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언어 이야기: 부엌에[*부어게]와 빛을[*비슬]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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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학교문법에서 음운 단원을 처음 배울 때 '부엌에'의 표준 발음은 [부어게]가 아니라 [부어케]이고, '빛을'의 표준 발음은 [비슬]이 아니라 [비츨]이라는 걸 배운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비규범 발음이 더 익숙한 걸까? 우선 ㅋ>ㄱ, ㅍ>ㅂ부터 보자. 명사 ‘부엌’과 ‘무릎’의 단독형은 [부억]과 [무릅]으로 발음된다. 화자들이 이처럼 발음하는 이유는 이 명사가 단독형일 때 말음의 종성이 대표음으로 교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엌+에’ 또는 ‘무릎+이’와 같이 명사가 모음 조사와 결합된 구성에서 국어 화자들은 표준 발음 대신에 [부어게]와 [무르비]로 발음하곤 한다. 이는 명사 단독형의 실제 발음인 [부억]과 [무릅]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어울려 연음이 된 발음이다. 이러한 이유는 대표음으로 교체된 명사 단독형이 기본형으로 인식되고 그 뒤에 모음 조사가 오면 바로 연음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명사 단독형이 기본형으로 인식되는가인데, 그 이유에 대해 고광모(2014)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자는 고립형이 기본형으로 인식되는 이유를 고립형 자체의 특성에서 찾는 다. 우리가 사물의 이름을 머리에 떠올릴 때 떠오르는 단어는 으레 고립형이다. 사실 어떤 경우에나 우리가 체언을 머리에 떠올리면 으레 고립형이 떠오른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고립형이 우월적 지위를 가질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국어에서 체언의 고립형이 기본형으로 인식되는 데는 위의 사실이 결정적 으로 작용한다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즉 '무릎>무릅', '값>갑', '닭>닥', '부엌>부억' 등 모두 언중이 고립형을 기본형으로 인식하면서 나타난 평준화란 거다. 꽤 자주 쓰이는 말인 '오지랖'의 발음 역시 이와 같다. 전자는 표준, 후자는 평준화가 일어난 언중의 현실 발음이다.
오지랍# 오지랍#
오지랖-이 오지랍-이
오지랖-을 오지랍-을
오지랍-과 오지랍-과
단독형이거나 자음으로 시작하는 조사 앞에서의 형태가 곧 기본이라고 인식되고 원래 형태를 잡아먹는 일종의 주객전도가 발생한 거다.
이제 ㄷ, ㅈ, ㅊ, ㅌ>ㅅ의 변화를 보자
꽃을[꼬슬], 머리숱이[머리수시]와 같은 비표준 발음은 흔히 들을 수 있다. 어째서일까? ㅊ이나 ㅌ이 ㅅ으로 마찰음화라도 하는 걸까?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하지만, 고광모(1989)와 고광모(2014)의 해석이 가장 합리적이다. 우선 근대국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음절말 중화 그러니까 아직 ㅅ의 대표음 교체가 일어나지 않던 중세국어에서 근대국어로 넘어오며 음절말 ㅅ의 음가는 ㄷ과 같아졌다. 즉 ‘ᄉ’ 말음 체언들이 ‘ᄉ∼ᄃ’의 교체를 갖게 된 거다. 그런데 고립형이 기본형으로 인식되면서 고립형의 말음은 결국 /ㄷ/으로 인식된다(왜냐면 더 이상 말음 ㅅ과 말음 ㄷ의 발음 차이는 없으므로). 그리고 교체를 일으키는 공시적(근대국어 시기) 규칙은 모음 조사 앞에서 적용되는 연음 즉 /ㄷ/>/ㅅ/이 되었다. 왜냐면 말음의 발음은 대표음 /ㄷ/이었겠지만 그 대표음은 ㅅ에서 교체된 것이므로 연음이 일어난다면 당연히 ㅅ으로 연음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ㄷ>ㅅ이라는 전도된 규칙이 완성된다.
언매에서 15세기의 팔종성법을 배운 사람은 알겠지만, 15세기에는 ‘ᄃ, ᄉ’ 말음 체언의 고립형과 모음 조사 앞의 형태가 각각 같았고 ‘ᄌ, ᄎ’ 말음 체언의 고립형은 끝에 ‘ᄉ’을, ‘ᄐ’ 말음 체언의 고립형은 끝에 ‘ᄃ’을 가졌다('꽃'이 '곷'이 아니라 '곳'으로, '밭'이 '밭'이 아니라 '받'으로 표기됐다는 소리). 그런데 그 고립형들이 각각의 기본형이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ᄃ, ᄉ, ᄌ, ᄎ, ᄐ’ 말음 체언들은 모음 조사 앞에서 각각 연음 법칙에 의해
ᄃ→ᄃ
ㅅ→ㅅ
ㅅ→ㅈ
ㅅ→ㅊ
ㄷ→ㅌ
의 적용을 받았을 것이다(왼쪽이 고립형, 오른쪽이 연음).
그러다가 16세기에 음절말의 변화 ‘ᄉ>ᄃ’이 일어난 뒤에는 ‘ᄃ, ᄉ, ᄌ, ᄎ, ᄐ’ 말음 체언들이 모두 고립형에서 말음이 ㄷ으로 발음됐다. 그러니 모음 조사 앞에서 각각 연음 법칙
ㄷ→ㄷ
ㄷ→ㅅ
ㄷ→ㅈ
ㄷ→ㅊ
ㄷ→ㅌ
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이 규칙들 가운데서 ㄷ→ㄷ을 제외한 ㄷ→ㅅ, ㄷ→ㅈ, ㄷ→ㅊ, ㄷ→ㅌ은 ㅅ>ㄷ이라는 통시적 변화와 반대의 방향의 변화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ㅅ되기'가 발생하는데, 바로 'ㅅ 되기'는 규칙 'ㄷ→ㅈ, ㄷ→ㅊ, ㄷ→ㅌ'의 적용을 받던 체언들이 규칙 'ㄷ→ㅅ'의 적용을 받게 됨으로써 후자의 적용 범위가 넓어진, 즉 ‘ᄃ~ᄉ’의 교체가 확대된 유추적 확대인 거다. 다른 규칙의 적용을 받던 체언들이 적용 빈도가 월등하게 높은 규칙 ㄷ>ㅅ에 하나씩 먹혀 들어간 것이다.
‘ᄌ, ᄎ, ᄐ’ 말음 체언의 'ㅅ되기' 역시 이와 비슷하다. 고립형이 기본형이 되는 재구조화가 이루어지고 그 기본형에 전도된 규칙이 적용된 결과이다. 다시 말하자면 'ㅈ, ㅊ, ㅌ'은 음끝규에 의해 ㄷ 말음으로 재구조화되고 ㄷ>ㅅ의 변화를 적용받아 이 규칙이 확대됐단 얘기다. 이 역시 'ㅈ, ㅊ, ㅌ' 말음 체언의 독립성으로 단독형(음끝규가 적용된)이 기본형으로 인식되었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따라서 'ㅅ되기'라는 현상은 근대국어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현상이며, 이 때문에 방언에서는 ㄷ, ㅈ, ㅊ, ㅌ 말음인 표준어와 다르게 말음이 ㅅ인 경우가 왕왕 보이는 거다.
또 하나 재밌는 점은 공간/시간 명사에서 처격 형태(X+에)의 사용 빈도가 높으므로 ‘ㄷ, ㅈ, ㅊ, ㅌ>ᄉ’의 변화에 강하게 저항한다는 것인데, '앞'이나 '밑'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앞에'나 '밑에', 혹은 '밑을' 같은 경우는 '숲'이나 '팥'과 달리 ㅅ되기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고립형이 기저형이라고 인식되기에는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너무 흔히 쓰이다보니 그렇게 인식되기가 어려운 거다. 그러니까 처격형의 빈도가 아주 높아서 우리의 머리에 처격형이 고립형에 못지 않게 우선적으로 떠오르고, 공간/시간 명사의 처격형이 하나의 단위로 거의 굳어지다시피 한 것이다.
참고 문헌
고광모(2014) 체언 끝의 변화 'ㄷ, ㅈ, ㅊ, ㅌ>ㅅ'에 대한 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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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니다.
언중이 생각하는 기본형이 고립형이기도 하고 처격이기도 한게 흥미롭네요. ㅅ되기는 처음 봤는데 평소 궁금했던 점이 해소됐어요.
*두 번째 문단 첫 문장의 예시를 '숲+이'에서 '무릎+이'로 변경하신 것 같은데, 첫 문장에선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확인해주세요. :)
아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국문과 교수님들한테 오프더레코드처럼 들었던 이야기인데
부엌 같은 경우에는 1988년 표준어 제정 당시 '부억'을 표준어로 밀던 사람들이 많았다 카더라...라는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팩트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부엌'은 보이지 않고 '부억'이나 '부업'으로만 쓰였다는 것. 이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듯. '부엌'은 20세기에 처음 등장한 표기임
20세기 초에도 여러 문헌 자료에 '부억'으로 쓰인 기록이 많습니다. 다만 '부엌'을 88년에도 밀었을지는 의문입니다. 88년 맞춤법에 큰 영향을 미친 게 큰사전의 존재라...
'부엌'은 보통학교 조선어사전(1925)와 수정증보선어사전 (1938)에서 표제어로 실리게 되며 점차 쓰임이 확장되고 한글학회의 큰사전(1950) 이후로 표제어는 ‘부엌’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사실 지금 교수님들이 1988년에 참여하시진 않았을테니 정확한 이야기인지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말씀해주신 것처럼 '부억'론자들은 기존의 표기를 변경하자는 주장에 가까운 이야기로 받아들여져서 기각당했다고 하더라구요.
올곧은 발음이 [올고든]인가요

네 그러합니다[올고즌]으로 발음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구개음화를 과도하게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구개음화는 전설고모음이나 반모음 ㅣ 앞에서 일어나는데 아마 그러한 현상으로 인해 기본형을 ㅊ/ㅈ 말음으로 인식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ㅡ'나 'ㅔ'에도 과도하게 ㅈ/ㅊ을 연음하여 발화하는 거죠. 다만 '을', '은', '에'라는 조사에 특히 그러한 현상이 보이는 거는 ㅣ와 동일한 고모음 혹은 전설모음이라는 점이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