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국어의 재밌는 현상 (선어말어미의 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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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 수업 시간에 집중했던 사람이라면 위 문장들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낄 것임. 학교 문법에서는 연결어미 ‘-어서’, ‘-(으)ㄹ수록’ 등은 과거를 나타내는 ‘-었-’이나 추측/의지를 나타내는 ‘-겠-’과 함께 쓸 수 없다고 배우기 때문. ‘-어서’는 선행절과 후행절의 사건이 시간적으로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계기적 관계), 선행절에 별도의 시제를 표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임.
하지만 인터넷, 방송, 심지어 일상 대화에선 이러한 규칙들이 심심치 않게 파괴됨. 단순한 실수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점차 이러한 용법이 확산된다는 것을 보면 우리 언어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름. 이금희(2023)에서는 화자의 태도를 드러내기 위한 언중의 전략적인 선택이자, 문법이 변화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함.
전통적으로 시제 선어말어미와의 결합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연결어미들이 점점 변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 었어서 & 겠어서


‘-어서’는 이 현상이 가장 활발하게 나타나는 연결어미임. 원래 ‘계기적 인과’를 나타내는 연결어미로, 선후행절이 동시/순차적으로 발생하기에 시제가 결합할 수 없다고 설명됨. 그렇지만, "어제 비가 왔어서 그런가 날이 선선하네요"와 같은 문장에서 ‘-었어서’는 선행절의 사건이 발화 시점 이전에 이미 일어났음을 명확히 해 줌. ‘비가 와서’라고 해도 의미는 통하지만, ‘왔어서’라고 함으로써 화자는 그 사건이 ‘과거의 일’임을 분명히 하고, 이를 근거로 현재의 상태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을 내놓는 것.
'-겠어서' 역시 마찬가지임. "더는 못 참겠어서 한마디 했다"는 문장은 단순히 ‘못 참아서’라고 했을 때보다, ‘더는 못 참을 것이라는’ 화자의 주관적인 판단이나 의도가 행위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음을 훨씬 더 생생하게 전달함
2. 었을수록 & 겠을수록

‘-수록’ 역시 시제 제약이 완화되고 있음. 원래는 익심(程度)의 비례적 관계를 나타내며 시제 결합이 불가하다고 설명되지만 "어릴 때 유학을 갔을수록 개념 없다고 생각한다"는 문장에서, '-었을수록'은 과거의 경험 정도가 심해질수록 현재의 판단이 강해진다는 의미를 나타냄. ‘갈수록’이 일반적인 비례 관계를 나타낸다면, ‘갔을수록’은 화자의 과거 경험에 기반한 주관적 상관관계를 드러냄. "음식을 못 먹겠을수록 위염에 안 좋은 커피를 마셨다"에서는, 음식을 못 먹을 것 같다는 화자의 주관적 추측의 정도가 심해질수록 역설적인 행동이 뒤따랐음을 보여줌. 즉 '-었을수록'은 과거의 경험을 강조하고, '-겠을수록'은 화자의 추측이나 기대 등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지
3. 었으려고
‘-(으)려고’는 의도를 나타내므로 과거형 ‘-었-’과의 결합이 가장 어색해 보이지만, 매우 특수한 환경에서 고정된 형태로 나타남. “없을 땐 어떻게 살았으려고 이렇게 계속 찍어내나”와 같은 문장이 그 예임. 이는 ‘-(었)으면 얼마나/어떻게 -었으려고’와 같은 특정 구문으로 굳어져, 단순한 의도를 넘어 과거의 사실에 대한 현재 화자의 의심이나 걱정, 반어적 의미를 표현하는 특별한 기능을 수행한다. “오죽하면 먹었으려고요”처럼 종결어미로 쓰여 과거 행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용법으로 쓰이기도 함. 표국대에서도 '-었-+-으려고'는 인정하지만 의심이나 반문을 나타내는 종결어미로서의 쓰임만 인정하고 연결어미로는 인정하지 않음
4. 겠자

동시성을 나타내는 ‘-자’에도 변화가 나타남. “이러다간 안 되겠자 뒷걸음질 쳤다”는 문장에서 ‘-겠자’는 ‘안 될 것 같다’는 주어의 추정을 드러냄. 더 흥미로운 것은 ‘-었자’의 경우다. “이제 와서 후회했자 소용없다”와 같은 문장에서 ‘-었자’는 동시성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고 ‘-하더라도’와 같은 ‘양보’의 의미를 나타내는 별개의 어미로 문법화됐고,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어미를 하나의 표제어로 등재함. '-었자'는 '해 봤자' 같은 표현에서 잘 보임
그렇다면 이러한 제약 완화 현상은 왜 일어나는 걸까? 이금희(2023)에서는 그 핵심 기제를 화자의 주관성 개입과 기준시의 이동에서 찾음.
원래 이 연결어미들은 선행절과 후행절 사이의 객관적인 관계(원인-결과, 비례, 의도-행위, 동시)를 긴밀하게 연결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이 관계가 워낙 긴밀하다 보니, 선행절에 굳이 별도의 시제를 표시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
하지만 언어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전달하지 않음. 화자는 자신의 판단, 추측, 경험, 감정 등 주관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싶어 함. 바로 이때 ‘-었-’과 ‘-겠-’이 전략적으로 사용됨. 즉, 이들 선어말어미는 선행절과 후행절의 객관적인 관계를 살짝 느슨하게 만들고, 그 틈으로 화자의 주관적인 목소리를 집어넣는 장치 역할을 함
이러한 현상은 스위처(Sweetser, 1990)가 제시한 ‘의미 영역’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음
내용 영역 (Content Domain): 실제 세계의 원인-결과. (예: "비가 와서 길이 미끄럽다.")
인식 영역 (Epistemic Domain): 지식과 추론의 원인-결과. (예: "길이 미끄러운 걸 보니, 비가 왔나 보다.")
화행 영역 (Speech Act Domain): 말하는 행위 자체의 이유. (예: "밖에 비 오니까, 우산 가져가.")
‘-었어서’나 ‘-겠어서’가 쓰인 문장들은 내용 영역의 필연적인 인과관계보다는, 선행절의 내용이 후행절의 주장이나 판단, 말하는 행위에 대한 이유나 근거가 되는 인식 영역이나 화행 영역의 관계를 나타냄. “좋은 블로그를 찾았어서 공유합니다”는 ‘찾은 행위’가 ‘공유하는 행위’의 물리적 원인이 아니라, ‘공유라는 화행의 이유’가 되는 것.
이와 함께 중요한 변화는 시제를 판단하는 기준점(기준시)의 이동임. 전통적으로 종속절의 시제는 후행절(사건시 기준)의 상대시제로 해석된다. 하지만 ‘-었-’이 결합하면서 기준점은 후행절에서 화자가 말하는 시점(발화시) 기준의 절대시제로 이동함. "상을 기대하지 않고 갔어서 너무 기뻤어요"라는 문장에서, '갔어서'의 '-었-'은 '기뻤던' 시점보다 앞선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화자가 말하는 지금 이 순간을 기준으로 '갔던' 행위가 과거의 일임을 명확히 찍어주는 역할을 하는 거지. 이는 화자의 주관적 태도, 양태적(modal)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임.
결국, 언중들은 기존의 문법 제약을 완화시켜 선행절의 사건을 ‘화자의 시점’에서 과거의 일로 명시하거나, 화자의 추측이나 의도를 덧붙이는 새로운 문법적 장치를 만들어낸 것임. 이는 사건을 화자 중심적으로 표현하고, 그리고 더 주관적인 태도를 정교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으로 보임.
참고: 이금희(2023) 한국어 연결어미의 시제 선어말어미 ‘-었-’, ‘-겠-’ 제약 완화 현상에 대하여 ‘-어서’, ‘-(으)ㄹ수록’, ‘-(으)려고’, ‘-자’를 중심으로
물론 '-었어서', '-겠어서', '-었으려고' 등 모두 표준적인 쓰임은 아님. 저러한 분석이 학교문법에서 통하지도 않음. 어차피 인정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었어서/겠어서'는 꽤나 수용도가 높기 때문에 몇십 년 후에는 하나의 어미로 인정받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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