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 이 방에 들어온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고3 내신 이의제기 전 과정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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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Weltmacht입니다.
오늘은 오르비 가입 후 처음으로 장문 글을 써보려 합니다.
최근 저는 고3 국어 내신 문항에 이의를 제기했는데요. 최종적으로 결과서를 교부받기까지 전 과정과 감상, 새롭게 얻은 교훈을 적어보겠습니다.
이 글을 읽고 타당한 이유가 있음에도 이의신청을 망설이는 학생들에게 용기가 더해졌으면 좋겠습니다.
학교 정보를 드러낼 수 있는 표지는 일신의 안위와 모교의 명예?를 위해 최대한 가리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글쓰는 Weltmacht와 댓글 쓰는 Weltmacht는 다를 수도 있겠죠?
(1) 사건의 발단
7월의 어느 맑고 무더운 날, 시종이 열한 시를 울리고 있었습니다.
교실은 시험이 끝났다는 묘한 해방감과 제시간에 마킹을 다하지 못한 절망감, 50분을 불태운 피로감 등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 복잡한 감정이 한 문제에 대한 지리멸렬한 갑론을박으로 이행하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촉발한 한 마디는 이러했습니다.
“그래서 7번 문제 정답 뭐임???”
아, 7번 문제! 오늘의 주인공 벨트가 귀를 쫑긋 기웃거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이 문제는 정답 없는 문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독서 시험인 이상 지문의 내용은 아주 뻔한 것이었습니다. 수특 사회문화 13강 지문의 내용을 그대로 베껴 온, 익숙하다면 익숙한 지문이었던 것이지요. 부동산 채권과 압류에 관한 그 지문 맞습니다. 예시로 E부동산이 언급되던 지문입니다. (자료를 찾지 못해 회원 여러분의 수특 책에 의존하는 점 사과드립니다.)
문제는, 그 지문이 과연 실제 사례를 통해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7번 문제 4번 선지의 내용이 바로 그랬기 때문입니다.
7. 윗글을 읽은 독자의 반응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전략)
④ 금전 채권의 성립부터 강제 집행과 배당 절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실제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민사 집행 절차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⑤ 압류와 매각, 배당 등 여러 개념이 뒤섞여 제시되어 있어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일관성 없는 설명이 반복되고 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확실하게 내용일치에서 틀린 1~3번 선지를 제외하고 남은 두 선지 모두 벨트에게는 당황 그 자체였습니다. 4번을 찍자니 내신 문제집에서 '실제 사례'로 설명한 건 아니라는 해설을 본 적이 있고, 5번을 찍자니 절대로 저런 선지로 정답을 줄 리는 없을 것이었습니다.
벨트는 나머지 문제를 모두 해결한 뒤 15분 내내 4번과 5번 선지 중에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결국 4번은 절대 답이 될 수 없다는 양심의 요청에 따라 눈을 꾹 감고 5번을 찍고 시험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의 반응도 엇갈렸습니다. 4번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그룹과 5번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그룹으로 나뉘어 격전을 벌인 것입니다. 이미 모두가 마지막 남은 과목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4번을 찍은 학생들은 "5번이 정답일 리가 없잖아"라며 상대를 힐난하고, 5번을 찍은 학생들은 "내 눈에는 실제 사례가 안 보이던데?"로 받아쳤습니다. 물론 5번 그룹의 선봉장이 벨트였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모두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찍은 선지에 대한 확신도 없으면서 아무튼 반대쪽 선지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으니, 무언가 잘못되었음은 확실해 보였습니다.
벨트의 우려는 정답표와 함께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7번 문제의 정답이 4번으로 고시된 것입니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이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출제에 책임을 진 국어과를 찾아가기로 합니다.
(2) 쟁점
이 사안에서 핵심 쟁점은 결국 한 가지였습니다. 수특 13강 지문이 실제 사례를 포함하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일단, 지문에서 그나마 '사례'라고는 말할 수 있는 내용을 전부 인용해 보겠습니다.
- 예컨대 갑이 소유한 E 부동산에 대해 을이 경매 신청을 하려면, 을이 갑에 대한 금전 채권자라는 사실과 채권액은 물론, 지급 기일이 지났는데도 갑이 을에게 돈을 지급하지 못했다는 사실까지도 공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2문단)
- 예컨대 을이 갑을 상대로 돈을 갚으라고 요구하는 재판을 걸어서 '갑은 을에게 돈을 지급하라'는 내용의 판결이 확정되면, 을은 이 확정판결을 근거로 강제 집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2문단)
- 위의 예에서 E부동산에 대한 경매 절차를 거쳐 채권자들에게 배당될 수 있는 돈이 1억 원이고, 채무자 갑에 대해 을은 1억 원, 병은 3억 원의 금전 채권을 각각 가지고 있다면, 배당 가능 금액 1억 원은 을, 병에게 1:3의 비율로 안분 배당된다. 따라서 을은 2,500만 원, 병은 7,500만 원을 각각 배당받는다. 을이 E 부동산에 대한 경매 절차를 주도했고 병은 이러한 경매 절차에서 배당 요구를 하고 배당 절차에만 참가했더라도 마찬가지이다. (3문단)
이의를 제기하는 측은
- 이 글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상황을 가정하고 있을 뿐이다. '예컨대'와 '~면'의 반복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 '갑, 을, 병, 정'과 'E부동산'을 통한 설명은 저자가 인위적으로 조상한 가상적 상황일 뿐이지,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례를 원용한 것이라고 볼 근거가 전혀 없다.
라는 의견이고,
방어하는 측은
- 이 예시들이 결국 '부동산 채권과 압류'라는 이론을 보충하는 현실적인 사례로 제시된 것이기 때문에 실제 사례로 볼 수 있다.
- 지문에 구체적인 수치와 배분 비율 등이 제시되어 있으므로 실제 사례가 맞다.
라는 의견입니다.
기계적 균형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근거는 중심이 되는 것들로 2개씩만 실었습니다.
결국 국어과 사무실에서 선생님과 나눈 대화는 'E부동산을 둘러싼 지문의 예시가 실제 사례의 정의에 부합하는지'로 쟁점을 좁힌 것입니다.
(3) 이후 전개
(방어하는 측에서도 우리를 그렇게 보았겠지만) 저희는 방어 측 의견을 도통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국어과 사무실에서 저런 취지의 답변을 듣고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나왔을 때도 그랬고, 다음 대처를 어떻게 할지 장고를 거듭할 때에도 그랬습니다.
남은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만 생각을 접고 한 등급을 내려받는 데 동의하든지, 생기부를 포함한 모든 것을 걸고 역천(逆天)에 도전하든지. 생각 많이 했습니다. 아실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극악무도한 수시파이터입니다. 당일날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수능에 비해 안전한 건 학종뿐이라는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3년을 수시에 매진한 덕입니다. 그런 수시파이터가 대표로 이의제기를? 일반고 이의제기 괴담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경악을 금치 못할 이야기입니다. 도대체 무슨 변고를 당하려고!
하지만 저는 결국 수시파이터이기 이전에 부당한 것은 참지 못하는 전형적인 MZ였습니다. 늘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런 일을 당하고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굴복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실 2년 열심히 채우고 3-1 마지막 생기부를 망치는 것 정도야 충분히 감수할 만한 리스크였습니다. 이러한 사소한 일 가지고 학교가 제게 결정적 보복을 가할 것 같지도 않았고, 제가 지망하는 대학이 그런 걸 가지고 저를 떨어뜨릴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변고를 당하면 그냥 정시로 틀지 뭐' 하는 하루살이 마인드가 제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입니다.
제게 정말 두려운 것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생기부를 위해 제가 지금 침묵하면, 그리고 다른 모든 학생들이 여기에 침묵하면, 내 뒤의 후배들도 똑같은 일을 당하고 나처럼 소모적인 고민에 빠지겠구나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저의 최애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네 행위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게 행위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침묵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된 모교를 떠올린 저는, 일신의 영달보다 중요한 것이 제 어깨 위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희는 결국 이의를 정식으로 제기하고 싶으면 연구부 고사계를 찾아가라는 선생님의 권유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 말씀을 어떤 의미로 하셨는지 억측이 난무할 수 있겠지만 저는 끝까지 선생님이 제게 진정어린 조언을 해주신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의 어떤 말씀이든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이야말로 학생의 제일가는 특권이 아닐까요?
이의제기를 원하는 학생들에게 꿀팁을 드리자면, 대한민국 고등학교의 학업성적관리규정은 정기고사에 대한 이의신청서 양식을 구비해 두고 있습니다. 저는 대충 전체 페이지 수의 60% 부근을 뒤져서 찾았습니다. 이 양식을 다운로드받은 후 이의제기 사유를 입력하고 제출하는 게 가장 심플하고 심력 소모가 적은 방법입니다.
근데 여기서 끝내기는 아쉽잖아요? 저는 저와 같은 논리로 4번을 정답에서 제외한 학생이 적어도 30%는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그 문제를 내심 아쉬워하고 있을 테고, 그 억울함에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총대를 매기로 한 저라는 사실은 제게 또다른 책임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저희는 성적 확인 서명부 양식을 변주해 '이의신청자 명부'를 만들고, 기숙사에서 그 명부에 열심히 사인을 받으러 다녔습니다. 친구관계가 협소한 저 대신 수많은 (이른바) 오답자들에게 사인을 받아준 L군에게 감사드립니다.
저와 L군은 사인을 권유할 때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사인을 강요하려 드는 대신 사전에 작성된 이의신청서 내용과 서명부를 함께 내밀고 '선택은 너의 몫'이라는 말만을 덧붙였습니다. 다행히 저희의 뜻에 동의해 준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은 마찬가지로 불이익의 가능성을 감수하고 서명에 참여해 주었습니다.
이의신청서는 이의신청 기간 마지막 날 아침 고사계에 접수되었고 이제 저희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Weltmacht 외 3X명의 이름으로 제출된 이의신청서는 이제 위원회 정식 심의만을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저희가 직접 작성한 이의신청서 본문입니다.
<이의신청서>
이의신청자: Weltmacht(가명) 외 3X인
내용:
독서 기말고사 7번 문항 4번 선지는 정답 선지로 될 수 없음이 명백하므로 문제를 '정답 없음'으로 처리하고 재시험을 시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독서 7번 문항은 2026학년도 수능특강 독서 사회문화 13강 지문의 내용과 서술상 특징을 종합적으로 묻는 문제로서 4번 선지는 '금전 채권의 성립부터 강제 집행과 배당 절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실제 사례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민사 집행 절차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문에서 들고 있는 사례는 2문단과 3문단에서 한 번씩 언급되는(주: 이건 제 실수입니다) 'E부동산에 관한 갑, 을, 병의 사례'뿐이며 이 사례 또는 이와 유사한 사례가 현실에서 실제로 발생한 바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일체 제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사례는 실제 사례가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7번 문항 4번 선지는 적절하지 않은 설명을 하고 있으므로 독자의 적절한 반응을 묻고 있는 7번 문항 발문에 부합하는 선지가 아닙니다.
아울러 해당 지문이 실제 사례를 통해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분석이 지배적인 의견이며, 본교 학생들 또한 이 지문이 실제 사례를 통해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견에 동의하고 있음을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시험장에서 실제로 4번 선지를 고른 학생들 상당수 또한 이 의견에 동의하며 5개의 선지 중 명확한 정답 선지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지금 보면 마지막 문단의 주장이 약간 빈약한데, 아예 근거가 없진 않았습니다. 4번 고른 학생들과 5번 고른 학생들도 결국 격론 끝에 '이 문제는 이의제기가 답이다'라는 하나의 합의를 도출했을 정도니까요...
더불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특 독서 변형 문제집에서도 '실제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는 설명은 적절하지 않은 설명으로 분류되었고, 이의제기를 위해 EBS Q&A 게시판에서 받은 답변 또한 '위 지문이 실제 사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는 설명은 적절하지 않다는 취지였습니다.
네, 이제 여러분 모두가 예상하고 계실 그 결말이 찾아오고 있습니다.
(4) 결말
2025학년도 1학기 기말고사 독서 선택형 7번 문항 4번 선택지
이의 신청 처리 결과
1. 학업성적관리위원회 회의 의견
- 4번 선택지의 '실제'는 이론에 대한 실제 사례를 의미함.
- 이론적인 글에서 실제 사례는 대체로 '갑, 을' 등으로 특정인 혹은 특정 사건에 대한 언급을 숨기는 진술로 이루어져 있을 뿐, 실제 사례가 아닌 것이 아님. 실제 사례를 제시하는 경우에도 필요에 따라 기관명, 성명, 숫자 등을 익명화, 단순화하여 제시하기도 함.
- 지문의 내용에서 실제 사례의 구체적인 수치, 배분 비율 등이 제시되어 있음.
- 4번 선택지에서의 '실제 사례'라는 단어의 의미가 지문에 근거하여 맥락적 의미로 구체적 사례를 제시한 것으로 이해됨. 사건의 실존 여부에 대한 이의제기는 문제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임.
- 문제의 발문에서 '가장' 적절한 것을 고르도록 하고 있으며, 나머지 선지의 경우 명백하게 오답임.
- 표준국어대사전의 '실제'의 의미에는 '(부사) 거짓이나 상상이 아니고 현실적으로'라는 의미가 있음. 사전적 의미도 선택지에 사용된 '실제'의 맥락적 해석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임.
2. 결정 사항: 이의제기를 수용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함.
네...
뭐 그럴 만한 결과였잖아요? 이미 깨끗하게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더 논쟁적인 이야기를 하거나 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 이론에 대한 실제 사례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 이 글이 실제 사례에서 당사자들의 이름만 숨겨 제시한 것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 구체적인 수치를 주면 모두 실제 사례인 건지
- 학생에게 맥락 파악 못한다는 소리는 회의 의견에 왜 적는 건지
- 선지에서 '실제'라는 단어의 용례가 부사 실제가 맞는지(이건 언매황 여러분께서 알려주세요!!)
에 여전한 회의감이 남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실 저 정도로 끝이었으면 이 글을 남겨 후대에 유전하지도 않았을 텐데, 이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음 장에 적겠습니다.
(5) 후기 및 뒷사람을 위한 조언
사실 제가 이의신청 대표를 맡기로 공언한 뒤로 국어 선생님께서 저를 한 번 호출하셨습니다. 별 생각 없이 따라갔고, 그래도 제가 늘 존경하던 선생님이셨기에 상상 이상의 충격적인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예상대로라면 예상대로랄까요, 선생님께서 '연구부 고사계에 찾아가라'고 하신 말씀은 '해볼 테면 해봐라'는 도발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고 싶은 바를 따르라는 말씀이셨다고 제게 일러주셨습니다. 지금 이의신청을 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마음에 응어리가 남으면 안 된다는 그 말씀을 듣고 감명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요.
그러나 선생님이 처음 말씀해 주신 기각 사유가 위원회 회의 내용에 그대로 들어간 것을 보니(심지어 여러 근거를 덕지덕지 덧붙여서) 선생님의 진의는 제게 '일개 학생이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학생이라면 그걸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는 식의 교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선생님은 제 성격을 잘 알고 계시니, 저와 직접 말다툼을 붙이기보다는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논의를 종결하는 데 방점을 두신 겁니다. 이게 선생님의 교육 방식이라면 저는 진정한 존경을 표하며 물러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이건 미사여구가 아니라 진정한 존경을 담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의신청서 접수부터 회의 결과서 교부까지 직접 경험한 학교의 태도 중에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습니다. 다음은 제가 이의제기 절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면서 알아낸 '이의제기의 문화인류학'입니다. 정식 이의제기를 희망하는(지금 희망하지 않아도 언젠가 한 번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고등학생이 있다면 다음 세 가지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1. 당신이 처음 이의제기를 위해 찾아간 바로 그 선생님이 위원회 최종 회의 결과를 작성합니다.
안 믿기나요? 저는 봤습니다. 교감 선생님이 결재서 최종 검토할 때 'A 선생님(출제자)은 이거 확인하셨죠?' 하고 묻는 모습을요. 제목이 무조건 맞을지는 몰라도 최소한 '큰 영향'을 주는 게 확실합니다.
2. 학교는 개별 학생을 '합리적 사고에 의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주체'로 봐주지 않습니다.
제가 연구부에서 회의 결과서 교부할 때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이 '그렇게 속상했어?', '속상해서 이의제기한 건 아는데'였습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이의제기를 속상한 마음 내지 홧김에 저지르는 감정적 행동 정도로 생각합니다. 이의신청서의 근거 자료와 논거에 대한 답변을 누락한 점에서도 이 사실이 드러납니다. 벌써 어른 취급받고 싶다 이런 건 아닌데 적어도 학생이 최소한의 논리적 사고를 기반으로 결론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 줬으면 합니다.
3. 학교는 생각보다 학생 탓을 잘합니다.
위에서 적은 것처럼 애초에 회의 결과서 자체가 '이의신청자들의 맥락 파악이 잘못됐다'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고, 심지어는 기각 사유를 이해할 수 없다며 결과서를 들고 무턱대고 찾아간 두 명의 친구에게 선생님은 '너희가 이과라서 지문 해석 능력이...'(뒷말은 생략하겠습니다.)와 같은 말을 듣고 왔다고 합니다.
저를 속상해서 이의제기하는 어린이로 치부한 것까지는 참을 인 자로 참는데 친구들이 이과라는 이유로 독해 능력에 대한 폄하를 당했을 때는 도저히 참기가 힘들더군요. 농담이었는지는 몰라도 이의제기를 위해 찾아온 학새에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Q. 그래서 이의제기한 걸 후회하나요??
A. 아니요.
비록 바꾼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안 좋아지기만 한 것 같지만 저는 절대 후회 안 합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은 저의 의무였고, 의무를 이행하는 것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고작 이런 일로 보복을 하지 않으리라는 학교의 선량함 내지는 중립적 무관심, 그리고 지금까지 쌓아 온 선생님들과의 유대 관계를 믿습니다. 뭐, 믿지 않는 것 외에 제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 싶지만요.
Q. 그럼 문제에 이의가 있으면 바로 이의제기하라는 말인가요?
A. 학교 상황, 그리고 내면의 양심을 잘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학교 자체가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거나 최소한 이의제기를 하려는 그 과목이 그렇다면, 한두 번은 더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국어과와 영어과에서 일반적으로 그런 특성이 자주 나탑니다.(아무래도 아 다르고 어 다른 언어이니만큼)
그리고 이의를 제기하려는 그 사유가 너무나도 명확해서 이것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범죄에 가까울 정도의 도덕적 죄악감이 들 때 이의제기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면 정말 죄를 짓는 것처럼 느껴지고, 먼 미래에 지금의 침묵을 후회할 것 같다면 바로 그때입니다.
물론 당신의 이의제기가 위원회 구성원들의 양심마저 공격할 정도로 명백하지 않은 이상 어떻게든 문제를 방어하려는 그들의 시도를 분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눈 딱 감고 침묵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눈 딱 감고 기각 처분하는 게 더 쉽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교에서는 제가 괜스레 걱정했던 것처럼 생기부 등 여러 차원에서 보복이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어쩌겠나요? 그런 것까지 전부 감수하고 하는 게 이의제기인 것을. 저는 감수하기로 했고, 여러분이 선택을 감수할지는 여러분의 몫에 맡기겠습니다.
사실 이 글을 적는 것도 상당히 위험할지 모릅니다. 모교에 이 글을 들키면 또 일이 귀찮아질 수도 있으니...하지만 제가 그럼에도 이 글을 적어 후대에 이야기를 유전하는 이유는 우선 앞서 언급한 대로 '이의제기의 문화인류학' 때문이고, 나머지 하나는 역시나 제 양심이 이 일을 시키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제 위원회의 최종 결정을 겸허히 수용하는 것과 별개로 다른 학내 구성원과 외부인에게 이 전체 사실을 명백히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고(또는 공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였고) 여러분에게 이 사건의 또다른 판단을 맡겨보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또한 저는 이 글이 제가 직접 경험한 진실로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며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만 관계되어 있고, 학업성적관리규정에 의한 이의제기 절차 과정에 관한 어떠한 비밀유지서약서도 쓰지 않았으므로 제가 행한 범법 행위가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제가 겪은 사실과 후대에 남길 조언을 덧붙이다 보니 글에 두서가 없어졌습니다. 아무튼 이 졸작이 회원 여러분의 가십거리로나마 소비되었다면 다행이겠고, 특히 이의제기를 고민하는(또는 고민하게 될) 후배 학생들에게 '앞서 간 사람들 중에는 이런 사람도 있었지' 하는 교훈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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