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외감으로 쓰여진 시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73565516
안녕하십니까?
미래탐구 전속강사로 대치 미래탐구학원, 중계 학림학원 등에서 수능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이상헌입니다.
(https://linktr.ee/myster.lee)
현재 6모 현대시 기출 ‘살구꽃과 한 때’의 마지막 문장에서 경외감이 드러난다고 볼 수 있는지 의견이 분분한 상태입니다. 저는 경외감이라는 독특한 감정을 추론해 내는 것이 오히려 이 시를 감상하는 데에 있어서 핵심을 이룬다는 점, 그리고 경외감이라는 감정은 화자가 보여주고 있는 정교한 언어적 빌드업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추론된다는 점 등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먼저 다음의 문장들을 봅시다.
[살구꽃=구름] 모든 것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화자는 이질적인 개념인 ‘구름’과 ‘살구꽃’을 연결짓는데, 이는 ‘앞으로 나의 시적 세계에서 구름이라는 단어는 살구꽃으로 치환해도 무방하다.’는 독특한 규칙을 선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살구꽃=구름]은 ‘하늘의 기둥’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마지막 파트에 이르기까지 작품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독특한 규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문장도 자연스럽게 도출됩니다.
통상적인 하늘에서의 구름은 온통 마을에 내려와 있기 힘들겠지만, 살구꽃이 구름으로 치환될 수 있는 이상 살구꽃, 즉 연분홍빛 꽃구름이 마을에 온통 내려와 있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다음과 같은 느낌의 그림으로 이해하면 보다 직관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여기에서 끝났다면 이 시는 그렇게까지 흥미롭고 정교한 시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뒤이어 화자는 놀라운 이야기들을 합니다.
자동차 백 미러 혹은 사이드 미러를 통해 살구꽃, 즉 구름2를 바라본 화자는 이내 자동차 거울로는 포착되지 않지만 그 존재가 추측되는 무언가에 대해서 추가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즉, 구름2를 머리에 얹고 지탱하고 있는 나무 둥치였죠. 다음과 같은 그림을 떠올려 봅시다.
이제 시의 마지막 파트를 살펴 봅시다.
화자는 차 거울로는 보이지 않았던 나무 둥치를 직접 목격하기 위해 차를 멈추고 뒤돌아 보는 행동을 취합니다. 꽃구름의 경우에는 차 거울로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뒤돌아 보지 않았던 것과 구분되네요. 그리고 마침내 이 시의 하이라이트인 ‘하늘의 기둥’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살구꽃=구름]이라는 규칙을 상기해 보죠. 해당 규칙이 도입됨으로써 이 규칙을 전제한 화자의 눈에는 하늘의 경계가 확장되어 보입니다. 통상적 세계에서 하늘의 경계는 구름1이 위치한 영역에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구름2가 추가된 이상 하늘의 경계는 살구꽃이 핀 마을까지 ‘온통 내려’오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왜 마지막 순간 화자가 나무 둥치를 ‘하늘의 기둥’으로 표현했는지 알게 됩니다. 나무 둥치는 [살구꽃=구름]이라는 규칙을 통해 새롭게 설정된 하늘의 경계에 접해 있는 존재이자, 하늘을 머리 위에 지탱하고 있는 존재, 그야말로 하늘의 기둥이 되는 셈입니다.
이제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살구꽃 나무 둥치가 [살구꽃=구름]이라는 새로운 규칙이 도입된 세계관 내에서 무려 하늘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이 되었습니다. 시적 대상의 존재론적 지위가 격상되었다고나 할까요? 시인은 [살구꽃=구름]이라는 단순한 규칙을 통해 나무 둥치가 하늘의 기둥이라는 역할을 부여받게 되는 과정을 정교하게 보여줌으로써, 사물의 경계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나오는 경탄은 단순히 시적 대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에 그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각적으로 재구성된 세계에서 나무 둥치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무게를 지탱하고, 도무지 그 존재의 방식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신비로움을 머금은 채 화자의 눈 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자가 내뱉은 감탄은 경외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고, 오히려 경외감이라는 감정을 추론해 내는 것이야말로 이 시의 이지적인 아름다움을 적절하게 음미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종종 시인들이 자신의 넘치는 정념에 사로잡혀 창작 활동을 한다고 단순화하지만, 사실 시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섬세한 언어적·형이상학적 규칙을 도입하여 독자에게 일정한 추론을 유도하는 자들입니다. 황동규 시인의 ‘살구꽃과 한 때’ 역시 [살구꽃=구름]이라는 심플한 규칙을 철저히 준수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멋진 시적 귀결들이 도출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고, 경외감이라는 감정 역시 이러한 맥락을 고려하여 이해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진짜모름)
-
얘 눈이 너무 맑은눈의 광인같지 않아요?
-
실전개념 강의 0
빠르게 들을수 있는 실전 개념 강의 ㅊㅊ받아요
-
매일만보걷기 3
수명 연장을 위한 최소한의 운동...
-
적백받고싶다 2
어떻게받는거임?
-
역사 영상 볼 때마다 드는 생각 아주 미친놈들 역사만 보면 걍 싹 없어져야 함 아 음악 빼고
-
국어보다는 수학이 강점이신거같아서 사문 끼고 갈 줄 알았는데 쌍윤은 의외네요
-
카톨릭 단대 성신 라인 법대 vs 최대한 높은 대학 낮은 과 3
로스쿨이 목표인데 법학과 있는 학교를 쓰는게 유리한가요.. 아니면 그냥 높은 학교...
-
안녕하세요! 6모 이후에 칼럼을 쓰겠다는 약속을 지키러 온 동메달입니다. 여러분들이...
-
걍 말투 행동부터 완전히 달랐음 진짜와 가짜의 차이인가 헉
-
5927957 0
오르비언들
-
올해 재수하는 문과 06입니당 작년에 최저 못 맞춰서 6광탈하고 올해 1월 초부터...
-
그만 araboja.....
-
최지욱 질문 0
작년에 최지욱 몇주 듣다가 자료는 좋았는데 영상 너무 과하게 많이줘서 탈주함...
-
25 수능 ‘배를 밀며‘ 13 6평 ‘배를 매며‘
-
기말 끝나고 서바 시즌에 종민쌤 라이브 들으려고하는 현역입니다. 6모는 84점...
-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고... 이런 날엔, 너 같은 꼬마들은...
-
탈릅합니다 2
언젠간 다시 봅시다 혹시 덕코받고싶으신분?
-
반국가세력들 척결, 북괴 처단, 간첩 처단, 등등 이런식으로 70,80년대...
-
일단 성적) 작수 90 문학4틀 화작1틀 이번 6모 95 문학1틀 화작1틀(급하게...
-
글쓰고 욕먹고 대댓달고 근데생각해보면 얕게 생각하고 글쓰는 내잘못이 맞음 빠른시일내오르비탈퇴해야겠음
-
스블 뉴런? 3등급 친구들은 사실 엄청 크게 도움 안됨 아니면 너무 힘들거나...
-
옛날에 자기 순자산 19억에 메쟈의 25학번이라는 분이 4
스레드에서 오만곳을 다 돌아다니면서 아무한테나 시비털며 저능아 지잡 설잡충 어쩌구...
-
지금 강기분 다끝내감 이거 10월까지 끝낼수있음? 끝낼수있으면 얼마나 걸리려나
-
풀만한가요???
-
⑤ (가)와 (나)는 모두 영탄적 표...경외감을 드러내고 있다. 고3 |...
-
이란 “핵 포기하지 않을 것…美 공습은 국제법 위반” 3
이란 원자력청(AEOI)이 21일(현지시간) 미국의 핵 시설 공습이 있었지만 핵...
-
난리났네 2
내일 미장..ㅠㅠ
-
국경선에다 원전 세우고 적군 쳐들어 올때 터뜨리면 핵폭탄인데 외않함?
-
전에 알던 사람 중 의대목표 재수생이면서 교회 일주일에 7번 가는사람 있었음 종교에...
-
근데 강의만 봐도 인성 안 좋을것 같은 사람들이 있음 7
막 학원 가서 원장한테 차키 던지면서 주차해오라고 할것같은 사람들ㅇㅇ
-
ㅅㅂ...
-
“美, 포르도에 벙커버스터 12발, 다른 핵시설에 토마호크 30발 폭격” 0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핵 시설 3곳을 성공적으로 공격했다고 밝힌...
-
https://searchco.info/main?recommend=66TDV 가입...
-
흠.... 7/1~7/4 6모 분석서 나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아까까지개배고찻는대 막상 점심시간되니까배가안고푸네 ㅡㅡ
-
이 노래 개좋음 0
AJR - Sober up Benson Boone - Momma song
-
부산대 입결은 5
다른학교보다 심하기쳐박음?
-
질문들 1
수분감은 등급별 상관없이 무조건 step 2까지 한꺼번에 다 풀어야 하나요? 그리고...
-
난 우리나라도 나름 쌈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스라엘은 전세계를 뒤져도 저만한 쌈닭이...
-
놀라운 사실은 아직 15,22는 안했다는거임..
-
몇일전 서울에서 봣는데 진짜 말도안됨 요정임 걍 화면이 실물을 못담는다해야하나 얼굴...
-
ㅁㅌㅊ?
-
제시카 외동딸 0
일리노이 시카고 과 선배는 김진모 그는 네 사촌
-
관리자들중에 세력이 있고 그 세력이 특정 여론을 조작하는데 관리자도 그걸 누군지 알...
-
솔루션 준다 0
시발점을 끝냈다 개때잡으로 뉴런이 쉽다 담금질로 킬캠 80이상 나온다 굴욕감으로
-
보조개 6
어릴때 없었는데 고등학교때부터 계속 웃고 다니니까 보조개 비슷한거 생김
-
아 대인라 신청 1
까먹었다 ㅅㅂ 정수햄 ㅠㅠㅠㅠㅠㅠ 이거 혹시 나중에 2 3 4차 때 들어갈 수 있는 확률 높음??
-
맞팔 급구 15
뉴비입니다
81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