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배신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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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3, 수능까지 49일 남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지금 이 시점에 굳이 피곤하게 폭로를 하는 건 저에게도 부담이죠. 그런데 왜 했을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문제를 지금 내치지 않으면, 수능 직전까지도 계속 끌려다니며 공부에 집중하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더 늦기 전에 이 고리를 끊고 싶었습니다.
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만든 문제에도 오탈자나 구조적 허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작업물이 상업적 의미에서 상품성이 매우 높다고 스스로 평가하지 않기도 하구요. 다만 그건 제 취미였고, 제게 문제 만들기는 마음의 숨통을 틔워 주는 놀이이자 공부였습니다. 문제는 그 취미가 어느 순간 강제성을 띤 일로 변하고, 더 나아가 값싼 외주—착취의 구조로 편입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때부터 취미는 더 이상 취미가 아닙니다. “하고 싶어서” 하던 일이 “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고, 그 대가마저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될 때, 남는 건 피로와 환멸뿐이었습니다.
저는 그 흐름의 한복판에서, 저보다 더 어린 학생이 같은 경험을 겪는 장면까지 보았습니다. 갓 문제 만들기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고2 학생이었습니다. 그 학생에게 문제 제작은 원래 설렘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설렘을 헐값으로 매겨 버리면, 남는 건 두 가지겠죠. “나는 싸구려인가?”라는 자존감의 균열, 그리고 “문제 만들기 따위 다시는 안 하겠다”는 냉소. 저는 그 아이가 저처럼, 혹은 저보다 더 깊게 싫증을 배우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서둘렀죠. 누군가는 이 구조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폭로 글에서 저는 실명을 쓰지 않았습니다. 사실에 근거해 문제를 제기하되, 불필요한 소모적 싸움과 법적 공방으로 흘러가는 것을 피하고 싶었거든요. 제게는 공부해야 할 시간표가 있고, 그 시간표를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동시에, 침묵이 또 다른 침묵을 낳는다는 것도 알구요.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나도 말하지 않는다”는 선택은, 착취의 구조 앞에서 가장 편안하고도 가장 위험한 방관이 됩니다. 저는 그 방관자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특정 개인인 A씨를 망신 주기 위한 폭로가 아닙니다. “입만 털어도 돈이 된다”는 말이 당연해지는 순간, 누군가의 노력이 값을 잃기 마련입니다. 그 값의 하한선을 정하는 건 결국 우리여야 하구요. 문제를 만드는 학생이든, 그 문제를 사서 푸는 학생이든, 혹은 문제를 유통하는 어른이든. 우리가 최소한의 기준을 세우지 않으면, 취미는 산업에 삼켜지고, 산업은 쉬운 착취를 배운단걸 느꼈습니다.
제가 바라는 건 거창하지 않은 상식입니다.
1. 일을 시켰다면, 그 일의 난이도와 시간을 존중하는 정당한 대가.
2. 사람이 사람에게 지켜야 할 기본적인 말의 무게.
3. 안 하겠다고 말했을 때 멈출 수 있는 권리.
저는 배신자일까요? 누군가의 입장에서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죠. 근데 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가 주는 침묵, 다음 아이도 같은 일을 겪게 만드는 침묵, 나 자신에게조차 부끄러운 침묵. 저는 그 침묵을 배신하기로 한겁니다. (오글거리네요)
언젠가 수능을 끝내고, 정말로 제 이름을 걸고 N제를 내보고 싶기도 합니다. 그 책의 첫 장을 넘기는 학생이 “문제를 만든 사람이 어떤 밤을 보냈는지”를 떠올리며, 그래도 이 가격은 정당하다고, 이 발문에는 애정이 있다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의 저는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읽어줘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탁합니다. 누군가의 취미와 수고가 다시는 헐값으로 팔리지 않도록, 우리가 상식의 편에 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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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누군진 모르겠지만 미자라서 만만했나보네 수능관련 사람이 모순적으로 고3을 건드네;;;
캬 명문이네요… 국어 1등급이실듯ㄷㄷㄷ 마음만큼은 멋진 문만러이십니다. 현역이신데도 문제 만드신다니…존경스럽습니다
아닙니다ㅜㅜㅠ 많이 부족한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혀녀기엿음??
여러모로 롭랍군
아직 어린 나이이신데 많이 성숙하시네요
문만 잘하시는 것도 너무 멋지고요
님 같은 분을 보고 저의 19살을 되돌아보면 참 부끄럽습니다
모쪼록 마음정리 잘 하시고 공부 마무리 잘하셔서 원하는 대학에 가실 수 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남은 하루 잘 마무리하시고 좋은일만 있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힘내세요!
'내가 힘들었다'가 많은 급여를 받아야 하는 기준이 되어선 안되죠
그만한 급여를 받을 퀄리티의 결과물을 내놓았는가가 기준이 되어야겠죠
고3이 글을 이렇게 잘쓴다니...멋지군요
그래서 근로계약서를 써야 하는거죠
흠... 너에게 합당한 대우인 것 같은데?
ㅂㅅ
글보니까 참 힘들게도 사시네요. 태수랑 같이 으쌰으쌰 잘 해보세여 화이팅!ㅎㅎ
법적 공방을 너무 피하게 되면 본인이 오히려 힘들어지는 역설적인 상황이 생길 수 있음 법무법인 추천해드려요?
헉 수능이 코앞이라ㅜㅠㅠ 추천해주시면 수능 이후에 고려해볼게요!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