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esthetica [1260641] · MS 2023 · 쪽지

2025-06-22 17:04:11
조회수 177

경외감으로 쓰여진 시, '살구꽃과 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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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대치미탐에서 수능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이상헌입니다. 


현재 6모 현대시 기출 ‘살구꽃과 한 때’의 마지막 문장에서 경외감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는지 의견이 분분한 상태입니다. 저는 경외감이라는 독특한 감정을 추론해 내는 것이 오히려 이 시를 감상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을 이룬다는 점, 그리고 경외감이라는 감정은 화자가 보여주고 있는 정교한 언어적 빌드업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추론된다는 점 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먼저 다음의 문장들을 봅시다. 



[살구꽃=구름] 모든 것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화자는 이질적인 개념인 ‘구름’과 ‘살구꽃’을 연결짓는데, 이는 ‘앞으로 나의 시적 세계에서 구름이라는 단어는 살구꽃으로 치환해도 무방하다.’는 독특한 규칙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살구꽃=구름]은 ‘하늘의 기둥’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마지막 파트에 이르기까지 작품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독특한 규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문장도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통상적인 하늘에서의 구름은 온통 마을에 내려와 있기 힘들겠지만, 살구꽃이 구름으로 치환될 수 있는 이상 살구꽃, 즉 연분홍빛 꽃구름이 마을에 온통 내려와 있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다음과 같은 느낌의 그림으로 이해하면 보다 직관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여기에서 끝났다면 이 시는 그렇게까지 흥미롭고 정교한 시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뒤이어 화자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합니다. 



자동차 백 미러 혹은 사이드 미러를 통해 살구꽃, 즉 구름2를 바라본 화자는 이내 자동차 거울로는 포착되지 않지만 그 존재가 추측되는 무언가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즉, 구름2를 머리에 얹고 지탱하고 있는 나무 둥치였죠. 다음과 같은 그림을 떠올려 봅시다.



이제 시의 마지막 파트를 살펴 봅시다.



화자는 차 거울로는 보이지 않았던 나무 둥치를 직접 목격하기 위해 차를 멈추고 뒤돌아 보는 행동을 취합니다. 꽃구름의 경우에는 차 거울로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뒤돌아 보지 않았던 것과 구분되네요. 그리고 마침내 이 시의 하이라이트인 ‘하늘의 기둥’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살구꽃=구름]이라는 규칙을 상기해 보죠. 해당 규칙이 도입됨으로써 이 규칙을 전제한 화자의 눈에는 하늘의 경계가 확장되어 보입니다. 통상적 세계에서 하늘의 경계는 구름1이 위치한 영역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구름2가 추가된 이상 하늘의 경계는 살구꽃이 핀 마을까지 ‘온통 내려’오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왜 마지막 순간 화자가 나무 둥치를 ‘하늘의 기둥’으로 표현했는지 알게 됩니다. 나무 둥치는 [살구꽃=구름]이라는 규칙을 통해 새롭게 설정된 하늘의 경계에 접해 있는 존재이자, 하늘을 머리 위에 지탱하고 있는 존재, 그야말로 하늘의 기둥이 되는 셈입니다.



이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살구꽃 나무 둥치가 [살구꽃=구름]이라는 새로운 규칙이 도입된 세계관 내에서 무려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시적 대상의 존재론적 지위가 격상되었다고나 할까요? 시인은 [살구꽃=구름]이라는 단순한 규칙을 통해 나무 둥치가 하늘의 기둥이라는 역할을 부여받게 되는 과정을 정교하게 보여줌으로써, 사물의 경계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나오는 경탄은 단순히 시적 대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에 그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각적으로 재구성된 세계에서 나무 둥치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무게를 지탱하고, 도무지 그 존재의 방식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머금은 채 화자의 눈 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자가 내뱉은 감탄은 경외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고, 오히려 경외감이라는 감정을 추론해 내는 것이야말로 이 시의 이지적인 아름다움을 적절하게 음미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종종 시인들이 자신의 넘치는 정념에 사로잡혀 창작 활동을 한다고 단순화하지만, 사실 시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섬세한 언어적·형이상학적 규칙을 도입하여 독자에게 일정한 추론을 유도하는 자들입니다. 황동규 시인의 ‘살구꽃과 한 때’ 역시 [살구꽃=구름]이라는 심플한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멋진 시적 귀결들이 도출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고, 경외감이라는 감정 역시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여 이해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수능국어 이상헌T

✤ 현역 수능 498/500점

✤ 서울대 법학과 학사 서울대 철학과 석사 졸업

✤ 상상국어 모의고사 출제위원

✤ 미래탐구 전속강사

✤ 대치 미래탐구 ・ 대치 메카 ・ 대치 스터디브릭스 등 출강

https://linktr.ee/myster.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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