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연속미분가능 [1007587] · MS 2020 · 쪽지

2025-12-11 23: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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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몇 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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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 '부딪치다'


요시노 히로시

 


어느 날 아침

텔레비전 화면에 나온 한 명의 여성

일본 최초의 맹인 전화교환원

 

그 눈은

바깥세상을 흡수하지 못하고 

빛을 밝게 반사시키고 있었다.

몇 해 전 실명했다는 그 눈은 

 

사회자가 그녀의 출퇴근 모습을 소개했다

'출근 첫날만 어머니의 도움을 받았고

그 후로는 줄곧

혼자서 출퇴근하고 있다고 합니다'.

 

'근무를 시작한 지 오늘로 한 달

편도로 거의 한 시간 동안 만원 전철을 타고……'

그리고 물었다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기 힘드시죠?'

 

그녀는 대답했다.

'네, 힘들긴 힘들지만

여기저기 부딪치면서 걷기 때문에

그럭저럭……'.

 

'부딪치면서…… 말인가요?'라고 말하는 사회자

그녀는 미소 지었다.

'부딪치는 것이 있으면

오히려 안심이 되는 걸요'.

 

눈이 보이는 나는 

부딪치지 않고 걷는다.

사람이나 물체를

피해야만 하는 장애물로 여기며.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부딪치며 걷는다.

부딪치는 사람이나 사물을

세상이 내민 거친 호의로 여기며.

 

길 위의 쓰레기통이나 

볼트가 튀어나온 가드레일과

몸을 난폭하게 치고 지나가는 가방과

울퉁불퉁한 보도블록과 조바심 내는 자동차의 경적

 

그것들은 오히려

그녀를 생생하게 긴장시키는 것

친근한 장애물 

존재의 촉감

 

부딪쳐 오는 모든 것들에 

자신을 맞부딪쳐

부싯돌처럼 상쾌하게 불꽃을 일으키면서

걸어가는 그녀

 

사람과 사물들 사이를

눅눅한 성냥개비처럼 

한 번의 불꽃도 일으킴 없이

그냥 빠져나가기만 해 온 나

 

세상을 피하는 것밖에 몰랐던 나의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 

세게 부딪쳐 온 그녀

 

피할 겨를도 없이 

나가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은 나에게

그녀가 속삭여 주었다.

부딪치는 법, 세상을 소유하는 기술을.

 

동사 '부딪치다'가 

그곳에 있었다.

한 여성의 모습으로 

미소 지으며.

 

그녀의 주위에는 

물체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짓 한 번에 곧바로 노래를 부를 것처럼

다정한 성가대처럼.









저녁노을


요시노 히로시

 

 

언제나 그렇지만

전철은 만원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지만

젊은 남녀가 앉아 있고

노인이 서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가씨가 일어나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서둘러 노인이 앉았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노인은 다음 역에서 내렸다.

아가씨는 앉았다.

다른 노인이 아가씨 앞으로

옆쪽에서 떠밀려 왔다.

아가씨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

자리를

그 노인에게 양보했다.

 

노인은 다음 역에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내렸다.

아가씨는 앉았다.

‘두 번 있는 일은 세 번 있다’라고 하듯이 

다른 노인이 아가씨 앞으로

또 밀려왔다.

 

가엾게도

아가씨는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이번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역도

그다음 역도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긴장된 몸은 굳어졌고───

나는 전철에서 내렸다.

굳은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

아가씨는 어디까지 갔을까.


상냥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자신도 모르게 수난자가 된다.

왜냐고?

그건

상냥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처럼

느끼니까.

상냥한 마음에 시달리면서

아가씨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아랫입술을 깨물며

괴로운 심정으로

아름다운 저녁노을도 바라보지 않고.










개구리 폴짝


다니카와 슌타로


 

개구리 폴짝

나는 것이 제일 좋아

처음엔 엄마를 뛰어넘고

다음엔 아빠를 뛰어넘는다

폴짝

 

개구리 폴짝

나는 것이 제일 좋아

다음엔 자동차를 뛰어넘고

신칸센도 뛰어넘는다

폴짝폴짝

 

개구리 폴짝

나는 것이 제일 좋아

날아가는 비행기를 뛰어넘고

내친김에 해님까지 뛰어넘는다

폴짝폴짝 폴짝


개구리 폴짝

나는 것이 제일 좋아

기어이 오늘을 뛰어넘어

내일 쪽으로 사라졌다

폴짝폴짝 폴짝폴짝






소담시(小譚詩)


다치하라 미치조


 

한 명은 불을 켤 수 있었다

그 곁에서 책을 읽는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고요한 방이기 때문에 낮은 소리가

구석까지 잘 들렸다(모두는 듣고 있었다)

 

한 명은 불을 끌 수 있었다

그 곁에서 자는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물레질하는 여자가 자장노래를 불러 들려 주었다

그것이 창 밖에까지 잘 들렸다(모두는 듣고 있었다)

 

몇 밤이고 몇 밤이고 마찬가지로 지나갔다……

바람이 소리치고 탑 위에서 수탉이 알렸다

——병사는 깃발을 들어라 나귀는 방울을 울려라!

 

그리고 아침이 왔다 정말 아침이 왔다

다시 밤이 왔다 다시 새로운 밤이 왔다

그 방은 텅 빈 채로 있었다






또 어느 밤에

 

다치하라 미치조



우리는 서성거리겠지 안개 속을

안개는 저 산 멀리 흘러 달 표면을

화살처럼 스치며 우릴 감싸 안겠지

재의 장막처럼

 

우리는 헤어져 가겠지 알지도 못하고

알리지도 못한 채 마주쳤던 저

구름처럼 우리는 잊어버리겠지

물살처럼

 

그 길은 은빛의 길 우리들은 가겠지

홀로 떠나…(한 사람은 한 사람을

해 질 녘에 왜 기다리는 법을 배웠는지)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하겠지 옛날 그리워하던

달의 거울은 그 밤을 비추고 있었다고

우리는 다만 그 말만 반복하겠지






훗날의 추억으로


다치하라 미치조

 

 

꿈은 언제나 돌아가고는 했다산기슭의 외로운 마을로

이삭여뀌에 바람이 일고

귀뚜라미의 노래 멈추지 않는

고요한 오후의 숲길을

 

화창하게 푸른 하늘에는 햇볕이 비치고 화산은 잠들어 있었다

─ 그리고 나는

보아 온 것을섬들을파도를()햇빛과 달빛을

아무도 듣지 않는 줄 알면서도 이야기를 계속했다…

 

꿈은 더 이상 앞으로는 나아가지 않는다

모두 다 잊어버리자고 생각하여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고 만 때에는

 

꿈은 한 겨울의 추억 속에 얼어붙겠지

그리고 그것은 문을 열고 적막함 속에

무수한 별빛에 비친 길을 지나가겠지





피아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비 내리는 어느 가을날, 누굴 좀 만나려고 요코하마의 야마테 주택가를 걷고 있었다. 주변은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와 거의 달라진 것이 없이 여전히 황폐했다. 그나마 조금 변화가 있다면 슬레이트 지붕과 벽돌 벽이 허물어져 켜켜이 쌓인 한쪽 구석에 우거진 명아주뿐이었다. 어느 무너진 집터에 뚜껑이 열려 활처럼 휜 피아노가 보였다. 반쯤 벽에 짓눌린 채 비에 젖어 건반이 반지르르했다. 크고 작은 갖가지 악보도 아련히 붉게 물든 명아주 사이에서 분홍, 연파랑, 연노랑 알파벳 표지를 적시고 있었다.

  나는 찾아간 사람과 복잡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쉽사리 결말이 나지 않았다. 결국 날이 저물어서야 그 집에서 나왔다.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자고 약속한 뒤였다. 

  비는 다행히 그쳤다. 달이 바람 부는 하늘에서 이따금 달빛을 내비쳤다. 기차를 놓치지 않으려고(담배를 못 피우는 국철은 타지 않는다) 되도록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돌연 누군가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친다’기보다는 건드리는 소리였다. 엉겁결에 발걸음을 늦추고 거칠고 쓸쓸하기 짝이 없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때마침 달빛이 가늘고 긴 건반을 흘끗 비췄다. 명아줄 수풀에 놓인 피아노. 어디에도 사람 그림자는 없었다. 

 

  겨우 한 음이었지만 피아노 소리가 틀림없었다. 왠지 으스스해서 다시금 걸음을 재촉하려는 순간, 뒤쪽에 있던 피아노가 또 희미하게 소리를 냈다. 뒤돌아보지 않고 얼른 잰걸음을 늘렸다. 나를 떠나보내려 한바탕 불어오는 습기 머금은 바람을 느끼면서. 

  그 피아노 소리에 초자연적 해석을 보태기엔 난 지나치게 현실주의자였다. 정녕 사람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들 허물어진 벽 근처에 고양이라도 숨어 있었을지 모른다, 만일 고양이가 아니라면…… 족제비라든가 두꺼비였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피아노가 울리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닷새쯤 뒤 같은 용건으로 같은 곳을 지나갔다. 피아노는 변함없이 명아주 수풀 속에 살그머니 웅크리고 있었다. 분홍, 연파랑, 연노랑 악보도 요전과 다름없이 어지러이 흩어진 채였다. 다만 오늘은 피아노와 악보는 물론이고 무너져 내린 벽돌과 슬레이트가 화창한 가을 햇살에 반짝였다.

  악보를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피아노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상아로 만든 건반은 광택을 잃었고 뚜껑은 옻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상태였다. 다리에는 까마귀머루를 닮은 덩굴풀 한 줄기가 휘감겨 있었다. 어쩐지 실망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정말 이래도 소리가 나나?”

혼자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피아노가 희미하게 소리를 냈다. 의심하는 나를 꾸짖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피아노는 지금도 햇빛 아래 뽀얀 건반을 펼쳐 놓았고, 그 위에 어느새 밤 한 톨이 떨어져 뒹굴었다. 

  길로 되돌아가 폐허를 쭉 둘러봤다. 그제야 슬레이트 지붕에 눌린 채 비스듬히 피아노를 덮고 있는 밤나무를 알아챘다. 그건 어찌 되든 좋았다. 나는 그저 명아주 수풀 속 피아노만 유심히 바라봤다. 지난해 대지진 이후 아무도 모르는 소리를 간직해온 피아노를.

rare-UTokyo rare-billboard rare-ZUTOMAYO rare-케인장난전화얘기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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