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라몬 [1325791] · MS 2024 · 쪽지

2025-06-06 22: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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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 재밌는 비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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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라고 불리는 오늘날의 서구의 문물이 수입되기 이전, '비노'로 불리던 전통적인 비누는 팥이나 녹두 등의 콩류나 쌀 등의 곡류를 맷돌로 갈아 껍질을 벗기고 다시 곱게 갈아 체에 쳐서 만든 가루 형태의 세정제였음. 당시 문헌에서는 '비조(肥皂)', '조두(澡豆)' 등의 한자어로도 표기되었음.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서구와 일본의 신식 비누가 전래되는데, 이 때문에 원래 콩류나 곡류를 갈아 세안을 하던 조선인들의 문화가 바뀌어 버림. 유지(油脂)에 수산화나트륨을 섞은 뒤 굳혀 만든 서구식 비누가 수입된 거지. 새로운 문물인 고체 비누가 들어오자, 기존 단어인 '비누'가 이 신식 비누까지 포괄하여 지칭하는 의미 확장이 일어남. 그래서 개항 초기 자료들을 보면 서구식 비누를 '비누' 내지는 '肥皂'로 표기함. 


근데 이 '비누' 말고 석감(石鹼)도 개항 초기에는 자주 쓰였는데 '석감'은 일본에서 만든 신식 고체 비누를 뜻했음. 본래 일본어에서 '石鹼'은 원래 잿물을 밀가루로 굳힌 것을 뜻했지만 서구식 비누가 도입되며 의미 전이를 겪었고, 일본산 신식 비누가 국내로 수입되는 과정에서 일본어의 전이어 ‘石鹼’도 한국어에 차용된 거임. 이 때문에 고유어 근대 신어 '비누'와 일본계 차용어인 '석감'이 새로운 문물인 '고체 비누'를 두고 경쟁하는 구도가 형성됨



지금에야 '비누'를 전통적인 '비누'를 말하는 데 잘 쓰이지는 않지만 20세기 초중반만 하더라도 '비누'는 근대신어로서의 용법 말고도 재래어로서의 의미를 계속 간직하고 있었음. 근데 여러 의미가 혼재되자, 의미 분화를 위한 여러 전략이 나타남. 신문물의 외래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접두사를 붙인 '왜비누(倭-)'라는 표현이 등장함. 기존의 '비누'와 구별하려는 시도였지. 또, '비누'가 점차 신식 고체 비누를 뜻하게 되자 반대로 전통 가루 비누를 구별해야 됐음. 이를 위해서 재료를 강조한 '팥비누'라는 명칭이 등장함. 


20세기 전반기 신문 기사나 광고에서는 '석감'과 '비누'가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매우 흔했음. 예를 들어, 제품명은 '석감'으로 표기하고 작은 글씨로 '비누'를 덧붙이는 식으로. 이러한 긴밀한 관계가 차용어 '석감'의 의미를 '비누'가 흡수하고, '비누'의 의미 이동이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음.


이 때문에 현재 국어사전에 '비누'는 신식 비누를, '팥비누'는 재래식 가루 비누를 뜻하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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