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지리와 지구과학의 기묘한 동거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73584093
한국처럼 두 학문이 서로의 멱살을 잡고 "이건 내 거!"라고 외치는 식의 애매한 대치 구도는 흔치 않음. 보통은 둘 중 하나임.
1. 영국/유럽식 통합 모델: 지리학(Geography)이라는 큰 우산 아래 자연지리와 인문지리가 공존하는 전통이 강함. 영국의 A-level(대학입학자격시험) 지리 과목만 봐도, 판 구조론이나 기후 변화 같은 자연지리 파트와 도시 문제, 인구 이동 같은 인문지리 파트를 함께 다룸. 이들에게 지리학이란 인간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학문이라는 정체성이 아직 살아있는 거임. 자연 현상 따로, 인간 사회 따로 보는 걸 오히려 이상하게 여김.
2. 미국식 분리 모델: 미국은 좀 더 확실하게 분리하는 경향이 있음. '지구과학(Earth Science)'은 명백히 과학(Science) 교과군의 하나로 취급됨. 지질, 해양, 대기, 천문을 다루는, 말 그대로 지구시스템과학임. 반면 '지리(Geography)'는 사회(Social Studies) 교과군에 속하며, 주로 인문지리, 문화지리, 지역지리에 초점을 맞춘 선택과목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음. 자연지리적 요소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 무게중심이 완전히 다름.
즉,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무작정 합치는 게 능사가 아니란 소리임. 그 나라의 학문적 전통과 교육 철학에 따라 각자의 길을 가는 것뿐임. 중요한 건, 그들 대부분은 최소한 자기들끼리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수험생들 머리 아프게 하는 짓은 덜 한다는 거임.
우리나라의 비극은 1차 교육과정(1955-1963)에서 시작됐음. 해방과 전쟁 이후, 국가의 기틀을 잡던 그 시절, 서구의 학문 체계를 급하게 이식하는 과정에서부터.
당시 '지리'는 하나의 과목이었음. 하지만 당시 많은 지리학자들이 자의적이건 타의적이건 북한으로 간 상황에 새로운 교육과정을 만들던 학자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남.
지질학 등을 공부한 이들은 분가를 요구함. 이들이 독립해서 차린 살림이 바로 지학(地學), 개발 과정에서는 더욱 노골적으로 ‘자연지리’라는 이름으로 분가되었음. 즉, 천문학을 제외한 오늘날 지구과학의 전신임.
'지학'이 떨어져 나가자, '지리'는 사실상 인문지리만 포괄하게 됨. 실제로 개발 과정에서는 아까 말했듯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라는 이름으로 분가될 예정이었음. 이때부터 우리가 아는 교육과정 상 지리학의 정체성은 반쪽짜리가 되어버림. 가장 핵심적인 지구시스템의 원리를 '지학'에 넘겨준 채, 지표면의 현상과 인간의 활동을 설명해야 하는 기묘한 처지에 놓인 거임.
지리학, 특히 현재의 자연지리는 1차 교육과정에서 '지학'에게 지구 시스템의 근본 원리를 빼앗긴 이후로 깊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음. 만약 지리학이 순수하게 "A 지역엔 카르스트 지형이 있다", "B 지역은 열대우림 기후다"라고 '어디에(Where)' 무엇이 있는지만 나열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건 그냥 부루마불 게임 설명서나 여행 가이드북이지, 학문이 아님.
학문적 권위를 유지하려면 ‘왜(Why)' 거기에 그게 있는지를 설명해야만 함. 카르스트 지형을 설명하려면 석회암의 용식 작용을 말해야 하고(화학), 열대우림 기후를 설명하려면 대기 대순환과 수렴대를 끌고 와야 함(물리학). 근데 그 '원리'의 소유권은 누가 갖고 있음? 바로 지구과학임.
그래서 지리학은 생존을 위해 지구과학의 영역을 침범할 수밖에 없음. 지구과학에서 다루는 판 구조론, 대기 순환, 해류 같은 핵심 개념들을 '수입'해오는 거임. 단, 그대로 가져오면 자기들만의 학문이 아니게 되니까, 이걸 과학적 원리가 '공간적 분화'와 '인간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자기들만의 스토리텔링을 만들어내는 거임.
예를 들어, 판 구조론 자체의 메커니즘보다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화산과 지진이 집중되어 인간에게 피해를 준다'는 식으로 인간과의 관계를 엮는 것.
반대로 지구과학은 원리 위주이지만, 그 원리만으로는 학생들을 설득하고, 교육과정을 편성하기 어려움. 열역학 법칙, 유체역학, 암석의 광물 조성 같은 것들만 읊어대면 누가 그걸 듣고 있겠음? 실제로 지구과학 붐이 일기 전에 온갖 수모에 시달린 역사를 생각하면..
지구과학 역시 그 추상적인 원리가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줘야 함. 근데 그 가장 좋은 증거물들이 어디에 널려있음? 바로 지리학의 전통적인 놀이터인 지표면에 널려있음. 지금과 매우 다른 09개정 지구과학1이 우주와 지리 소리를 들은 것은 이러한 확장성의 예시임. 실제로 먹혀서 지구과학 선택자가 폭증하기도 했고.
결국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고, 입시 시장에서 학생들을 한 명이라도 더 끌어오기 위해 남의 땅을 밟고 서서 손짓해야만 하는 촌극이 계속되는 거임. 지금 우리가 보는 자연지리와 지구과학의 모호한 경계선은, 학문적 필요에 의한 결과가 아님. 70년 전 일부 학자들의 정치적 독립 투쟁과, 그로 인해 반신불수가 된 채 남겨진 지리학의 역사적 상흔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결과물일 뿐임.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부모님과 주변 친척들이 다들 인서울 나오고 카이스트 포스텍 나오고 그러니까 최종...
-
k가 6의 약수인 걸 배각 써서 30초만에 보여버림 ㄷㄷ 씹고능하다
-
평가원 #~#
-
뭐가 나음? 둘다 해본 사람 있으려나
-
그냥 잘할수있는거 선택하는게맞겠죠? 국어 언매 화작 수학
-
아.
-
요플레 뚜껑 6
여러분들은 요플레 뚜껑 핥아먹나요? 아니면 버리나요? 뚜껑에 묻어있는 건 맛이...
-
영어 과외 돈 아까움? 10
영어 문접원+수특 스스로 분석+그간 해왔던 김기철t 커리 복습+단어암기+평가원 문제...
-
개잘생겼당 0
남자가 봐도 진심 너무 잘생겼는데 노래도 잘 하고...
-
다 좋은데 얘네는 자꾸 독서론을 어렵게 낸다고.....
-
대학 보내고 싶은 거냐
-
근데 시즌1 난이도 6모 14번,21번 정도 한다는데…흠.. 살까요?
-
하사십 끝나고.. 흐흐
-
학교 홈피나 입학처 홈피가 안들어가짐
-
설맞이 입고 1
설맞이 7월 8일부터 순차 배송인거죵?
-
약간 승리쌤이 맞는지 고민인 시점이라… 대인라로 들어도 따라갈 수 있을까요?...
-
그니까 나에게 28 30을 달라
-
내가 확인하기로 함.
-
무리인가요
-
글을 읽을때 머리속에서 상상되는 목소리는 대체 누굴까
-
그래서 음식물 하나도 안남기고 다먹음 그래서 초딩때 얻은게 뚱뚱한 몸 그땐 애들이...
-
아 예쁘다 3
너무 잘 만든 듯 흐흐
-
어때요?
-
이건 못참겠다
-
본인 기만할꺼 14
방금 비요뜨 뜯음
-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싶음 이탈리아 노래도 좋아하는데 어휘만 알고 자세한 문법을 모름
-
나 혼자 28년 후 보는데 너무 무섭다… 영화볼 때 폰 절대 안보는데 무서워서 보는 중…
-
ㅜ
-
오르면 너무 올라서 겁나서 못들어 가겠고 떨어진거 사면 바닥이 아니라 지하 뚫고...
-
9모끝나고 가는거 오반가요?ㅠㅠ 친구가 스탠딩 티켓팅 두개 잡아줬는데
-
계절학기듣는분 3
전안들음ㅋ
-
수능이 사람 망치네.. 빨리 대학을 가야..
-
어짜피 강의들어서 필요없음
-
아이디어 공통 확통 병행중인데 다른 분들 보면 아이디어 듣고 80점대 나오고...
-
설맞이 이거 9
이번에 시즌제로 바뀌어서 시즌1 쉬우려나 기존 계획보다 어려워졌다고 하긴 하던데
-
다들 어르신보다는 빠르잖아요.
-
진짜 참을수없는화가나네
-
작년부터 생긴 느낌
-
이런 것 좀 많이 만들어줘요.. 재미씀
-
설맞이 드디어 나왔구나 11
설맞이 이해원s2 샤인미까지만 풀어야겠다
-
저녁머머글까 21
-
메인글 관련이었구나 전 학생들 가르칠 때 발문에서 최고차 양수라고 안 준거면 이거...
-
. 2
-
ㅋㅋㅋ
첫번째 댓글의 주인공이 되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