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언어 이야기: 부엌에[*부어게]와 빛을[*비슬]의 이유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72477308
우리가 학교문법에서 음운 단원을 처음 배울 때 '부엌에'의 표준 발음은 [부어게]가 아니라 [부어케]이고, '빛을'의 표준 발음은 [비슬]이 아니라 [비츨]이라는 걸 배운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비규범 발음이 더 익숙한 걸까? 우선 ㅋ>ㄱ, ㅍ>ㅂ부터 보자. 명사 ‘부엌’과 ‘무릎’의 단독형은 [부억]과 [무릅]으로 발음된다. 화자들이 이처럼 발음하는 이유는 이 명사가 단독형일 때 말음의 종성이 대표음으로 교체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엌+에’ 또는 ‘무릎+이’와 같이 명사가 모음 조사와 결합된 구성에서 국어 화자들은 표준 발음 대신에 [부어게]와 [무르비]로 발음하곤 한다. 이는 명사 단독형의 실제 발음인 [부억]과 [무릅]이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어울려 연음이 된 발음이다. 이러한 이유는 대표음으로 교체된 명사 단독형이 기본형으로 인식되고 그 뒤에 모음 조사가 오면 바로 연음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명사 단독형이 기본형으로 인식되는가인데, 그 이유에 대해 고광모(2014)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필자는 고립형이 기본형으로 인식되는 이유를 고립형 자체의 특성에서 찾는 다. 우리가 사물의 이름을 머리에 떠올릴 때 떠오르는 단어는 으레 고립형이다. 사실 어떤 경우에나 우리가 체언을 머리에 떠올리면 으레 고립형이 떠오른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고립형이 우월적 지위를 가질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국어에서 체언의 고립형이 기본형으로 인식되는 데는 위의 사실이 결정적 으로 작용한다고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즉 '무릎>무릅', '값>갑', '닭>닥', '부엌>부억' 등 모두 언중이 고립형을 기본형으로 인식하면서 나타난 평준화란 거다. 꽤 자주 쓰이는 말인 '오지랖'의 발음 역시 이와 같다. 전자는 표준, 후자는 평준화가 일어난 언중의 현실 발음이다.
오지랍# 오지랍#
오지랖-이 오지랍-이
오지랖-을 오지랍-을
오지랍-과 오지랍-과
단독형이거나 자음으로 시작하는 조사 앞에서의 형태가 곧 기본이라고 인식되고 원래 형태를 잡아먹는 일종의 주객전도가 발생한 거다.
이제 ㄷ, ㅈ, ㅊ, ㅌ>ㅅ의 변화를 보자
꽃을[꼬슬], 머리숱이[머리수시]와 같은 비표준 발음은 흔히 들을 수 있다. 어째서일까? ㅊ이나 ㅌ이 ㅅ으로 마찰음화라도 하는 걸까?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하지만, 고광모(1989)와 고광모(2014)의 해석이 가장 합리적이다. 우선 근대국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음절말 중화 그러니까 아직 ㅅ의 대표음 교체가 일어나지 않던 중세국어에서 근대국어로 넘어오며 음절말 ㅅ의 음가는 ㄷ과 같아졌다. 즉 ‘ᄉ’ 말음 체언들이 ‘ᄉ∼ᄃ’의 교체를 갖게 된 거다. 그런데 고립형이 기본형으로 인식되면서 고립형의 말음은 결국 /ㄷ/으로 인식된다(왜냐면 더 이상 말음 ㅅ과 말음 ㄷ의 발음 차이는 없으므로). 그리고 교체를 일으키는 공시적(근대국어 시기) 규칙은 모음 조사 앞에서 적용되는 연음 즉 /ㄷ/>/ㅅ/이 되었다. 왜냐면 말음의 발음은 대표음 /ㄷ/이었겠지만 그 대표음은 ㅅ에서 교체된 것이므로 연음이 일어난다면 당연히 ㅅ으로 연음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ㄷ>ㅅ이라는 전도된 규칙이 완성된다.
언매에서 15세기의 팔종성법을 배운 사람은 알겠지만, 15세기에는 ‘ᄃ, ᄉ’ 말음 체언의 고립형과 모음 조사 앞의 형태가 각각 같았고 ‘ᄌ, ᄎ’ 말음 체언의 고립형은 끝에 ‘ᄉ’을, ‘ᄐ’ 말음 체언의 고립형은 끝에 ‘ᄃ’을 가졌다('꽃'이 '곷'이 아니라 '곳'으로, '밭'이 '밭'이 아니라 '받'으로 표기됐다는 소리). 그런데 그 고립형들이 각각의 기본형이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ᄃ, ᄉ, ᄌ, ᄎ, ᄐ’ 말음 체언들은 모음 조사 앞에서 각각 연음 법칙에 의해
ᄃ→ᄃ
ㅅ→ㅅ
ㅅ→ㅈ
ㅅ→ㅊ
ㄷ→ㅌ
의 적용을 받았을 것이다(왼쪽이 고립형, 오른쪽이 연음).
그러다가 16세기에 음절말의 변화 ‘ᄉ>ᄃ’이 일어난 뒤에는 ‘ᄃ, ᄉ, ᄌ, ᄎ, ᄐ’ 말음 체언들이 모두 고립형에서 말음이 ㄷ으로 발음됐다. 그러니 모음 조사 앞에서 각각 연음 법칙
ㄷ→ㄷ
ㄷ→ㅅ
ㄷ→ㅈ
ㄷ→ㅊ
ㄷ→ㅌ
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이 규칙들 가운데서 ㄷ→ㄷ을 제외한 ㄷ→ㅅ, ㄷ→ㅈ, ㄷ→ㅊ, ㄷ→ㅌ은 ㅅ>ㄷ이라는 통시적 변화와 반대의 방향의 변화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ㅅ되기'가 발생하는데, 바로 'ㅅ 되기'는 규칙 'ㄷ→ㅈ, ㄷ→ㅊ, ㄷ→ㅌ'의 적용을 받던 체언들이 규칙 'ㄷ→ㅅ'의 적용을 받게 됨으로써 후자의 적용 범위가 넓어진, 즉 ‘ᄃ~ᄉ’의 교체가 확대된 유추적 확대인 거다. 다른 규칙의 적용을 받던 체언들이 적용 빈도가 월등하게 높은 규칙 ㄷ>ㅅ에 하나씩 먹혀 들어간 것이다.
‘ᄌ, ᄎ, ᄐ’ 말음 체언의 'ㅅ되기' 역시 이와 비슷하다. 고립형이 기본형이 되는 재구조화가 이루어지고 그 기본형에 전도된 규칙이 적용된 결과이다. 다시 말하자면 'ㅈ, ㅊ, ㅌ'은 음끝규에 의해 ㄷ 말음으로 재구조화되고 ㄷ>ㅅ의 변화를 적용받아 이 규칙이 확대됐단 얘기다. 이 역시 'ㅈ, ㅊ, ㅌ' 말음 체언의 독립성으로 단독형(음끝규가 적용된)이 기본형으로 인식되었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따라서 'ㅅ되기'라는 현상은 근대국어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현상이며, 이 때문에 방언에서는 ㄷ, ㅈ, ㅊ, ㅌ 말음인 표준어와 다르게 말음이 ㅅ인 경우가 왕왕 보이는 거다.
또 하나 재밌는 점은 공간/시간 명사에서 처격 형태(X+에)의 사용 빈도가 높으므로 ‘ㄷ, ㅈ, ㅊ, ㅌ>ᄉ’의 변화에 강하게 저항한다는 것인데, '앞'이나 '밑'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 '앞에'나 '밑에', 혹은 '밑을' 같은 경우는 '숲'이나 '팥'과 달리 ㅅ되기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고립형이 기저형이라고 인식되기에는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와 너무 흔히 쓰이다보니 그렇게 인식되기가 어려운 거다. 그러니까 처격형의 빈도가 아주 높아서 우리의 머리에 처격형이 고립형에 못지 않게 우선적으로 떠오르고, 공간/시간 명사의 처격형이 하나의 단위로 거의 굳어지다시피 한 것이다.
참고 문헌
고광모(2014) 체언 끝의 변화 'ㄷ, ㅈ, ㅊ, ㅌ>ㅅ'에 대한 재론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수1 수2 미적 하루에 3개 하루치씩 다 풀만함?
-
정치적, 제도적 이슈와 관련된 메타가 있을때마다 추가됨
-
아침부터 택배기사한테 전화오고 전화 안 받으면 반송한다고 난리나서 확인해봤는데...
-
9모끝나고랑 비겨하면 집중력이 빨리 떨어지는거같은데 너무 많이남아서 그런가….
-
수학 고민시간 1
수분감 하는 중인데요 한 문제 풀 때 고민 얼마나 하시나요? 이제 처음 푸는 거에요
-
산책하다 3
준네 멀리왔음 여기 어디여;
-
흠 3
흠
-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닐수없습니다..
-
아따 날씨좋다 2
ㄷㄷ 이쁜이 발견
-
님들은 가족 아닌 여자애기 옷 갈아 입히는 거 가능함? 7
그럴 일은 보통 없겠지만 가족 아니고 부모님 지인 분의 애기 같이 걍 남인 3~4살...
-
운동하던 친구가 갑자기 대학가겠다며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전부 3등급이면 어디...
-
국어 유기 4
3모 국어 원점수 84인데요 수학이 4가 떠서 4월 한달동안 수학만 하려고 하는데...
-
개념 다 돌렸고 문제가 적은 과목이라길래 학평, 평가원 다 뽑아서 풀려는데 법과...
-
미친짓?
-
고속기준 시립대전전컴이 찐초고 중앙대 공대는 노랑인데 인문이면 고대 가정교육과 연초...
-
프리뷰 테스트 보고 모의고사 형태 시험지에다가 필기할 거 필기하는 거임? 큐이디 본...
-
뭐 때문인거지 트럼프로인한 전세계적 현상인가
-
오늘 공부한다리 2
삘 옴
-
어제 현금 많이 달러화 해뒀었는데.. 달콤하다
-
컴공보다는 나으려나..
-
필요하긴한데 하는게나으려나
-
수특독서 심리철학의 물리주의적 이론들에서 기능주의? 0
심리철학의 물리주의적 이론들중 기능주의를 쉽게 설명해주실수 있는 분 계실까요?...
-
가능할까요 4
학교와서 1시간 40분동안 오르비만 했는데 지금부터 공부하면 서울대 가능할까요
-
차이점은,,, 진짜 금을 연성해낸다는 것..
-
나
-
씨팔........................
-
어느정도 유베인 학생이랑 노베에 가까운 학생을 동시에, 아무 상처 안 주고...
-
롤하고 학교에서 수업듣고 정시 공부 언제 하실거에여
-
할거 추천 좀 25
롤 제외
-
돌려서 거절하는 상황이라던가 그런거...
-
이번학기에 군대가려고 휴학중인데 계속 떨어져서 9월에 공군 가게생김… 한 9달을...
-
평가원 기출에 기반한 진짜 농어촌(자연 친화)
-
맨날 3 4시간 자면 깨니까 피곤해 죽겠음 누가 나좀 한 10시간씩 자게 해줘
-
난 오만하다 9
그러니 오만덕을 내놔
-
체감상 한 수요일 목요일쯤인데
-
정족의 발전 인정좀
-
키스타트 끝나고 3회독 해서 다음 커리는 키스로직이 나을까요??
-
출석이 고민이다. 직접호명 소수수업은 어떻게 할까
-
오늘 다 풀기는 솔직히 힘들것같고... 수면패턴 바꿀겸 80문제만 더풀어야지...
-
그날 수업만 3갠데 차라리 일주일 연기 해주면 안될까...
-
각자 사정이 다 다르고 본인이 보는 시야가 100%가 아닌데
-
어케 산출하는거임? 나머지 과목은 추정치로 산출? 누백 사기 아님? 알려주세
-
시중N제를 사는거보다 강대나 시대 자료 작년꺼 당근으로 구해서 매일 푸는게 낫나용?...
-
벡터 넘겨서 계수합 1로 만든다음에 내분외분 파악하는 부분 듣고 있는데 첫번째 사진...
-
나는 0
한평생 지방에서 월 400,500받고 앵간히 살려고 태어난게 아니야 언젠간 저...
-
종이책없으면 공부못하겠는데? 날속인거니? 있어도안하긴함 우우
-
기초 개념은 다 끝낸 상태이고 실전 개념을 하고 싶은데 고민입니다. 제목과 같이...
-
fxxxx
-
어렵다 어려워
언중이 생각하는 기본형이 고립형이기도 하고 처격이기도 한게 흥미롭네요. ㅅ되기는 처음 봤는데 평소 궁금했던 점이 해소됐어요.
*두 번째 문단 첫 문장의 예시를 '숲+이'에서 '무릎+이'로 변경하신 것 같은데, 첫 문장에선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확인해주세요. :)
아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국문과 교수님들한테 오프더레코드처럼 들었던 이야기인데
부엌 같은 경우에는 1988년 표준어 제정 당시 '부억'을 표준어로 밀던 사람들이 많았다 카더라...라는 이야기가 있더라구요.
팩트는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부엌'은 보이지 않고 '부억'이나 '부업'으로만 쓰였다는 것. 이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듯. '부엌'은 20세기에 처음 등장한 표기임
20세기 초에도 여러 문헌 자료에 '부억'으로 쓰인 기록이 많습니다. 다만 '부엌'을 88년에도 밀었을지는 의문입니다. 88년 맞춤법에 큰 영향을 미친 게 큰사전의 존재라...
'부엌'은 보통학교 조선어사전(1925)와 수정증보선어사전 (1938)에서 표제어로 실리게 되며 점차 쓰임이 확장되고 한글학회의 큰사전(1950) 이후로 표제어는 ‘부엌’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사실 지금 교수님들이 1988년에 참여하시진 않았을테니 정확한 이야기인지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말씀해주신 것처럼 '부억'론자들은 기존의 표기를 변경하자는 주장에 가까운 이야기로 받아들여져서 기각당했다고 하더라구요.
올곧은 발음이 [올고든]인가요

네 그러합니다[올고즌]으로 발음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구개음화를 과도하게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구개음화는 전설고모음이나 반모음 ㅣ 앞에서 일어나는데 아마 그러한 현상으로 인해 기본형을 ㅊ/ㅈ 말음으로 인식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ㅡ'나 'ㅔ'에도 과도하게 ㅈ/ㅊ을 연음하여 발화하는 거죠. 다만 '을', '은', '에'라는 조사에 특히 그러한 현상이 보이는 거는 ㅣ와 동일한 고모음 혹은 전설모음이라는 점이 영향을 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