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조지훈-『낙화(落花)』 (현대시 감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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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落花)
조지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상아탑≫(1946)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꽃이 지고 있나 봅니다. 화자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바람이 솔솔 불어 달랑거리던 꽃을 가지에서 떼어 내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바람이 아니더라도 꽃은 정해진 계절이 되면 언젠간 시들어 떨어졌을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이자 거스를 수 없는 운명입니다. 꽃이 진 이유는 바람이 아닌, 자연의 흐름을 따라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기분은 여전히 슬픕니다. 그럼, 사람은 무언갈 탓하고 싶게 됩니다. 그렇게 바람을 탓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라고 화자는 말합니다. 자연의 섭리를 인정하며 거스르려 하진 않지만, 아무리 그렇다 한들 슬픔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요.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주렴은 기출을 공부했다면 꽤나 익숙한 단어일 것입니다. 그 밖으로 별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 별이 하나하나 스러집니다. 별이 스러진다니, 구름이나 안개라도 끼는 것일까요. 아니면... 날이 밝아지는 것일까요. 다음 연에서 알아봅시다.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귀촉도(소쩍새, 두견새) 가 울음을 멈췄나 봅니다. 그리곤 머언 산이 다가섭니다. 가까이 온다는 것입니다. 산에 발이 달려 가까이 오진 않았을 것입니다. 가까이 온 것처럼 보이거나, 심리적으로 산이 가까워졌거나 등등의 경우입니다. 하지만.. 이쯤 되면 우리는 눈치채야 합니다. 별은 스러지고, 귀촉도는 울음을 멈추고, 산이 가까워집니다. 날이 밝아지고, 어둠이 걷히고 있는 것입니다. 암흑 속에 가려져 실루엣만이 보이던 산이 빛을 받으며 형상이 선명해지고 있는 이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밤새 지는 꽃을 보고, 생각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한 화자가 떠올라야 합니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왜 촛불을 꺼야겠다고 생각할까요? 이젠 날이 밝아와 촛불이 필요 없기 때문일까요? '꽃이 지는데 -' 라는 다음 부분을 보면 마냥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꽃은 지고 있습니다. 꽃이 찬란하던 삶을 마무리하고 뜰의 바닥으로 떨어질 즈음, 자신도 어둠을 마주하고 싶기에 촛불을 끄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떨어지는 꽃을 마냥 바라보기 힘들어 촛불을 꺼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혹은 - 꽃이 지며 뜰에 어리는 꽃의 그림자를 더 자세히 보고 싶어 촛불을 끄고 싶어하는 것일까요.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방 안에 촛불이 켜져 있었다면 뜰에 어리는 꽃 지는 그림자는 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밝기 때문입니다. 화자는 촛불을 껐나 봅니다. 그렇게 뜰에 어리는 꽃 지는 그림자를 지켜봅니다. 꽃의 그림자는 꽃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자취와도 같습니다. 다양한 문학 작품에서 '그림자' 는 어떤 의미로 쓰여왔는지 잠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붉은 꽃이기 때문일까요? 아침 햇살이 비쳐오고 있기 때문일까요? 꽃지는 그림자가 하얀 무채색의 미닫이에 붉게 비치고 있나 봅니다. 꽃이 지는 것을 또 보고 있는 화자입니다.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이제 화자는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성찰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화자는 묻혀서 살고 있나 봅니다. 묻혀서 산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세상을 피해 떨어져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세상과 떨어져 있다는 것은 그저 물리적 거리가 먼 것이 아닌, 심리적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심리적으로 세상과 떨어져 있다면, 화자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요? 화자는 왜 묻혀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화자는 자신의 마음이 곱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고운 마음을, 이렇게 조용히 잘 살아보려 애쓰는 마음을 혹시 누군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긴 할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를 잘못 감상한다면 '이런 고운 마음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걱정된다' 라는 말 그대로 이해해 버릴 수 있습니다. 화자는 '이렇게 곱게 사는 화자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긴 할까? 누구 알아주는 이가 있었으면 좋겠구나.' -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그런데 왜 갑자기 꽃이 지는 아침엔 울고 싶다고 생각할까요. 여기서 이 시의 시상이 완벽히 드러납니다. 화자는 사실 혼자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방금 전 연에서는 이런 고운 자신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없어 막막함, 쓸쓸함, 걱정을 느낍니다. 하지만 문득, 떨어지는 꽃을 바라보니 화자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었음을 느낍니다. 그는 꽃과 함께 살고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꽃이 떨어집니다. 자신의 고운 마음을 알아주었을, 삶을 함께하며 즐거움을 함께하고 슬픔을 함께했던 꽃이 떨어집니다.
꽃이 떨어지자 화자는 그 꽃이 가려주고 있던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어쩌면 꽃과 계속 함께였다는 것을 방금 알아차렸기에 그 감정이 더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화자는 자연의 섭리 앞 덧없어지는 한 생명의 소멸을 바라보며 인생의 덧없음을 느낍니다. 그런 아침에, 화자는 울고 싶어 합니다.
만약 수능에서 이 시가 출제되었다면, 아마도 가장 중요시할 부분은 시간의 흐름과 화자의 시선 이동일 것입니다. 이 시를 감상함에 있어 날이 밝아온다는 것과, 화자가 무엇을 보고 성찰을 시작했는지 아는 것은 기초 중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이조차 하지 못했다면 이 시를 감상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꽃이 지는 것을 봄 → 하늘을 바라보고, 산을 바라봄 → 촛불을 꺼야겠다고 생각함 → 뜰에 어리는 꽃 지는 그림자를 봄 → 방 안으로 시선을 옮겨 하얀 미닫이를 봄 → 성찰

문예운동사 출판사의 『수필시대』 제 7권 (11월, 12월호) 191쪽에 나태주 시인이 이 시를 읽고 쓴 수필이 있습니다. 읽어보며 이 시에 대한 감상을 마무리해봅시다.
공주에서 고등학교 학생 신분으로 읽은 책 가운데 잊지 못할 책이 많은데 그 가운데 한 권이 『청록집』이다.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이렇게 세 분이서 나라의 시를 살리고 있는 아담한 한국의 시집. 그러나 내가 읽은 책은 성한 책이 아니라 앞뒤로 몇 장씩 떨어져 나간 그런 책이었다. 그것도 우리 학교에 책이 없어 공주사범대학 도서관에 있는 걸 같은 집에 하숙 들이던 대학생 형에게 빌려달라고 부탁하여 겨우 읽은 책이다. 그래도 책의 속표지만은 남아있어서 거기에 시소 두 마리가 날렵하게 달려가는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시집을 한 번 읽고 나서 무조건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노트에 베껴 적어 빌린 책은 대학생 형에게 돌려주고 베낀 시 노트를 가지고 다니며 읽고 또 읽었다. 세 분의 시는 조금씩 색깔과 목소리는 달랐지만 한결같이 좋았다. 박목월 선생의 단아한 시도 좋았고 조지훈 선생의 치열집착한 시도 좋았고 박두진 선생의 정결한 시도 좋았다. 그저 다 좋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좋고 그름에는 이유가 있겠지만 좋고 싫음에는 이유가 없는 법이다. 그냥 좋으면 좋은 것이고 그냥 싫으면 싫은 것이다.
『청록집』에 실린 조지훈 선생의 시 가운데는 마음에 드는 시, 좋은 시가 여럿이었다. 그러나 나는 「낙화」 한 자가 좋았다. 시의 구절구절이 좋았지만 특히 끝부분의 ‘묻혀서 사는 이의 / 고운 마음을 / 아는 이 있을까 / 저허하노니 / 꽃이 지는 아침은 / 울고 싶어라’가 더욱 좋았다. 나는 이런 대 구절을 이 꽉 막히도록 좋다고 표현한다. 그렇다. 그건 가슴이 꽉 막히도록 좋은, 그런 좋음이었다. ‘그 마음이 내 마음이다’라고도 표현한다. 이건 감정이입을 말하는 것이고 엠파씨(empathy)를 말하는 것이다. 끝내는 감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나는 이 시를 좋아해 왔다. 살아가기 무더럽게 힘든 날에도 문득 이 시를 중얼거리면 참아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이 얼마나 대단한 시의 힘이겠는가? 흔히들 이런 시를 음풍농월이라고 말한다. 겨우 달아난 바람을 희롱하며 노는 시라는 뜻으로 그 마음에는 현실의 문제에 눈감는, 시라는 비난이 숨어있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단호히 ‘아니올시다’라고 말하고 싶다.
이 시는 조지훈 선생의 청년시절 마지막으로 치닫는 일본제국주의 압제를 피하여 강원도 월정사에 들어가서 지냄직 지어진 시라고 전한다. 겉으로는 평온하고 꽃이나 바람이나 봄을 노래하는 한가한 시 같지만 그 바닥에는 진한 슬픔이 흐르고 있음을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다. 이 시는 식민지 시절 이 나라 지식인 청년의 슬픔과 눈물과 한숨이 배어있는 시이다. 그런 걸 일부러 외면하고 음풍농월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곤란한 일이다. 그것은 억지와 같은 일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럼 당신들의 시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자갈만큼 마차 바퀴소리인가? 아니면 자다가 이 가는 소리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시장바닥의 소음인가?
일찍이 세상을 떠나 버릇 직접 뵈올 일은 없지만 내가 조지훈 선생과 같이 평생 동안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사무치도록 사모하는 시인의 시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행운에 속한다. 일찍이 고등학교 학생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만나게 된 스스로의 행운에 대해서 감사한다. 어린 시와 함께 살아온 날들의 행복에 대해서 또한 시집을 통해 베껴서 읽어 온 다섯어 여섯 번 순한 열정에 대해서도 감사한다. 다신 그 시절의 순수함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일까? 오늘에 이르러 나는 새삼스레 한숨짓게 보기도 한다.
나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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