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pond [589969] · MS 2015 · 쪽지

2016-01-17 22:09:57
조회수 1,737

저희 학교 국어 선생님 썰 풀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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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고3 맡으신 50대 중반의 어르신이신데

문 열고 들어오시자마자 커다란 007 철가방과 앰프를 들고 등장 (!!)

그리고 철가방에서 권총을 꺼내듯이 비장하면서도 여유 있게 가방문을 열면 등장하는 것은

EBS 수능특강 책과 답지 (...)

그리고 작렬하는 비장의 멘트.. '자..... 오늘은 몇 페이지냐면..  xx페이지네'

이 때부터 그 선생님의, 수업 시간 중의 렘수면 행위를 촉진하는 데 최적화된 수업이 시작됩니다.

'자.. 비문학... 위험 사회는.. (쿨럭)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울리히 맞나? 맞지?
울리히 벡이..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의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듣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 올 정도의, 아주 무미건조한 톤으로.. 그는 계속 책을 읽어 나갑니다..

3월에는 수능특강, 6월에는 인터넷수능 문학, 수능 직전 10일에는 수능완성 유형...

주위에 연연하지 않고 책을 읽어 나가는 선생님의 평정심과 노련함.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이 적막함 속에서, 학생들은 생기를 만드는 대신, 고개가 하나 둘씩 앞으로
꺾여 나가면서 '침묵 그 자체' 가 되어 나갑니다.

그리고 그 하나 하나의 어둠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은, 커다란 하나의 고요...

마치 33명 중 1~2명을 제외한 모두가 잠이라는 방법으로 이루어 낸 위대한 무(無)와도 같았습니다.

이런 기적의 광경을 보신 선생님.. 그러나 특유의 연륜으로 인해 미동도 없으시죠.

단지 장자가 말했듯..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에 따라 계속 책을 읽어 나가시는 선생님.

가끔 프리피야트의 아무도 없는 을씨년스러움을 방불케 하는 고즈넉함을 견디기 위해 가끔씩 교탁 옆에서 손수 개발하신 'X알 체조' 를 열정적으로 추시기도 하시는 선생님.

모두가 '꿀잠' 을 자고 있는 하모니를 깨고 열심히 다른 과목을 공부하는 이에게 제재를 가하기보단, 연장자로써 측은함과 이해를 담고 그저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시며 계속 책을 읽어 나가시는 선생님...

좋은 의미로든, 그렇지 않든... 항상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편안함' 이 느껴지셨습니다..

시험 문제는 고3 학생들의 정신적 고통을 이해하고 최대한 잠재우기 위해, EBS 교재와 기출에서 아무 것도 바꾸지 않은, 그야말로 무위의 시험 출제...

수행평가는 번잡한 PPT 등의 굴레 없이, 그저 마음 수련에 도움이 되는 한자 성어와 속담을 마구, 넘쳐날 정도로 뿌려 주시는 여유로움..

보는 것이 무엇이든, 선생님은 항상 상상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내신 1등급 ㄱㅇ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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