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안 [244984] · MS 2008 · 쪽지

2011-02-01 10:2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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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봉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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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에 아주아주 옛날에 내가 무려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의 일이다. 100원짜리 불량식품을 먹으면 소원이 없고 치토스 한 봉지라도 하사 받는 날에는 대경사인 것처럼 무지무지 소박한 것에도 감사했던(물론 지금도 그런다) 시절이 있다. 아니, 누구든지 있겠지. 소심소심돋아서 학교에서 매일매일 먹는 우유를 친구들처럼 학교 쪽문 앞에 아이스크림아저씨한테 주고 아이스크림으로 바꿔먹어보지도 못했고 소풍 때는 뭔가 있어보이는 '깨가루'만 뿌리면 김밥의 신선도가 강화된다는 떡밥을 순진하게도 믿었던 유년기의 추억이라고 해두자.

초등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돌아오는데 치토스 봉지가 나뒹굴고 있더라. 절대로 바른생활에서 '길가에 있는 쓰레기는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려야해요'라고 배운 인간다운 학습효과를 되살려낸 것이 아니였다. 그냥, 왠지 봉지가 날 주워달라고 내 귀에 달콤하게 속삭이는 느낌이 들어서랄까. 아무튼 봉지를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빨간색 바베큐맛이었다. 물론 안에 남은 치토스를 꺼내서 입에 넣어보았다 하면 땅거지로 알겠지만 다행히도 그 안에는 치토스가 없었다.

"한 봉지 더"

얼마나 날카롭고도 오묘하며 간결한 단어란 말인가!

"한 봉지 더"

모든 장면이 슬로우모션으로 흘러간다. 혹시나 주위에 이것을 떨어트린(버린이 맞겠지) 주인이 있지는 않을까? 내가 혹시 잘못 본 것은 아닐까? 많은 생각이 내 머리 속을 교차해지나갔지만 내 몸은 전방 15m에 있는 슈퍼마켓에 흡입되고 있더라. 해맑게 웃으며 치-토오스를 교환한 나는 문방구 앞에서 딱지치기를 하고 있는 다른 반 아이들의 시선을 있는 그대로 받으며 집으로 사푼사푼 뛰어갔다. 동생과 함께 나눠먹다가 "한 봉지 더"가 또 발견되자 그대로 봉지를 동생에게 양도하고 다음 치-토오스를 영접하기 위해 슈퍼마켓으로 뛰어갔다.

100%당첨이라는 이벤트가 있다. 침을 꿀꺽 삼킨다. 응모를 한다. 꽝이다. 이렇게 보면 그 당시에 "한 봉지 더"를 이끌어내기 위해 미래의 운까지 끌어다쓴게 아닌지 살포시 의심이 되는 무료한 현실. 과거의 나에게 그 책임을 돌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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