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해린 [1378508] · MS 2025 (수정됨) · 쪽지

2025-09-09 23:13:26
조회수 1,069

26리트 언어이해 칼럼 2: 13~21번 현장풀이& 해설 (수의주의, 제도와 경제성장, 크리스마스 캐럴 4)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74624750

(663.5K) [19]

2026 언어이해.pdf

(31.5K) [10]

언어이해 정답표.pdf

이전 게시물(https://orbi.kr/00074599596)에 이어 이번엔 13~21번까지의 3개 지문을 다루겠습니다. 이 글의 범례에 해당하는 내용은 모두 이전 게시물에 작성했으니 안 보신 분들은 반드시 확인해주세요. 이번에도 언어이해 첨부파일을 올려놨으니 문제를 푸신 후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13~15번: 수의주의에 대한 논박

제재: 인문 (철학 - 인식론)

난이도: ★★★☆☆~★★★★☆

필자의 배경지식 여부: ★☆☆☆☆


<1문단>


믿음을 자기 능력으로 결정할 수 있느냐에 대한 인식론 논쟁 지문입니다. 어떤 믿음은 자기 뜻대로 즉각적으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인식적 수의주의다, 라는 정의가 나오므로 이 개념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2문단>


2문단은 언뜻 보기에는 매우 추상적으로 보이는 이 주제가 왜 의미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능력에 달렸다면 칸트의 원칙에 따라 그것이 곧 윤리적 책임과 관련된다는 것이죠. 수의주의는 믿음에 대한 의무와 책임에 대한 우리의 직관을 잘 설명하고, 불수의주의는 그에 반대되죠. 


<3문단>


첫 문장에서 수의주의를 반박하는 여러 논거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올스턴은 심리적 근거를 들어 p를 믿는다는 것은 곧 증거력과 장기적 행위, 습관 등이 영향을 준 것이지, 자기 의지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4문단>


윌리엄스는 믿음의 개념을 분석해 수의수의를 논박했습니다. p를 수의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그 능력을 갖는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스스로 이 능력을 가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참 거짓 여부에 따라 달려있고, 우리가 참 거짓 여부와 무관하게 p를 믿는 능력이 있다고 아는 경우는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참과 거짓에 따라 믿음의 여부가 달라지고, 우리는 그것을 벗어날 능력은 없습니다.


<5문단>


히로나미는 무언가를 믿을 수 있는 이유를 2가지로 분류하여 1번째 이유만이 믿음의 이유가 된다는 것을 밝혀 수의주의를 논박했습니다. 1번째 이유는 믿음의 내용이 참이기 때문에 믿는 것으로, 직관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2번째 이유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믿음을 정하는 것인데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을 수의적으로 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라고 이해하기는 했는데, 인식론을 공부하신 전공자들은 제가 요약한 게 좀 부정확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이해해도 문제풀이에는 지장 없는 듯합니다. 



1번 선지: 수의주의의 정의를 잘 기억하거나, 기억나지 않는다면 지문으로 빨리 되돌아가서 봐야 했습니다. 수의적이라면 즉각적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2번 선지: 1문단 가장 앞에 나오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원하는 대로 상상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죠. 이런 선지까지 굳이 근거를 찾으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3번 선지: 믿음의 수의성 여부가 곧 믿음의 윤리적 평가 가능성 여부로 이어지니 학문적 다툼이 없을 리 없습니다.

4번 선지: 심리적 근거뿐 아니라 믿음을 개념적으로 분석하여 반박한 입장도 있었죠.

5번 선지: 칸트에 따르면 불능을 이유로 누군가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1번 선지: 전 처음에 ㉠의 입장 안에서도 갈릴 수 있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지만, 지문을 다시 읽어보니 그런 근거는 없기에 그것을 참으로 받아들인다고 보아 옳은 선지로 판단했습니다.

2번 선지: 애초에 수의적으로 믿음을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요. 참입니다.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그렇게 믿는 것은 다르죠.

3번 선지: ㉠은 '적어도 어떤 믿음'은 수의적이라고 보았습니다. 모든 믿음이 수의적이라고 한 적 없습니다.

4번, 5번 선지는 설명 생략하겠습니다.



15번 문항은 제가 틀린 문항입니다. 풀어서 틀린 문항은 이 문제밖에 없는데, 제가 이 문항을 왜 틀렸는지 분석해보겠습니다.


우선 1, 2, 4번 선지는 쉬운 선지니 넘어가겠습니다.


3번 선지에서, 히로니미 입장에서 '갑의 믿음은 참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은 곧 '갑은 A를 믿는다'는 것을 의미함을 5문단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복잡하게 패러프레이징한 것을 잘 풀어서 이해하는 것을 물어보는 문제였습니다. 저는 이 문장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갑의 믿음은 참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 '갑은 A를 믿으려고 시도한다' 정도로 이해했는데 틀렸네요. 갑이 A를 참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외부적 이유'에 의한 것일 뿐, 실제로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기에 틀렸습니다.


5번 선지는 너무 단정적이라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아직도 왜 옳은 선지인지 고르는 명확한 근거는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은 지문에 '우리에게 이런 능력은 있을 수 없고'라는 것은 우리가 초인적 존재인 경우 역시 포함하는 것으로 파악해야 했나 봐요. 근데 5번 선지로 답 정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고, 3번 선지가 틀렸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이 문항을 틀린 제가 3번 선지에서 얻어가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철학 지문에서 선지 표현이 쉽게 이해 가지 않을 때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지문 내 표현과 비교하며 어떻게든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철학 지문을 어렵게 내면 전공자가 아니라면 답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출제자는 선지 표현과 지문 표현을 일치시켜 명확한 정답 선택 근거를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잘 모르면 지문으로 돌아가자! 추상적인 지문의 표현과 선지의 표현을 대응시켜 비교하자! 그게 현실적인 방안인 것 같습니다.


70분 내에 지문의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하고 선지의 오답 근거를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댈 수 있다? 그럼 언어이해 고정 만점이겠죠. 하지만 그런 사람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꾸역꾸역 맞추려고 애를 쓰고, 그게 불가능하면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 그것이 이 말도 안되게 어려운 시험을 대비할 때 갖춰야 할 자세인 것 같습니다.



16~18번: 제도와 경제성장의 인과관계

제재: 사회 (경제학 - 계량경제)

난이도: ★★★★☆

필자의 배경지식 여부: ★★★★★


저는 아제모을루의 책을 노벨상을 받기도 전에 읽어봤기 때문에, 그의 주장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가 경제 전공이기도 하고 책도 읽었으니 그 부분에서 매우 유리했습니다. 국어류 시험은 배경지식이 있는 게 확실히 유리하기 때문에, 리트만 생각한다면 철학과나 경제학과가 유리한 것 같네요. 만약 그러한 배경지식이 없었다면, 문항의 난이도를 고려할 때 꽤 어려운 지문 중 하나였다고 생각해요.


다만 저도 이 글에 나오는 연구방법론에 대해서는 잘은 몰랐습니다.


<1문단>

아제모을루는 제도가 경제성장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 명확히 밝히기 위해 아제모을루가 도구변수를 도입했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2문단>


이 부분은 책에서 못 본 것 같은 내용이긴 하지만, 그리 특별한 내용은 없는 것 같습니다. x가 y에게 준 영향만을 평가하기 위해 도구변수로부터 x햇을 추출해 그것과 y 사이의 기울기를 추정하면 그것이 곧 인과관계를 입증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능에 나온다면 이 문단이 어려운 문단일 수 있겠으나, 적어도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을 배운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리트에서는 그렇게 어려운 문단은 아닐 것 같네요. 인문대생들은 통계 과목을 안 들어서 모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다들 복수/부전공을 상경이나 공대로 많이 하니까요. 통계에 대한 기본 지식이 있다면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설령 그런 지식이 없더라도 잘 끊어 읽으면 됩니다.



3문단에서는 2문단의 방법론을 아제모을루의 주장에 적용하였습니다. 가난했던 지역이 부유해지고 부유했던 지역이 가난해지는 것이 번영의 역전이라면, 가난했던 지역이 제도가 발전하고 부유했던 지역의 제도는 정체하거나 후퇴하는 것을 제도적 역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도적 역전이 번영의 역전을 이끈다는 것이죠. 가난했던 지역은 뺏을 게 없어 유럽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포용적 제도를 만들었고, 부유했던 지역은 뺏을 게 많아 착취적 제도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제모을루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망률을 도구변수로 사용해 인과관계를 입증하였습니다. 사망률을 도구변수로 사용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문제를 풀기 전 이 부분을 먼저 생각해봅시다. 2문단에서 도구변수는 x와의 관계를 제외하면 y와 연관되지 않는 변수라고 하였습니다. 즉, 사망률은 제도와의 관계를 제외하면 오늘날 번영과 연관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앞서 열심히 도구변수의 개념을 설명한 데는 다 이유가 있겠죠. 물론 여기서 이런 추론까지 못하더라도 뒷 문단에서 추론을 할 수 있긴 했습니다.


<4문단>


3문단에서 제시한 방법에 대한 비판과 그에 대한 아제모을루의 반박입니다. 우선 아제모을루의 연구는 사망률 -> 과거의 제도 -> 오늘날의 소득 수준, 이 인과관계를 분석하려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현재의 제도 발달 수준과 과거의 제도 발달 수준 간에 아무런 연관이 없다면 과거의 제도가 오늘날의 소득 수준의 원인이라는 실증적 근거로 ‘현재의 제도‘로 활용한 연구는 무의미하겠죠. 아제모을루는 과거와 현재의 제도 간에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며 방어했습니다.


또, 사망률이 도구변수로서 적절한지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사망률은 과거의 제도를 제외하고는 다른 요소를 통해 오늘날의 소득 수준에 영향을 주면 안됩니다. 3문단을 참고해주세요.



4번 선지 인과관계가 아니라 상관관계죠. 나머지 선지는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1번 선지: 오늘날 사망률이 왜 나오나요. 그냥 여기서 Out입니다

2번 선지: 사망률의 차이가 크니까 도구변수로 사용하려고 하는 것이죠. 사망률의 차이가 제도의 차이를 만들고, 그것이 현재 소득 수준의 차이를 만든다는 게 핵심입니다.

3번 선지: 아제모을루가 과거 제도가 현재 제도 발전 수준 간의 상관관계가 높다고 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이미 결정되었다‘고 볼 정도로 강하다고 본 것은 아니죠.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됩니다. 일본의 식민 정책이 필연적으로 오늘날 한국의 제도를 결정했나요? 아니죠. 너무 논리적으로 따지기만 하지 말고 상식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4번 선지: 영향받은 부분을 제거할 수 있다고 봤으니 도구변수로 썼겠죠.

5번 선지: (과거) 사망률이 낮은 지역 = (과거) 풍요로운 지역 = 착취적 제도. 이런 등식이 아제모을루의 연구에서 성립하죠. 물론 지나친 단순화긴 합니다만 오류가 없으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도 필요해요.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강우량이 왜 나오느냐? 비가 오면 아무래도 폭동이 덜 일어나거나 거꾸로라고 생각을 했겠죠? 강우량을 도구변수로 사용했다는 것은 곧, 강우량이 폭동수준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오늘날 소득수준에 인과관계를 만들어낸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1번 선지: 당연하죠

2번 선지: 폭동 수준이 높아 소득 수준에 인과적 영향을 줬다면, 거꾸로 볼 수도 있는 거죠. 소득이 낮은 도시가 예전에 폭동 수준이 높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입니다.

3번 선지: 도구변수의 정의를 생각해보면 이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선지네요.

4번 선지: ‘당시 소득 수준이 낮은 도시일수록 폭동이 심하게 일어났을 가능성‘을 <보기>에서 언급하고 있죠. 그리고 폭동이 심했던 지역이 오늘날의 소득수준에 인과적 영향을 줬을 가설을 검토하고 있고요. 그러면 과거 소득 낮음 -> 폭동 심함 -> 오늘날 소득 낮음. 이러면 ‘양의 상관관계‘죠? 지문에도 나와 있지만 양의 상관관계는 정비례 비슷한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확히는 정비례가 양의 상관관계의 일종이고요.

5번 선지: 상관관계가 미미하다면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겠죠.


총평하자면 고등학생 수준에서는 조금 어려운 지문일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앞 문단과 뒷 문단 간의 관계에 주목하여 잘 독해했다면 문항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19~21번: 최인훈 - 크리스마스 캐럴 4

제재: 인문 (문학 - 현대소설)

난이도: ★★☆☆☆

필자의 배경지식 여부: ★☆☆☆☆ (처음 보는 소설)



최근 몇 년간 문학 지문이 나오지 않았는데, 오랜만에 리트에서 현대소설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난이도는 수능 현대소설보다도 쉬웠던 것 같습니다. 다만 19번 문항에서 세부 정보를 찾기 어려웠을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습니다.


[A] 파트


문학은 독서와는 달리 한 구절 한 구절을 제대로 읽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맥락을 파악해야겠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앞 부분의 내용]과 같은 걸 출제자가 굳이 써주는 이유를 생각해봅시다. 필요하니까 넣는 겁니다. 저게 없으면 제대로 된 독해가 불가능한 것이죠. 이 부분을 집중해서 읽어야 [A]에서 헤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물이 세 명 나오죠. '그'와 한 노파와 H입니다. 그럼 [A]에서 대화하는 둘은 누구일까요? 두 사람이 노파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와 H 중 누가 이야기하는 건지 집중해서 파악합시다. 이처럼 소설의 앞 부분은 상황파악이 잘 안되기 때문에, 대화내용 못지 않게 화자 파악이 중요합니다.


첫 번째 대화 단락에서 H는 노파가 일종의 고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H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말로 표현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H는 인간은 모두 보편적이라고 생각하는 공대생입니다. 그에 비해 '그' = 이방인은 동서양 사이에 '육중한 벽', 즉 아주 큰 문화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대화 단락에서 '그' = 이방인은 다른 문화나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간의 정신적 차이는 말이 안 통할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신을 '문화차별주의'라고 자조하고 있고요.




[생략된 부분의 내용]은 [B]에서 '그'와 '노파' 간의 상호작용이 있을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노파는 굴러 떨어뜨린 책을 함부로 대하는 '그'에게 화를 내다, '두려움과 미움'을 드러내다, 그런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 미안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생략된 부분의 내용]은 앞으로 나올 내용이 H의 편지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노파가 그토록 성경책을 아끼는 이유가 나옵니다. 그 성경책의 가죽이 바로 사고로 죽은 애인의 가죽이라는 것이죠. H는 마지막 단락에서 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서양 사이에는 종교적 '육중한 벽'이 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고, 인간은 모두 보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와 줄거리만 파악하고 선지플레이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1번 선지: 고양이는 '그'가 예시로 든 것이지 실제로 노파와 고양이가 함께 나오는 대목은 없습니다.

2번 선지: '그'에 대해서는 유학하고만 나와 있을 뿐, 전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 수 있는 근거는 없습니다. H 보고 '너는 공대생이라 그래'라는 식으로 말하는 걸 보면 적어도 공과대학은 아닐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다.

3번 선지: 당일 많은 학생들이 어려워했던 선지입니다. H는 '전해 들은 말'을 전한 걸까요? 그에 대한 근거는 C의 첫 번째 문단 마지막 문장에 나오죠. '이렇게 말했다는 거야.' 이 표현은 전해 들은 말을 전할 때 쓰는 표현이죠. 현장에서 찾기가 좀 힘들 수 있는데, 잘 안 보이면 일단 보류하고 나머지 선지판단 제대로 해서 손가락걸기로 푸는 것도 방법이라고 봅니다. 만약 다른 선지도 이렇게 아리까리하다면 어떻게든 '전해 들은 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현을 찾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보면 보입니다.

4번 선지: 대충 읽으면 틀리기 좋은 선지입니다. 그러나 '노파'의 고백을 제대로 읽어보면 '성경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주여,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만 가지고 신앙을 통해 극복했다라고 판단하는 건 과해석입니다.

5번 선지: 노파에 대한 논쟁을 계기로 교류한 건진 모르죠. A의 맨 앞부터 성녀 얘기가 나온다고 해서 그들의 교류의 시작이 노파 이야기였는지 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번 선지: 애초에 인물의 성격이 제시가 됐나요?

2번 선지: A에서 노파가 성경을 읽지는 않고 부둥켜 안고만 있는 것, 성경을 떨어뜨린 것에 과하게 반응하는 것 모두 복선으로 기능합니다.

3번 선지: 심화가 아니라 해소입니다. H의 의문 자체는 맞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A의 앞 부분에서 '저 책은?', '다르다니?' 같은 표현이 H가 의문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기에는 충분합니다.

4번 선지: 재진술이 아니라 아예 새로운 이야기입니다.

5번 선지: [B]에서 인물 사이의 갈등이라고 보기에는 노파가 미안하다고 말을 했기에 갈등이 있었더라도 해소됐다고 볼 수 있고, [C]에서는 인물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든 해소되든 그런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마다 <보기>를 먼저 읽어야 하냐 말아야 하냐 논쟁이 많은 걸로 아는데, 저는 읽는 게 맞다고 봅니다. 저는 <보기>에서 '그'는 유학 중 소외감을 느끼겨 보편성을 특수한 것으로 느끼고 있다는 포인트에 주목했고, 그것이 다시 보편성으로 환원될 것이라는 전체적인 틀을 잡고 소설을 읽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의 주제를 빠르게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크리티컬하게 도움되지는 않았습니다만, 먼저 읽어서 손해 볼 건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문제 풀 때 한 번 더 읽어야겠지만 한 번 읽은 것이니 빠르게 읽을 수 있으니까요.


1번 선지: <보기>에 나와 있다면 허용적 태도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우선 각각의 표현 자체는 다 맞습니다. 그 둘 간의 관계에서 약간 애매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노파가 성경을 여기는 태도에 대해 '그'는 '완고한 벽'을 느끼고 있고, 이것은 한국 근대의 부박함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다고 보아도 <보기>에 근거하면 충분하다고 보아 맞는 선지로 판단했습니다.

2번 선지: 정확한 선지입니다.

3번 선지: 스스로를 '문화차별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인종차별주의가 부정적 표현이고 그것을 비튼 것이기에 자조라고 보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보기>에 근거하면 나머지 표현도 다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번 선지: <보기>가 없었다면 상당히 과해석인 선지이지만, <보기>의 관점을 탑재하고 보면 충분히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표정이라는 것은 보는 사람에 따라 주관적으로 느낄 여지가 충분합니다. 따라서 노파가 '두려움과 미움'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 '그'의 주관이 개입한 결과라고 볼 수 있죠. 실제로는 노파가 다른 감정을 느꼈을 수도 있으니까요.

5번 선지: 너무나도 명확하게 틀린 선지입니다. 보편성을 상대화하는 게 아니라 상대성을 보편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해설한 지문들은 쉬운 지문과 어려운 지문이 섞여 있었습니다. 13~15번 지문과 16~18번 지문은 어느 정도 어려운 지문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리트 특유의 '과함'은 없어 수능을 위해 풀어보기에도 적절한 난이도였습니다. 앞으로 다룰 22~24번 지문과 25~27번 지문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그에 비해 28~30번 지문은 순한맛입니다. 앞으로 해설할 지문들도 미리 풀어보시고 제 글을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 글에 오류가 있거나, 피드백이 있거나,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댓글 또는 쪽지로 알려주세요! 그리고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ㅎㅎ

0 XDK (+0)

  1.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