 것에 비해 망쳐버려 6광탈을 당했다는 한탄 글이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이 글을 보고 역설적으로 환희를 느꼈습니다. 저 사람은 패배했구나, 나는 승리자구나.이러면서 타자를 치며 마음껏 제 속내를 배설했습니다.


 니 노력이 부족한 거야.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라며 타인의 노력을 부정하고 폄하하고, 그분이 온전히 쏟아부었을 시간의 궤적과 성실함의 무게를 감히 모욕했습니다. 어쩌면 저는 패배감과 우월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제 자아를 유지할 수단으로 타인을 모욕하고 비난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는 아예 선을 넘어버렸습니다.


숭고한 의학을, 꿈꿔왔던 의사로서의 삶을 알량한 제 자존심을 위해 부수고, 쪼개고, 으스러뜨린 뒤 회복의 도구로 썼습니다. 인륜을 저버린 채 환자를 돈통 취급하고, 아빠 병원 물려받고 꿀 빨면서 살겠다며 저 자신을, 비참하게 우월감과 자기연민에 시달리던 제 자신조차 기만한 채 변호했습니다.

저는 어쩌면 그분에게도 피해의식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작 그런 지잡대 수시 떨어진 거 가지고... 왜 슬퍼하는 거야. 나는 지금 하루하루 남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타인과의 비교에서 벗어나려, 부모님의 헌신에 보답하려 피를 짜내는 심정으로 공부해왔는데... !!! 내가 제일 힘들고 내가 노력 제일 많이 했는데 너 따위가 무슨 자격으로 한탄 글을 쓰냐.


저는 이렇게 이율배반적으로 제 노력만을 치켜세우고 타인의 노력을 깎아내리며, 결과에 집착하고 가진 건 오직 성적뿐인 비참한 제 자아를 달랬습니다. 제가 힘들고 비참한 게 타인의 노력을 비웃을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른 채로요.


그렇게 당연한 결과인 듯 오르비에서 온갖 쌍욕을 쳐먹게 되었고, 한심하게도 저는 이때까지도 제가 틀린 줄 몰랐습니다.


왜 저 저능아들은 저 사람을 변호하는 거지? 왜 나는? 나도 열심히 했어... 나 전교 1등이야.. 나 수시로도 메쟈의 갈거같고 고2 나이에 벌써 의대 4합5 최저도 거의 다 맞출 줄 알아... 나를 봐줘...


이런 마음으로 저를 비난하는 글들에 모두 반박성, 조롱성 댓글을 달며 다시 자기 연민을 시작했습니다.


그때, 부엉이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오르비언이 쓴 글이 있음, 이라는 제목을 보고 처음에는 반어법 저격글인 줄 알고 쌍욕을 박으러 빠르게 들어갔는데, 그 내용은 저격과는 정반대로 제가 미친놈이지만 속내는 착한 것 같다며 저를 긍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머리를 쾅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저 새끼는 뭐지? 내가 이렇게 패배의식에 찌든 좆병신인데 왜 나를 긍정해주지? 대체 어떤 면을 보고 나를 착하다고 보는 거지?


무수한 의구심과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구원의 불빛이 제 마음속에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말 한마디가, 인터넷에서 쓰인 활자 하나가 마음을 울리고 한 사람을 위로한다는걸 말입니다. 


그렇게 당연하게도 또 산화를 당하고, 일주일 동안 스스로를 돌아봤습니다. 내신도 끝난 터라 학교에서 하루 종일 여태껏의 제 모습을 돌아봤습니다.


제가 남을 무시했던 행동들, 비웃었던 행동들. 그 기저에는 제 성적이 있었습니다. 운좋게 머리좋게 테어났다는 이유로 받은 1.02라는 내신... 서울대를 찔러볼 모의수능 점수... 그 밖에도 에피, 센츄를 넘나드는 고1, 고2 교육청 모의고사까지. 한낱 휘발될 숫자와 종이 쪼가리에 제 마음을 팔아넘겼다는걸요. 저는 제 스스로가 남들보다 열심히 사는 우수한 존재인줄 알았습니다. 실상은 그저 머리좋게 태어났을 뿐인 방탕아였다는것도 모른체요. 


성적이 나를 대변해준다, 나를 긍정해준다. 나를 완전한 존재로 만든다. 나에게 타인을 모욕할 권리를 준다


저는 그렇게 착각했고, 성적의 꼭두각시가 되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제 자신을 돌아보며 저는 그저 우물 안 개구리인 걸 깨달았습니다. 오르비언들이 떠올랐습니다. 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성적을 받으신 분들, 이미 수능에서 말도 안 되는 성적표를 받으신 분들이 생각나며 입으로만 나대는 고2인 저와 비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뭐라고, 저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모두를 짓밟는 거인이 아니라, 그저 좆반고 전교 1등에, 좆도 쓰잘데기 없는 모의고사 점수를 들고 떼쓰는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걸 말이죠.


그것이 제가 개심하게 된 첫 번째 단추가 되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제 알량한 성적이 타인의 노력을, 타인의 하루하루를, 타인의 열정을, 타인의 실패를 비웃고 모욕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모든 걸 성적으로 귀결 짓는 제 자신이, 과거의 꿈을 꾸던, 별을 바라보던 어린아이와는 다르게 이미 커버린, 세상에 찌들어 모든 걸 성적으로 치환해서 바라보는 제 자신이 너무도 불쌍하고 한심해서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저는 이제 달라지고 싶습니다. 더 이상 패배의식과 열등감이라는 자아를 탈피하고, 이제는 날아오르고 싶습니다.


그동안 제가 지었던 죄는 모두 변명 없이 책임지고 감당하겠습니다. 어떤 원망이든 조롱이든, 이 새끼 걍 평소처럼 뻘글이나 싸지 왜 진지글이나 싸노, 오글거린다 병신아 하는 그 어떤 댓글이든 제 잘못이니 감내하겠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고 두 눈을 뜬채 세상을 바라보자 저능아라고만 여겼던 학교 친구들이 열심히 수행평가를 준비하고, 매일 처절하게 밤을 새우며 시험 준비를 하는 모습을 드디어 제대로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저들도 노력하는구나,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내가 병신이었구나.


친구들에게 너무나도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학교에서도 다시 친구들에게 표독하게 틱틱대지 않고 먼저 다가가며 같이 공부 얘기도 하고, 제 속내도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이제는 색안경을 벗고, 그때의 2등급을 받고 힘들었던 나를 위로해주던 친구들의 손길이 따뜻했음을 뒤늦게 자각했습니다.


저는 이제 성적이라는 방패 아래 숨어 사람을 찌르던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라, 저를 구속하던 전교 1등이라는 알을 깨고, 1.0 이라는 완벽함에 길들여진 감옥에서 나와서, 결과라는 사슬에서 풀려나 앞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이제야 갇힌 세상에서 흑백논리로 점칠된 삶을 살아가던 제가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를 옥죄던 하나의 세계를 깨고, 모두와 공존할 수 있는 아름다운 넓은 세계로 첫 발을 내딛고 싶습니다.


화학 프린트를 외우며 급하게 뛰어가던 아침길과 다르게, 평소처럼 앞만 보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며 등교했습니다. 발밑에 피어난 눈꽃과, 하얀 눈송이를 머금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비뚤어진 시선을 거두고 마주한 세상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습니다.


겸손과 행복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만을 알고있었던 과거와 다르게, 따뜻한 마음으로 그 단어의 심상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치기 어린 열등감과 오만으로 점철되었던 과거의 어린 아이에게 작별을 고하고, 이제는 한명의 성숙한 인간으로서 올곧게 서기 위한 첫발을 내딛으려 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스트레스를 풀러 똥글싸러 들어온 오르비에서 뜻밖의 구원을 맞이한 뒤로, 제 가치관과 마음가짐이 변했고, 인터넷에서의 하루가 현실의 저마저 변하게 만들어 세상을 다시금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타치바나 미카리였습니다. 두서없이 감정에 휩쓸려 쏟아낸 못난 진심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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