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지리와 지구과학의 기묘한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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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처럼 두 학문이 서로의 멱살을 잡고 "이건 내 거!"라고 외치는 식의 애매한 대치 구도는 흔치 않음. 보통은 둘 중 하나임.
1. 영국/유럽식 통합 모델: 지리학(Geography)이라는 큰 우산 아래 자연지리와 인문지리가 공존하는 전통이 강함. 영국의 A-level(대학입학자격시험) 지리 과목만 봐도, 판 구조론이나 기후 변화 같은 자연지리 파트와 도시 문제, 인구 이동 같은 인문지리 파트를 함께 다룸. 이들에게 지리학이란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학문이라는 정체성이 아직 살아있는 거임. 자연 현상 따로, 인간 사회 따로 보는 걸 오히려 이상하게 여김.
2. 미국식 분리 모델: 미국은 좀 더 확실하게 분리하는 경향이 있음. '지구과학(Earth Science)'은 명백히 과학(Science) 교과군의 하나로 취급됨. 지질, 해양, 대기, 천문을 다루는, 말 그대로 지구시스템과학임. 반면 '지리(Geography)'는 사회(Social Studies) 교과군에 속하며, 주로 인문지리, 문화지리, 지역지리에 초점을 맞춘 선택과목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음. 자연지리적 요소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무게중심이 완전히 다름.
즉,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무작정 합치는 게 능사가 아니란 소리임. 그 나라의 학문적 전통과 교육 철학에 따라 각자의 길을 가는 것뿐임. 중요한 건, 그들 대부분은 최소한 자기들끼리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수험생들 머리 아프게 하는 짓은 덜 한다는 거임.
우리나라의 비극은 1차 교육과정(1955-1963)에서 시작됐음. 해방과 전쟁 이후, 국가의 기틀을 잡던 그 시절, 서구의 학문 체계를 급하게 이식하는 과정에서부터.
당시 '지리'는 하나의 과목이었음. 하지만 당시 많은 지리학자들이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북한으로 간 상황에 새로운 교육과정을 만들던 학자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남.
지질학 등을 공부한 이들은 분가를 요구함. 이들이 독립해서 차린 살림이 바로 지학(地學), 개발 과정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자연지리’라는 이름으로 분가되었음. 즉, 천문학을 제외한 오늘날 지구과학의 전신임.
'지학'이 떨어져 나가자, '지리'는 사실상 인문지리만 포괄하게 됨. 실제로 개발 과정에서는 아까 말했듯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라는 이름으로 분가될 예정이었음. 이때부터 우리가 아는 교육과정 상 지리학의 정체성은 반쪽짜리가 되어버림. 가장 핵심적인 지구시스템의 원리를 '지학'에 넘겨준 채, 지표면의 현상과 인간의 활동을 설명해야 하는 기묘한 처지에 놓인 거임.
지리학, 특히 현재의 자연지리는 1차 교육과정에서 '지학'에게 지구 시스템의 근본 원리를 빼앗긴 이후로 깊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음. 만약 지리학이 순수하게 "A 지역엔 카르스트 지형이 있다", "B 지역은 열대우림 기후다"라고 '어디에(Where)' 무엇이 있는지만 나열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그냥 부루마불 게임 설명서나 여행 가이드북이지, 학문이 아님.
학문적 권위를 유지하려면 ‘왜(Why)' 거기에 그게 있는지를 설명해야만 함. 카르스트 지형을 설명하려면 석회암의 용식 작용을 말해야 하고(화학), 열대우림 기후를 설명하려면 대기 대순환과 수렴대를 끌고 와야 함(물리학). 근데 그 '원리'의 소유권은 누가 갖고 있음? 바로 지구과학임.
그래서 지리학은 생존을 위해 지구과학의 영역을 침범할 수밖에 없음. 지구과학에서 다루는 판 구조론, 대기 순환, 해류 같은 핵심 개념들을 '수입'해오는 거임. 단, 그대로 가져오면 자기들만의 학문이 아니게 되니까, 이걸 과학적 원리가 '공간적 분화'와 '인간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자기들만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거임.
예를 들어, 판 구조론 자체의 메커니즘보다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화산과 지진이 집중되어 인간에게 피해를 준다'는 식으로 인간과의 관계를 엮는 것.
반대로 지구과학은 원리 위주이지만, 그 원리만으로는 학생들을 설득하고, 교육과정을 편성하기 어려움. 열역학 법칙, 유체역학, 암석의 광물 조성 같은 것들만 읊어대면 누가 그걸 듣고 있겠음? 실제로 지구과학 붐이 일기 전에 온갖 수모에 시달린 역사를 생각하면..
지구과학 역시 그 추상적인 원리가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줘야 함. 근데 그 가장 좋은 증거물들이 어디에 널려있음? 바로 지리학의 전통적인 놀이터인 지표면에 널려있음. 지금과 매우 다른 09개정 지구과학1이 우주와 지리 소리를 들은 것은 이러한 확장성의 예시임. 실제로 먹혀서 지구과학 선택자가 폭증하기도 했고.
결국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입시 시장에서 학생들을 한 명이라도 더 끌어오기 위해 남의 땅을 밟고 서서 손짓해야만 하는 촌극이 계속되는 거임. 지금 우리가 보는 자연지리와 지구과학의 모호한 경계선은, 학문적 필요에 의한 결과가 아님. 70년 전 일부 학자들의 정치적 독립 투쟁과, 그로 인해 반신불수가 된 채 남겨진 지리학의 역사적 상흔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결과물일 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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