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학 시리즈 5편. 음운론(Pho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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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 시리즈의 글들은 장영준 교수의 “언어학 101”과 김진우 교수의 “언어 이론과 그 응용"의 내용을 요약한 것임을 알립니다.
언어학 시리즈 1편: 언어란 무엇인가
언어학 시리즈 2편: 동물에게도 언어가 있는가
언어학 시리즈 3편: 언어의 기원(ft. 언어 유전자?)
언어학 시리즈 4편: 음성학(Phonetics)
이 영상도 참고하면 좋습니다.
이 편은 컴으로 보길 추천합니다.
* 읽기 전
이 내용의 출처가 되는 책은 언어학 입문서 즉 언어학을 접하지 않은 일반인들을 위한 책입니다. 구조주의나 생성주의 등의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Halle(1959), Chomsky&Halle(1968) 등의 영향으로 발전한 초기생성음운론인 표준생성음운론에서는 변별자질을 최소 단위로 잡고 구조주의를 비판한다거나, 새롭게 등장한 자연생성음운론에 대한 논의라거나, 최적성 이론 등의 이론언어학의 역사적인 발전은 다루지 않았으니 참고 바랍니다.
책에서 한국어의 음소를 어떤 로마자로 나타내는지 정확히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표를 먼저 올립니다. 아래의 표가 정답은 아니며 음소 표기는 학자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표의 기본적인 모양은 학교문법의 자음체계표와 모음체계표를 따랐고 허용발음은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영어는 그냥 인터넷에 있는 미국식 영어 표를 갖고 왔습니다. 영어는 이중모음을 음소로 표기할 때 j나 w를 쓰지 않습니다. 따라서 eɪ나 ʊə가 모음이 두 개인 것처럼 보여도 이중모음 표기이기 때문에 단음절입니다. 또, 음소 표기는 IPA를 이용하지만 음성이 아니라 음소 즉 엄밀하지 않은 심리적인 소리를 나타내기 위한 약속입니다. 즉, 그 개별 말소리를 구체적으로 기술할 필요가 없고 일관성 있게만 사용하면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기호에 크게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보실 / / 안에 있는 로마자는 여러분이 알고 계시는 영어 지식으로 읽으시면 안 됩니다.
음운론(Phonology)
음성학(Phonetics)과 음운론(Phonology) 모두 말소리를 연구하는 학문이지만 언어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구분하기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음성학은 어떤 언어든지 상관없이 인간의 언어에서 사용되는 말소리에 대해서 연구하는 것이다. 언어음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어느 조음기관에서 만들어지는가, 그리고 언어음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등을 연구한다. 반면, 음운론은 이러한 말소리들이 특정한 언어에서 어떻게 배열되어 어떤 의미를 전달하게 되는가 하는 규칙을 연구하는 것이다. 특정 언어에서 어떤 음운현상이 발견되고 어떤 음운규칙들이 있는가를 연구한다. 물론 개별 언어어들에 나타나는 이러한 음운현상과 규칙들이 인간언어 전반에 보편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전자를 개별 언어의 음운론이라 한다면, 후자는 보편적 음운론이라 할 수 있다.
바둑판을 생각해 보자. 음성학은 바둑돌이나 바둑판이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는가, 얼마나 내구성이 있는가, 등을 연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음운론은 바둑에서 바둑알을 어떻게 이동하고 경기를 어떻게 풀어가는가 하는 규칙을 연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음성학과 음운론은 모두 말소리를 연구하는 학문인 이상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음성적인 자질의 분류나 파악에는 음성학적인 연구가 필수불가결이며, 음운 대립의 파악도 음성학적 연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음운론의 입장에서 음성학은 음운론의 기초를 제공하는 언어학의 분야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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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소와 (변)이음
우리말에서 ‘먹다'와 ‘막다'는 서로 의미가 다른 별개의 단어이다. 그런데 ‘먹[mək]-’과 ‘막[mak]’은 매우 유사한 발음쌍이다. 둘의 차이점이라고는 가운데 모음인 [ə]와 [a]뿐이다. 그럼에도 이 모음의 차이가 바로 의미의 차이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렇게 의미의 차이를 초래하는 개별 음들을 음소(phoneme)라 하고, ‘먹-’과 ‘막-’처럼 단 하나의 음소리만 다르고 나머지 소리가 같은 쌍을 최소대립쌍(minimal pair)이라 한다. 한국어의 /ㅓ/와 /ㅏ/가 음소라면, /ㅗ/는 어떤가? 이 모음도 음소일까? 어떤 음이 해당 언어의 음소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방법은 최소대립쌍을 만들어 그것이 의미의 차이를 초래하는지의 여부를 살펴보는 것이다. ‘달'과 ‘돌'의 경우 둘의 의미가 달라지니 /ㅗ/ 역시 음소다.
영어를 예로 들어보자.
pin bin
bag back
light right
위의 단어쌍을 보면 철자에 상관없이 어느 한 음을 제외하고는 발음이 모두 같다. 첫 번째 예에서 [p]와 [b]를 제외한 나머지 발음이 같고, 두 번째 예시에서는 마지막의 g[g]와 ck[k]를 제외한 나머지 발음이 같고, 마지막 예에선 [l]과 [r]을 제외한 나머지 발음이 같다. 이들은 의미가 다르므로 이것들은 음소라 할 수 있다.
영어에서는 /l/과 /r/이 유의미한 대립쌍을 이룬다. 그러나 한국어로는 둘 모두 /ㄹ/ 소리로 발음한다. 사실 음성학적으로 보면 즉 소리를 물리적으로 보면 한국인들은 /ㄹ/을 어두에서와 어말에서 다르게 발음한다. 그렇지만 어두의 ㄹ과 어말의 ㄹ을 우리는 의미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사용하는가? 그렇지 않다. 두 소리가 의미 차이를 초래하지 않으므로 음소가 아닌 것이다. 하나의 음소가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발음되는 것을 이음 또는 변이음(allophone)이라 한다.
자세한 논의를 하기 전에 우선 ‘음소'와 ‘음성'을 확실히 알고 가자. 4편에서 언급했듯 [ ]는 실제 우리의 입을 통해 발음되는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이고, / /은 우리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추상적인 소리의 표시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 ]는 음성 표시이다. 사람은 폐에서 입과 코에 이르는 발성기관을 통해 말소리를 산출하는데 이 생리적으로 산출되고 물리적으로 전파되는 소리 즉 물리적인 실체가 바로 ‘음성'이다. 반면에, / /는 음소 표시이다. 물리적인 실체가 다르더라도 화자에게 하나의 소리로 인식되며 단어의 뜻을 구별해주는 말소리의 최소 단위가 있는데 이 심리적인 실체가 바로 ‘음소'이다. 따라서 음소는 매우 추상적인 단위이고 언어 사용자의 머릿속에 있는 말소리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음소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가지는데 하나는 앞서 언급한 심리적인 단위라는 점, 다른 하나는 상보적 분포를 이룬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의미적 변별 기능을 한다는 점이다. 나무위키의 음소 문서도 참고하자.
다시 음운론으로 돌아가서, 음운론이 어떤 언어에서의 음운현상을 다루는 만큼 음운론은 그 언어의 화자가 자기 나라 말소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언어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음운기술이란, 토박이 화자(native speaker)가 자국어의 음운현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의 기술이다. 한국어 토박이 화자 그러니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우리 화자는 어떤 말소리들이 변별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 그러니까 어떤 말소리들이 음소인지 알고 있다. [l]음과 [r]음은 우리말에서 변별적 기능이 없고, 유기음과 무기음에는 변별적 기능이 있음을 “알”고 있으며, 영어와 달리 무성파열음과 유성파열음 사이의 변별적 기능이 없음을 “안”다. 이러한 지식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언어지식이 그렇듯, 대중에게 음운지식은 무의식적인 것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ㄱ, ㄲ, ㅋ ; ㄷ, ㄸ, ㅌ ; ㅂ, ㅃ, ㅍ/의 차이가 너무나 자명하지만 영어 화자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안”다는 것은 다분히 심리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이음과 음소의 이해를 위해 예를 한두 가지 더 들어보자. 힌디어와 타이어에서는 유기음, 무기음, 그리고 유성음 모두 변별적/음소적 기능을 한다.
힌디어
유기 무기 유성
양순 phal 칼날 pal 순간 bal 척
치경 thaal 접시 taal 늪 daal 콩
연구개 khul 열린 kul 모든 gul 꽃
타이어(순서는 동일)
phaa 쪼개다 paa 숲 baa 어깨
tham 하다 tam 치다 dam 검은
khat 방해하다 kat 물다
그러니까 음성 [ph], [p], [b]가 국어, 영어, 및 힌디어에서 나타나는 기능은 각기 다르다. 힌디어와 타이어에서는 세 소리가 다 음소임에 비하여, 영어에선 [ph]와 [b]가 음소이고 [p]는 이음인 반면, 국어에선 [ph]와 [p]가 음소이지만 [b]는 평음 ㅂ이 모음 사이에 올때만 나는 소리로 이음이다. 같은 음성인 [p]가 음소일 수도 아닐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음소는 / /로, 이음 그러니까 음소가 실현될 수 있는 음성은 [ ]로 적는다.
국어 힌디어 영어 프랑스어
/ph/ /ph/ /ph/ [ph]
/p/ /p/ [p] /p/
[b] /b/ /b/ /b/
[b]라는 음성은 힌디어, 영어, 프랑스어에선 음소로 기능하지만 한국어에선 음소로 기능하지 못한다. 즉 한국어에서 ‘바보'는 [pabo]로 발음돼야 하지만, 이를 [babo]로 읽더라도 한국어 화자는 이상함을 느낄지언정 의미가 달라진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b]나 [p]나 모두 /ㅂ/으로 인식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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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보적 분포
우리는 한 음소가 서로 다르게 발음되는 것을 ‘이음'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 이음의 출현 환경은 어떠할까?
영어 star을 우리말로 옮기면 ‘스타'가 된다. 그런데 과연 영어의 star가 [스타]라고 발음될까? 사실 미국인들의 소리를 들어보면 [타]보다는 [따]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still도 생각해 보면 원어민들은 [스틸]보다는 [스띨]에 가깝게 발음한다. 이를 음운론적으로 말하면, 영어의 음소 /t/는 /s/ 뒤에서는 [th]가 아니라 [t]로 발음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th]는 4편에서 언급했듯 h가 기식을 나타내므로 우리말의 [ㅌ]에 가깝고 [t]는 [ㄸ]에 가깝다고 이해하면 된다.
그렇다면 영어의 음소 /t/는 언제나 [t]로만 발음될까? 물론 아니다. 영어의 음소 /t/는 /s/ 뒤가 아닌 어두에서는 [th], 즉 우리말의 /ㅌ/과 가깝게 발음된다. ‘till’, ‘time’, ‘taste’ 등을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영어의 음소 /t/는 단어의 첫 부분에 왔을 때 [t]가 아니라 [th]로 발음된다. 마찬가지로 영어의 /t/의 발음은 [s] 뒤에서는 [t]로 발음된다. 그러나 그 반대인 경우는 한 번도 없다. 즉 /t/가 [s] 뒤에서 [th]로 발음되거나 반대로 단어의 첫머리에서 [t]로 발음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h 같은 위첨자는 해당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음되는가를 기술하기 위해 덧붙인 변별부호(diacritic)이다.
우리는 영어의 음소 /t/가 두 가지 다른 발음으로 실현되는 것을 살펴봤다. 이를 음운론적으로 설명하면 영어의 음소 /t/는 각각 서로 다른 환경에서 이음 [th], [t] 중의 하나로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서로 다른 환경"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음소 /t/는 절대 어두에서 [t]로 발음되지 않고, 반드시 [th]로, /s/ 뒤에서는 절대로 [th]로 발음되지 않고 [t]로 발음된다. 이렇게 두 가지 서로 다른 음운환경에서 발음되는 모든 이음들은 음소 /t/가 발음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발음이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서로 다르게 발음되는 현상을 상보적 분포(complementary distribution)라 한다. 한국어에서 어두 ㅂ이 무성음이고 어중 ㅂ이 유성음이며, 어말 ㅂ이 불파음이고 하는 등의 이음의 분포는 배타적이라는 뜻이다. A가 나올 적엔 B는 나오지 않고, B가 나올 적엔 A는 나오지 않는다.
어떠한 이음이 한 음소에 속한다고 단정하려면 그들 사이에 상보적 관계가 있어야 하지만 음성적으로도 유사해야 한다. [l]과 [r]음은 같은 유음이고 치경음이란 공통점이 있고, [p]와 [b]는 무성과 유성의 차이뿐이고, [th]와 [t]는 유기와 무기의 차이뿐이다. 이렇게 이음 사이에는 음성적 유사성(phonetic similarity)도 갖추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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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절구조
음운론으로 범위를 좁힐 때, 모국어 화자가 자국어를 안다는 것은 음소가 무엇인지 즉 어떤 말소리들이 자국어에 쓰이는가를 아는 것, 그리고 해당 음소들이 주어진 언어에서 어떻게 배열되는지 아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화자는 자국어에서 어떤 음소의 배열이 가능하고 불가능한지를 알고 있다.
한국어 화자들은 ‘값'을 발음할 때 ‘ㅅ' 받침을 발음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발성기관의 제약으로 ㅅ을 발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인식 속에서는 어말의 자음을 하나만 발음할 수 있다는 규칙이 잠재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한국어의 음운체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값'을 [kapㄱ]이 아니라 [kaps]처럼 발음하고자 할 것이다(ㄱ 위첨자는 ㄱ, ㄷ, ㅂ 받침처럼 파열하지 않고 폐쇄에서 끝나 기류가 막히는 음인 불파음을 나타낸다).
왜 그런 걸까? 각 언어에는 가능한 음소의 목록도 정해져 있지만 그 음소들을 배열하는 일정한 규칙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음운론에서는 바로 이러한 음운배열규칙이 무엇인가를 우선 밝혀내고자 한다. 한국어 ‘값'에 대해 좀 더 얘기해 보자. 언어학에서는 자음은 C(consonant), 모음은 V(vowel)라는 약자로 쓴다. 한국어는 음 배열 방식이 CVC 구조이다. 물론 한국어에는 모음만 있는 것도 있고 모음과 자음,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단어도 있지만 최대로 허용하는 자음이 모음의 앞뒤로 각각 하나씩밖에 없다.
V: 오, 아, 이
VC: 옥, 악, 익
CV: 고, 르, 비
CVC: 딩, 양, 놀
이렇게 모음 하나에 최대로 허용하는 자음의 수가 정해져 있고 우리는 하나의 연속된 소리를 분절된 소리로 인식한다. 이 분절된 소리를 하나의 음절(syllable)이라고 한다. 한국어의 음절은 CVC로 구성된다. 음절의 구조는 대개 다음 그림과 같다. 앞으로 수형도를 자주 보게 될 것이니 익숙해지자.
장영준(2019: 116)
음절을 syllable의 첫 자를 따서 S라 하고, 음절의 처음을 O(onset), 나머지를 R(rhyme)이라 한다. R은 핵심이 되는 모음과 받침으로 이루어지는데, 모음을 N(nucleus), 받침을 C(coda)라 한다. 가령 우리말 ‘리'는 O에 해당하는 /ㄹ/과 N에 해당하는 /ㅣ/가 있고 C는 비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길'을 음절구조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장영준(2019: 116)
한국어의 음절은 CVC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없다'와 같은 단어는 실제로 [업따]로 발음되고 ‘닭'은 [닥]으로 발음된다. 누군가 그럼 ‘값이'가 [갑씨]로 발음되는 연음은 어떻게 설명하느냐 하고 물을 수 있다. [갑]은 보다시피 CVC를 유지한 상태이고, [씨] 역시 CV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호로 나타내 보자.
값: ㄱ ㅏ ㅂ ㅅ
k a p s
C V C C
값이: ㄱ ㅏ ㅂ 씨 ㅣ
k a p s* i
C V C C V
장영준(2019: 117)
그림에서 보이듯, 음절말의 ㅅ은 음절의 구조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발음이 되지 않는다.
한국어는 한 음절이 허용하는 자음의 최대 수가 모음을 앞뒤로 해서 각각 하나씩밖에 안 되기 때문에, 남은 자음들은 발음되지 않는다. 만일 주변에 모음이 있으면 이렇게 남는 자음은 그 모음과 결합하여 새로운 음절을 만들 수 있다. 즉 ‘값'의 남아도는 자음 ‘ㅅ'이 뒤따라오는 모음 ‘ㅣ'와 결합하여 새로운 음절 ‘씨’를 만든 것이다. 여기서 ‘시'가 ‘씨'가 된 경위는 곧 다룰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음절구조에 위배된 단어가 수입된다면 어떨까? 일본인들은 ‘김치'를 [기무치]로 발음한다. CVC 구조인 한국어와 달리 CV 구조인 일본어 화자는 마음 속에서 CVC 구조를 강제로 CV 두 개로 나눠 버린 채로 인식한 것이다. 일본어는 하나의 모음이 허용하는 자음의 최대 수가 하나라서 그렇다. 영어 milk를 생각해 보자. 한국어는 음절이 CVC이므로 milk를 두 개의 음절로 나누어 [밀+크]로 재분석하는 반면, 일본어는 음절이 CV라 milk를 세 음절로 나누어 [미+루+꾸]처럼 재분석한다. 영어는 하나의 음절이므로, 한국어식 발음이나 일본어식 발음 모두 영어와 다른 건 마찬가지지만.
영어: m i l k
C V C C
한국어: ㅁ ㅣ ㄹ ㅋ ㅡ
C V C C V (끝에 V 첨가)
일본어: m i r u k u
C V C V C V (V 두 개 첨가)
영어의 strike는 세 개의 자음이 모음 앞에 몰려 있는데, sprinkles는 모음 뒤에 네 개의 자음이 몰려 있다. 영어는 하나의 모음을 중심으로 허용되는 자음의 최대 수가 앞으로 세 개, 뒤로 네 개다.
몇 개의 자음이 한 음절에 몰려 있을 때 이를 자음군(consonant cluster)이라 한다. 영어에서는 한 음절에 올 수 있는 어두 자음군은 세 개라고 하였는데 그 조건은 이렇다. 즉 첫 자음은 /s/이고 두 번째 자음으로 가능한 것은 /p, t, k/이며 세 번재 자리에 올 수 있는 자음은 /l, r/이다. 어말 자음군은 종류가 너무 많으니 넘어가자.
C C C V C C C C
s p l
t r
k
여기서 가능한 조합을 보면 {spl-, spr-, stl-, str-, skl-, skr-}의 6가지가 있다. 그런데 영어에서는 이중 *stl-은 어두 자음군으로나 어말 자음군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splash, spring, strike, sclaff, scratch 등은 있지만 castle과 같은 단어는 철자와는 달리 /t/가 묵음이다. sprinkles는 어말 철자 e가 음가가 없기 때문에 실제 발음은 /sprɪŋklz/이다.
그런데 strike와 같은 영단어를 우리말로 표기할 때 모음 /ㅡ/를 추가하여 [스트라이크]라고 한다. 앞에서 계속 언급했지만 그 이유는 한국어의 음절구조가 CVC이기 때문이다.
영어: s t r i ke
ㅅ ㅌㄹ ㅏㅣ ㅋ
한국어: 스 트 라이 크
ㅅㅡ ㅌㅡ ㄹㅏㅣ ㅋㅡ
한국인들은 자음이 겹친 외국어를 발음할 때마다 모음 ㅡ를 추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한국어의 음절구조상 모음 앞에 단 하나의 자음만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star는 ‘ㅅ타'가 아니라 ‘스타'로, cream은 ‘ㅋ림'이 아니라 ‘크림'으로, ‘gold’는 ‘골ㄷ'가 아니라 ‘골드'로 옮겨진다. 우리는 ㅡ가 없는 배열이 틀렸음을 본능적으로 안다. 이를 음절구조로 나타내 보자.
장영준(2019: 123)
즉 한 언어의 화자는 무엇이 맞고 틀린 배열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영어 화자는 *bnik이나 *pmak과 같은 단어가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어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영어는 이러한 음 배열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bnik이나 *bmak과 같은 형태는 영어에서 체계적으로(systematically) 허용되지 않는 단어이고, 실제로도 존재하지 않는 단어이다. 우연이지만, 영어에서는 *blick이란 단어도 없는데 이러한 단어는 이론적으로 가능한데 알 수 없는 이유로 우연히(accidentally)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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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운규칙
화자가 자국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세 번째 지식은 그 언어에 작용하는 음운규칙이다. 앞에서 우리는 한 음소에 속하는 이음들이 배타적(상보적) 환경에서 일어남을 보았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자면, 이음들이 제멋대로 어느 때는 이 이음으로, 어떨 때는 저 이음으로 자의적으로, 즉 불규칙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각 이음마다 그 이음이 구현되는 환경이 “규칙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말이 된다. 규칙(rule)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국어에서 음소 /ㄹ/의 이음 [l]과 [r]이 제멋대로 아무데서나 일어났다 안 일어났다 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음절말에서는 [l]로 일어나고 음절초에서는 [r]로 일어난다고 하자. 이러한 구현이 “기억”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규칙”에 의한 것이라고 어떻게 단정할 수 있을까? 국어에서 ‘먹다'라는 동사는 ‘먹이다'라는 사동사와 ‘먹히다'라는 피동사를 만들 수 있는데, ‘죽다'라는 동사는 ‘죽이다'는 되지만 ‘죽히다'는 안 되는 반면, ‘막다'라는 동사는 ‘막이다'는 안 되지만 ‘막히다'는 된다.
이러한 사실은 국어의 화자가 각 동사마다 따로 외우지 않으면 안 된다. /ㄹ/의 이음 [l]과 [r]의 분포도 ㄹ을 가진 말마다 [l]과 [r]의 두 변형(variant)이 있음을 국어화자가 외우고 있다고 할 수는 없을까? 즉 ‘말'에는 [mal]과 [mar](모음이 후행할 때)의 두 변형이 있고 ‘달'에는 [tal]과 [tar](모음이 후행할 때) 두 변형이 있으나, ‘사람'에는 [saram]의 변형만 있지 [salam]의 변형은 없는 등, [l]과 [r]의 교체(alternation)는 사동형과 피동형의 변형처럼, 단어마다 모든 가능한 교체형을 수록한 목록(list)을 화자가 외우고 있는 데서 나타나는 것이지, 규칙에 의한 현상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까?
그러나 이음의 분포가 목록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규칙에 의한 것임은 다음 사항으로 알 수 있다. 우선 목록은 예측을 할 수가 없는 반면, 규칙에 의한 현상은 예측을 할 수 있다. 어떤 주어진 동사에 사동형이나 피동형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예측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국어에 ‘닥다'라는 동사가 있다고 하자. ‘닥이다'나 ‘닥히다'라는 말을 선뜻 유도할 수 있을까? 이번엔 국어에 ‘딜'이라는 명사가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이 명사에 ‘에, 이' 등의 조사를 붙여 보자. 그러면 누구나 ‘딜'은 [til]로, ‘딜이, 딜에’는 [tiri, tire]로 발음하지, ‘딜이'를 [tili]로 발음하는 사람은 적어도 국어 화자 중에는 없을 것이다. ‘딜이'라는 말을 아직 들어보지도 못했고 그 뜻이 무엇인지를 아직 배우기도 전에 그 교체형을 이미 외우고 있다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수긍할 수 없는 논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l]~[r]의 교체가 목록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규칙에 의한 것으로 본다면 생소한 단어를 환경에 따라 올바르게 발음할 수 있는 것을 쉬이 설명할 수 있다.
규칙이 언중의 의식 속에 살아서 작용하는 것임을 음운배열조건의 경우처럼 외래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외래어는 될 수 있는 대로 원래의 음성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국어에 들어온 외래어로 풀(<pool), 골(<goal), 팁(<tip), 킥(<kick) 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외래어에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가 붙을 때 원음이 그대로 살아서 발음되지 않고 국어의 이음분포 규칙에 따라 발음된다(괄호 앞의 *는 잘못됨을 말함).
풀 [phul] 풀에 [phure] *[phule]
골 [k*ol] 골이 [k*ori] *[k*oli]
팁 [thipㄱ] 팁을 [thibɯl] *[thipɯl]
킥 [khikㄱ] 킥은 [khigɯn] *[khikɯn]
외래어가 활용형까지 세트로 국어에 들어왔다고 주장을 하지 못하는 한, 위와 같은 발음현상은 변이형을 수록한 목록을 화자가 외워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화자의 뇌리에 자국어의 문법으로 새겨져 있는 규칙에 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국어에서의 [l]~[r] 교체현상이나, 유성음 사이에서 국어의 무성자음이 유성음으로 바뀌는 현상이나, 또 영어에서 무성유기파열음 [s] 뒤에서 무기음으로 변하는 현상 등은 음소의 환경에 따른 이음분포를 규정하는 규칙들의 예들로, 이를 음성규칙(phonetic rule)이라 한다. 그런데 언어의 음운 현상에는 이음의 교체 현상뿐만 아니라 음소의 교체현상, 즉 한 음소가 다른 음소로 바뀌는 현상도 있다.
국어: 국(國) [kukㄱ], 국민 [kuŋmin 궁민], 적국 [tɕəkㄱk*ukㄱ, 적꾹]
법(法) [pəpㄱ], 법문 [pəmmun 범문], 국법 [kukㄱp*əpㄱ, 국뻡]
독(毒) [tokㄱ], 독물 [toŋmul, 동물], 혹독 [hokㄱt*okㄱ, 혹똑]
영어: 단수 복수
bed [bed] beds [bεdz]
bag [bæɡ] bags [bægz]
back [bæk] backs [bæks]
cat [khæt] cats [khæts]
독일어: 복수 단수
Hunde Hund [hʊnt]
Diebe Dieb [di:p]
Berge Berg [bεrk]
위의 예를 보면 한국어는 ㄱ, ㅂ, 등의 파열음이 비음 앞에서 ㅇ, ㅁ의 비음으로 바뀌고 다른 파열음 뒤에서는 ㄲ, ㅃ 등의 경음으로 바뀜을 알 수 있다. 영어의 경우 복수 접미사 ‘-s’는 무성음을 뒤따를 땐 무성음 [s]로, 유성음을 뒤따를 땐 유성음 [z]로 발음된다. 독일어에서는 유성폐쇄음이 어말에서 무조건 무성폐쇄음으로 발음되고 오직 유성음 환경에서만 유성음으로 발음된다.
그런데 이러한 교체는 이음적(allophonic) 교체가 아니라 음소적(phonemic) 교체이다. 즉 국어에서 평음, 비음, 된소리는 각기 다른 독립된 음소이며 영어에서도 /s/와 /z/는 독립된 음소이고, 독일어에서 /b, d, g/도 /p, t, k/와는 별개의 독립된 음소이다.
이러한 음성교체 현상도 규칙에 의한 것이 아니고 목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볼 수 있다. 즉, 국(國)/kuk/이라는 어휘는 국민이라는 단어에서는 [kuŋ]으로, ‘적국'이라는 단어에선 [k*ukㄱ]으로 나타나는 등등 ‘국(國)’이 들어간 말마다 그때의 발음을 화자가 외우고 있는 것을 구현할 뿐이지, 어떤 음운규칙에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경우 역시 규칙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현상이며 외래어에도 적용됨을 보아 화자의 의식 속에 살아있는 규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음소 /k/가 이음 [ŋ]이나 [k*]이 되는 것은 외운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잠재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음소의 교체를 지배하는 규칙을, 때로는 이음의 교체를 지배하는 음성규칙도 포함시켜 음운규칙(phonological rule)이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음운교체의 예들은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음운이 다른 음운으로 바뀐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이 변화의 방향이 변화를 야기하는 환경의 음운 쪽이라는 사실이다. 즉 국어에서 비음 앞에서 파열음이 비음이 되는 것이나, 유성음 사이에서 유성화된 것이나, 영어의 복수형 형성에서 [s]~[z]의 교체를 보이거나 하는 경우에선 한 음운이 환경의 음운과 더 가까워지는 방향으로 바뀐다. 이렇게 한 음운이 다른 음운과 비슷해지거나 같아지는 음운변화를 동화(assimilation)라 한다. 동화는 발음의 편리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으로 조음 위치가 가깝거나 조음 방법이 비슷한 소리가 연속된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하여 발음할 때 힘이 덜 든다.
동화는 연속한 두 음이 서로 비슷해지거나 같아지는 음 변화라면, 이화(dissimilation)는 그 반대 현상이다. 즉 이웃한 두 언어음이 서로 달라지는 음 변화를 말한다. 우리말에서 일어난 예를 들자면 국어사적으로 유명한 소위 PK 교체가 있다. 거붑 → 거북, 붑 → 북, 브ᅀᅥᆸ → 부엌, 등이 흔히 이화 현상으로 설명된다. 사실 PK 교체는 이화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세한 논의는 “P/K 교체에 대하여(소신애)”를 참고하길 바란다. ‘버선’은 ‘보션→버션→버선'의 변화를 겪었는데 ㅗ가 ㅓ로 바뀐 것 역시 이화라 할 수 있다. 동화가 화자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음운규칙이라면, 이화는 청자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한 음운규칙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접한 음운의 영향을 받는 것이 당연하므로 음운현상에는 이화보다는 동화 현상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화의 예를 더 들자면, 영어의 형용사를 들 수 있다. 라틴어의 ‘-alis’라는 형용사화 접미사는 영어에서 ‘-al’과 ‘-ar’ 두 형태로 분화되는데, 어간에 l이 있으면 l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al’이 ‘-ar’로 바뀐 결과이다.
명사형 추정형 실제형
angle angulal angular
circle circulal circular
regul- regulal regular
single singulal singular
이렇게 한 음운을 다른 음운으로 바꾸는 것 이외에 음운을 탈락시키거나, 삽입시키거나, 또는 두 음운의 위치를 바꾸거나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현상을 동화라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다.
탈락(deletion): 있던 음운을 탈락시키는 현상. ‘값’은 철자에 상관없이 이 단어는 [kap]으로 발음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음운론적으로 마지막 자음 /s/이 탈락되었을 뿐이다. 이는 국어의 음절구조제약에 의한 것이고 학교문법에선 이를 “자음군단순화”라고 부른다. 겹받침으로 끝나는 어휘가 단독으로 쓰일 때나, 또는 겹받침 뒤 자음으로 시작하는 말이 올 때 일어난다.
우리말에서는 복합어를 만들 때 ㄹ이 탈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늘 + 질 → 바느질
말 + 소 → 마소
솔 + 나무 → 소나무
딸 + 님 → 따님
이러한 예를 설명하기 위해 국어학자들은 음절말의 /ㄹ/이 치경음인 /ㄴ, ㄷ, ㅅ, ㅈ/ 등의 앞에서 탈락된다는 규칙을 설정한다. 또 전라도 지역에서는 ‘못 하다[모다다]', ‘몇 학년[며닥년] 등에서 보이듯 ㅎ을 탈락시키는데 이 역시 탈락 현상이다.
첨가(addition, 삽입(epenthesis)이라고도 한다): 없던 음운이 추가되는 현상. 대표적으로는 복합어나 구 구성에서 앞 단어나 접두사의 끝이 자음으로 끝나고 뒤 단어나 접미사의 첫음절이 ㅣ나 j일 때 'ㄴ'이 첨가되는 현상인 ㄴ 첨가가 있다. 국어의 이른바 사잇소리 현상도 첨가라고 볼 수 있다. 국어사적으로는 모음 충돌(hiatus)을 피하기 위한 ㅇ의 삽입(송아지, 강아지, 종이, 등)과 소위 파찰음 앞 /ㄴ/ 첨가라는 현상(ᄀᆞ초다 → 감추다, 호ᅀᅡ → 혼자, 등)이 있다. 후자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파찰음 앞 /ㄴ/ 삽입 현상에 관하여(소신애)”를 참고하길 바란다. 또, 영어 milk는 한 음절이지만, 한국어에서는 [밀+크]란 두 음절로, 일본어에서는 [미+루+꾸]라는 세 음절로 재분석된다고 앞서 언급했다. 한국어에서는 주로 /ㅡ/를 일본어에서는 /ㅜ/를 첨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역시 첨가의 일종이다.
하나 재밌는 사실로는 영어 화자들이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지만 /ə/를 첨가하는 일이 매우 자주, 조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영단어 milk의 i가 원래는 ɪ(ㅣ) 소리가 나야 하지만 실제로는 [ɪə]에 가깝게 발음된다. 영어에서는 전설모음 /ɪ/가 /r, l/ 앞에 나오면 /ə/를 집어넣어서 발음하는 것이 흔하다. 그러니까 그냥 [milk]가 아니고 [mɪəlk]처럼 발음하는 경우가 흔하단 얘기다. ‘seal’이나 ‘will’만 해도 그렇다. [sɪl], [wɪl]로 발음해야 할 것을 무의식적으로 [sɪəl]과 [wɪəl]에 가깝게 발음한다.
음위전환(metathesis, 음운도치라고도 한다): 두 음이 자리를 바꾸는 현상. 그리 흔하지는 않지만 영어에서 brid → bird, aks → ask, hwat → what 같은 역사적인 예시가 있고, 방언에서 보이는 ‘딸꾹질-깔딱질', ‘김제-징게', ‘이글이글-이륵이륵’ 역시 음운 도치의 예이다.
축약(reduction): 여러 음운이 합쳐져서 새로운 하나의 음운이 되는 현상을 ‘축약(reduction)’이라 한다. 학교문법에서는 일반적으로 격음화만을 축약으로 보지만 좀 더 광범위하게 살펴보면 ‘선생님'을 ‘쌤'이라고 부른다든가 ‘형님'을 ‘햄'으로 한다든가 하는 것들 역시 축약이라 할 수 있다.
God be with you → Goodbye
God’s spell → gospel
day’s eye → daisy
Botulf’s Stone → Boston
이처럼 축약은 여러 언어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축약은 주로 모음을 줄이는 것을 의미한다. 요즘 줄임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런 것들은 음운론적 축약이 아니라 형태론적 축약이다. 멘탈이 붕괴됐다는 것을 ‘멘붕'이라고 하거나 실시간베스트 갤러리를 ‘실베'라고 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음운론의 영역이 아니다.
구개음화(palatalizatoin): 구개음이 아닌 음들이 구개음 쪽으로 조음점이 이동하여 발음되는 현상. 학교문법에서 배우는 아주 유명한 음운 변동 중 하나로 학교문법에서는 ‘밭이[바치]’, ‘굳이[구지]’처럼 ‘ㄷ, ㅌ'이 모음 ㅣ 또는 반모음 j로 시작하는 형식형태소와 만나서 구개음인 'ㅈ, ㅊ'으로 바뀌는 게 그 예이다. 치경구개음이 구개 방향으로 이동하여 발음이 바뀌는 이 현상을 ㄷ-구개음화(t-palatalizatoin)라 한다. 구개음화는 자음이 모음에 동화되는 현상이라 학교문법에서 다루는 일반적인 자음동화와는 다르다.
장영준(2019: 142)
이 그림은 구강의 안쪽이나 입구에서 나는 소리가 주변음의 영향으로 가운데인 입천장(palate)쪽으로 이동하여 나는 음 변화 현상을 보여준다. 그림에서 나온 구개음화는 연구개음이 구개 방향으로 이동하여 발음이 바뀐 ㄱ-구개음화(k-palatalization)이다.
한편, 한국어의 ㄷ-구개음화를 설명할 때 역사적 구개음화 내지는 통시적인 구개음화라는 것이 있다. 이에 대해선 팡일이가 설명한 영상이 있는데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현대국어의 /ㅈ, ㅉ, ㅊ/은 치경구개음이지만 중세국어에선 치경음(치조음)이었기 때문에, 중세국어에선 공시적으로 ‘밭+이’가 [바치]로 발음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17세기 무렵 /ㅈ, ㅉ, ㅊ/의 조음점이 바뀌면서 치경음에서 치경구개음이 되고, /ㄷ, ㅌ/이 ㅣ나 j 뒤에서 매우 불안정해 안정적인 치경구개음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ㄱ-구개음화는 남부방언권에서 자주 보인다. 연구개음인 /ㄱ, ㄲ, ㅋ/ 등이 전설모음 /ㅣ/ 앞에서 경구개음 [ㅈ, ㅉ, ㅊ]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하는데 대표적인 예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기름 → 지름
김치 → 짐치
길 → 질
끼다 → 찌다
ㄱ-구개음화는 로망스어 계통에서 흔히 발견된다. 전설모음인 /ɪ, e/ 앞에서 /g, k/ 등이 [d͡ʒ, t͡ʃ]로 발음되는 것들이 이에 속한다. 영어에 도입된 많은 프랑스어, 라틴어 등은 k-palatalizatoin 현상을 보인다. general, generation, genome, genial, gentlemen, gigantic, gill, ginger, 등이 그 예이다. 또 로마의 정치인이었던 Cicero는 [키케로]라고 읽기도 하지만 [치체로]로 읽히기도 하는데 이 역시 k-palatalization 때문이다.
ㅎ-구개음화란 것도 존재한다. ‘형님'이 ‘셩님/성님'이 되거나, ‘힘'이 ‘심'이 되거나 하는 것들이 그 예이다. /h/가 전설모음 /i/나 반모음 /j/를 만나 경구개 마찰음인 [ç]로 구개음화된다. ㄴ도 구개음화가 될 수 있다.
모음조화(vowel harmony): 한 단어 내에서 비슷한 모음끼리 어울리는 현상. 지금까지 살펴본 음 변화는 이웃하는 두 개의 음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음 변화를 일으키는 음운규칙들이었다. 그런데 어떤 음운현상은 인접해 있지 않은 음이 멀리 떨어진 다른 음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모음조화가 바로 그런 예이다. 물건이 물에 빠지는 소리를 나타낼 때, 크고 무거운 소리는 ‘풍덩풍덩'이라고, 작고 가펴운 소리는 ‘퐁당퐁당’이라고 한다. 우리말의 모음은 /ㅏ, ㅗ/ 계열의 양성모음과 /ㅓ, ㅜ/ 계열의 음성 모음으로 구분된다.
어떤 음들이 서로 어울리는지는 개별 언어마다 다를 수 있다. 튀르키예어에서는 목적격을 만들 때는 다음예에서 보듯이 주격 명사의 마지막 모음에 같은 종류의 모음을 붙여서 만든다.
의미 주격 목적격
half buçuk buçuk-u
pear armut armud-u
autobus otobüs otobüs-ü
명사의 목적격을 만들 때 선행모음에 따라 목적격 어미가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튀르키예어에선 강모음과 약모음으로 서로 대응하며 강모음끼리, 약모음끼리 서로 모인다. 또 복수 접미사는 기본적으로 /-ler/이지만 모음 /e/는 선행하는 모음과 같은 종류의 것으로 바뀐다.
의미 단수 복수
meat et et-ler
horse at at-lar
man adam adam-lar
그렇지만 규칙이란 것들이 으레 그렇듯 예외는 존재한다. 언매러들은 뭔 소린지 알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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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운규칙의 기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겠지만 우리말에서 ‘ㄴ'은 ‘ㄹ'이 뒤따를 경우 ‘ㄹ'로 바뀐다. 언매러들은 “유음화”라는 이름으로 기억할 것이다.
신라 [실라]
원리 [월리]
한라 [할라]
이 현상은 “n → l / ____ l”이라는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앞으로 음운 규칙을 이렇게 부호화할 것인데
X → Y / ____ Z
위 수식의 뜻은 “X가 ____Z라는 환경에서 Y로 바뀐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X는 변화를 받는 대상, 화살표는 “로 바뀐다"라는 뜻, Y는 결과이다. 사선 /는 “이러이러한 환경에서"라는 뜻이고 밑줄(____)은 변화가 일어나는 위치를 뜻하고, Z는 변화를 야기시키는 음을 나타낸다. 다시 돌아가면 /ㄴ/이 /ㄹ/로 바뀌는 음 변화를 국어학에서는 자음접변이라 부른다. 한국인들은 /ㄴ/을 발음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다. 비록 /ㄴ/을 발음할 수 있지만 유독 /ㄹ/이 뒤따를 경우 예외 없이 [ㄹ]로 바뀐다. 비록 /ㄴ/을 발음할 수 있지만, 우리의 혀가 다음에 나올 /ㄹ/ 소리를 미리 예측해서 바뀐 것이다.
그렇지만 유성음 사이에서 유성음이 되는 국어[kugə]의 경우 처럼 ____ 양쪽에 조건의 표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즉,
X → Y / P ____ Q로 표기할 수도 있다.
또 음운변화가 어두나 어말에서 일어날 때 Z가 어떤 실제의 말소리가 아니고 어휘경계(그 부호로 주로 #을 쓴다)일 수도 있고, 또 어느 때는 X가 속하는 문법범주를 명시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비음이 동사어간의 끝소리이면 뒤에 오는 평음 어미가 경음화된다. 이러한 현상을 수식화할 때 X에 동사 어간이라는 범주를 명시해야 한다.
음운 규칙을 어떻게 기술하는지 알았으니 앞서 다뤘던 음운 규칙들을 수식화해 보자.
국민 [kuŋmin], 법문 [pəmmun], 끝만 [k*ɯnman] 등에서 보이듯 평음이 ㅁ 앞에서 비음화한다. 이를 수식화하면
p → m / ____ m
t → n / ____ m
k → ŋ / ____ m
위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비음화 환경음 /m/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국내 [kuŋnæ], 입내 [imnæ], 끝날 [k*ɯnnal] 등도 있기 때문에
p → m / ____ n
t → n / ____ n
k → ŋ / ____ n
위와 같이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이 여섯 가지의 규칙으로 표현된 이 음운현상은 동일한 음운현상이다. 즉 동일한 음운현상을 여섯 가지로 세분화한다면 이는 매우 비경제적인 행위라 할 수 있는데 따라서 한 규칙으로 기술해야 한다. 우리는 /k, t, p/가 자연음군 무성파열음을 이루며, [m, n, ŋ]도 자연음군 비음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과 이러한 자연음군을 표현하는 변별적 자질로 음운 규칙을 기술하면 규칙의 보편성을 자연스럽게 표기할 수 있다. 음소는 말소리의 최소 단위이기는 하나, 실제로는 해당 음소가 가지고 있는 음성적 특징에 따라 분류된다.
[-conitunant] → [+nasal] / ____ [+nasal]
변별자질의 이론적 장점이 바로 이것이다.
국어의 유성음화 규칙은 어떻게 나타내야 할까? 만약 변별자질을 이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보자. 국어의 평음(ㄱ, ㄷ, ㅂ, ㅈ)은 유성음 사이에서 유성음화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유성음이란 모든 모음을 포함한다. 우리말의 모음은 21가지가 있는데 선행하는 유성음과 후행하는 유성음이 반드시 같을 필요는 없기 때문에 유성음 환경의 경우의 수는 총 21x21 즉 441 가지이다. 그런데 평음이 네 개가 있기 때문에 4 x 441 즉 1764 가지라는 어처구니없는 수가 나오게 된다. 즉 음운으로 일일이 표기하려면 매우 매우 비합리적이고 비경제적이다. 그렇지만 변별자질을 쓰게 되면 한 줄로 해결된다.
[-continuant] → [+voice] / [+voice] ____ [+voice]
물론 자연음군이 언제나 변별 자질 하나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두 자질, 때로는 세 자질로 표현될 수도 있다. [+continuant, -voice]는 무성마찰음군, [-continuant, +aspirated]는 유기파열음군, [-continuant, +aspirated, +anterior]는 전방유기파열음군이다. 변별자질이 거추장스럽게 보이지만 기존의 음성기호에 비해 이론적인 장점이 많은 것은 바로 이렇게 글자 몇 가지로 수많은 경우의 수를 단 한 줄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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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형과 기저형
앞에서 우리는 국(國)/kuk/이라는 국어의 형태소가 환경에 따라 [kuŋ], [kug], [k*ukㄱ], [gukㄱ], [guŋ] 등 여러 가지로 나타남을 보았고 이러한 변형을 음운규칙으로 기술함을 보았다. ‘국민'의 경우를 보자. /kuk/이라는 음소는 이러저러한 음운규칙을 겪어 [kuŋ]이라는 음성 즉 발음이 된다. 이때 음운규칙이 적용되기 이전의 어형을 기저형(underlying form) 혹은 음소 표기(phonemic transcription)라 하고, 음운규칙의 적용을 받아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발음을 표면형(surface form) 또는 음성표기(phonetic transcription)이라고 한다.
여기서 음소와 음성의 차이가 드러난다. 기저형 그러니까 음소 표기는 화자의 의식 속에 보관된 고정형이다. 화자가 심리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kuŋ] 등은 이음형이며 실제 발음형이다. ‘국(國)’의 실제 발음이 여러 가지임에도 국어화자는 이를 하나로 의식하고 하나로 표기한다. 화자의 언어지식을 기술하는 것이 문법이며 그렇다면 문법 어느 곳에선가 이들이 하나로 표기된 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곳이 바로 어휘가 기저형으로 표기된. 표기층(level of underlying represntation)이며, 기저형 표기층과 표면형 표기층을 따로 설립하는 합리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두 표기층을 연결하는 것이 바로 음운 규칙이다. 그러니까 기저형이 표면형으로 되는 것은 음운규칙으로 설명된다.
많은 경우에 기저형과 표면형을 다를 수밖에 없다. 기저형 /신라/는 표면형 [실라]가 될 것이고, cat의 경우 기저형 /kæt/이 표면형 [kʰæt]이 된다. / /는 음소 표기라고 하였는데 영어 화자가 cat을 /k/, /æ/, /t/ 이렇게 세 음소로 이루어졌다고 마음 속으로 인식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 물리적 소리를 들어보면 /k/에는 기식이 들어가기 때문에 위첨자 h가 붙는다. ‘tenth’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이 단어는 /tɛnθ/라는 원형이 이러저러한 음운규칙의 적용을 받아 최종적으로 [tʰɛn̪θ]가 된다.
‘little’을 보자. 기저형 /lít(ə)l/이 표면형 [líɾɫ̩]로 발음된다. 즉 영어 화자가 음소 /l/, /í/, /t/, /l/(괄호 생략)을 인식하고 발음을 하는데 이 음소의 발음이 물리적으로 어떤 식으로 구성됐는지 살펴보면 표면형과 같이 발음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두의 l을 [l]로 발음하든 [ɫ]로 발음하든 이는 별개의 음소가 아니다. 단순히 l 소리를 물리적으로 다룰 때 연구개음화된 소리라는 것이다. ‘pen’도 그렇다. 기저형 /pɛn/이 표면형 [pʰɛ̃n]으로 실현되는데 어두의 [pʰ]를 [p]로 발음한다고 하여 영어 화자가 이상함을 느낄지언정 다른 단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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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의 적용 순서
우리는 매우 다양한 음운규칙들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다룬 규칙들은 모두 개별적으로 적용되는 경우들만을 가정하여 소개했다. 그러나 실제로 음운현상은 단 하나의 규칙이 적용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몇 개의 음운규칙이 특정한 순서로 적용되어 최종적인 발음을 이끌어낸다. magic~magician 경우를 보자. magic의 발음은 [mǽd͡ʒik]이고 접미사 -ian은 [ɪən]이다. k와 i가 맞났으니 [mǽd͡ʒɪkɪən]이 될 거 같지만 실제 발음을 들어보면 [məd͡ʒíʃən](머지션)이 된다. 영어 magician이 어떻게 발음되는가를 살펴보면 여기에는 적어도 네 가지의 음운 규칙이 적용됨을 알 수 있다.
magic은 magic+-ian인데 기저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magic이 단독형일 때는 [mǽd͡ʒɪk]으로 발음됨을 알고 magician과 같은 구조에선 [məd͡ʒíʃ]와 같이 발음됨을 안다. bat과 bet이 다른 단어이고 sheep과 keep이 다른 단어이듯 [mǽd͡ʒɪk]과 [məd͡ʒíʃ]도 음운이 다른데 다른 단어가 아닐까? 영어 화자의 자국어에 대한 직관(native intuition)은 이 두 가지를 별개의 단어로 보지 않고 하나로 본다. 이때 두 음형이 같은 어휘라 함은 두 음형이 동일한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두 음형이 같은 단어라면 같게 표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magic을 /mǽd͡ʒɪk/으로 표기하기 때문에 magician은 /mǽd͡ʒɪk-ɪən/으로 표기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기저형 표기이다. 이 기저형이 이러저러한 음운 규칙의 지배를 받아 표면형 [məd͡ʒíʃən]이 된다.
기저형: / m ǽ d͡ʒ ɪ k + ɪ ə n /
↓ ↓ ↓ ↓
음운 규칙: ə í ʃ ∅
표면형: [məd͡ʒíʃən]
기저형에서 표면형이 도출되기까지 네 가지의 음운규칙이 적용되었다(4의 경우 magic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 우선 포함하였다)
- 첫음절 모음이 [æ]에서 [ə]로 바뀌는 규칙
- 강세 위치가 첫음절에서 다음 음절로 이동하는 규칙
- 어말의 무성폐쇄음 [k]가 치경음 [ʃ]로 구개음화되는 규칙
- 행위자를 의미하는 접미사 ‘-ian’의 모음 [ɪ]가 탈락되는 규칙
이 규칙들은 아무런 순서 없이 적용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순서대로 적용되어야 하는가? 아무런 순서 없이 기저형에 다수의 규칙들이 적용되는 것을 직접유도(direct mapping) 또는 무순규칙가정(unordered rule hypothesis)이라 하고, 특정한 순서로 기저형에 다수의 규칙들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을 간접유도(indirect mapping) 또는 유순규칙가정(ordered rule hypothesis)이라 한다.
위의 magician의 경우는 유순규칙가정에 부합되는 예이다. 각 규칙의 환경을 고려해 보면 어느 규칙 사이에는 적용의 선후관계가 성립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우선 3과 4의 관계를 보자. /k/가 구개음화되기 위해서는 전설모음이 뒤따라야 하는데, 만일 뒤에 나오는 전설모음 /ɪ/를 먼저 탈락시켜 버리면 /k/는 구개음화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ɪ/의 탈락보다는 /k/의 구개음화가 먼저임을 알 수 있다. 즉 3이 먼저 일어난다.
또 2와 4 사이에도 선후관계가 있다. 규칙 2는 영어의 강세 배당규칙의 하나로, 영어에서 다음절 명사는 끝에서 두 번째 음절(penult)이 장모음이거나 후행자음이 둘 이상일 때는 그 음절에 강세가 오지만, 이 음절이 단모음이거나 후행자음이 하나 또는 없을 때는 강세가 끝에서 세 번째 음절(antepenult)에 강세가 온다.
2. América, divínity, pérsonal
이 강세규칙에 따르면 네 음절어인 기저형 /mǽd͡ʒɪk-ɪən/(mæ-d͡ʒɪk-ɪ-ən)은 penult 음절 i가 단모음이며 후행하는 자음이 없으므로 강세가 표면형에 나타나듯 음절 d͡ʒɪk에 오게 된다. 그런데 모음 /ɪ/가 먼저 탈락해 버리면 강세의 위치는 첫 번째 모음에 오게 된다. 왜냐면 4가 먼저 적용되면 magician은 (mæ-d͡ʒɪk-ən)의 세 음절어가 되고 penult 음절 d͡ʒɪk의 ɪ가 단모음이며, 후행자음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강세는 antepunlt인 mæ에 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실제와 다른 결과이므로, /ɪ/의 탈락이 강세이동 규칙보다 먼저 적용되면 안 된다.
또, 1과 2 역시 선후관계가 존재한다. 아무런 강세가 없는 음절의 모음은 슈와(schwa) 그러니까 [ə]로 이완(lax)된다는 규칙이 영어에 있기 때문이다. 다음 예들을 보자.
Japan [d͡ʒəpǽn] → Japanese [d͡ʒæpəníːz]
phone [fóʊn] → phonology [fənɔ́ləd͡ʒɪ]
repeat [ɹɪpíːt] → repetition [ɹèpətíʃen]
그러니까 magician에서 [æ]에서 [ə]로 바뀌는 것은 규칙 2에 의하여 강세가 후행음절에 배당되면서 [æ]에 강세가 없게 되자 이완모음 [ə]로 바뀌게 된 것이다. 즉 규칙 2가 규칙 1보다 먼저이다.
그렇지만 규칙 1과 3, 규칙 1과 4, 규칙 2와 3 사이에는 규칙순서의 선후 관계를 규정지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음운규칙 사이에는 적용순서를 규정할 필요가 없지만 어떤 음운 규 사이에는 적용순서의 규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말에도 규칙적용에는 특정한 순서가 있는 경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개'는 원래 ‘가히'였다. 그런데 여기서 /ㅎ/이 먼저 탈락하지 않는다면, ‘가히'는 ‘개'로 축약이 될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실제 어형인 ‘개'가 도출되지 않는다. 따라서 /ㅎ/의 탈락을 먼저 적용시켜 /가이/가 되고 그 다음에 /개/로 축약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음운론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 몇 가지를 배웠다. 화자가 자국어의 음운에 관해 가지고 있는 지식은 대체로 세 가지인데, 첫째는 자국어에 쓰이는 음소의 목록과 이 음소에 속하는 이음들의 분포 상태이다. 둘째로 화자는 자국어에 어떤 음운규칙이 있는가를 안다. 셋째로 화자는 자국어에 어떤 음운규칙이 있는가를 안다. 음운규칙은 기저형에서 표면형을 유도하는데, 그 적용순서가 규정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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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운규칙의 적용순의 경향과 원리
음운규칙 사이에 어떤 일정한 적용순이 정해질 때, 이 적용순의 규정은 각 언어마다 예측을 불허하는 자의적인 것인가 아니면 적용순을 규정짓는 어떤 범언어적인 원리가 있는가? 이것은 현대 음운론에서 아직도 거론되고 있는데, 요점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은 범언어적인 원리에 의해 규칙순이 배열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정론이다.
첫째, 음운규칙은 규칙들이 최대한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적용순이 배열된다. 이를 최대적용원리(the principle of maximum application)라고 한다. 규칙 A와 규칙 B가 있을 때 규칙 A가 적용된 도출형이 규칙 B가 적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반면, 거꾸로 규칙 B를 먼저 적용하면 규칙 A의 적용범위가 줄어들게 될 때는 그 적용순이 B-A로 보다 A-B로 배열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든 적용순의 예들은 대체로 이 원리에 부합하는 것들이다. “가히→가이→개”에서 자음 탈락 때문에 모음축약이 가능해지지만 순서를 바꾼다면 모음 축약이 적용될 수 없다.
독일어에는 대표적인 예시가 있다. 독일어에서 어말 유성자음을 무성음화시키는 규칙이 약 서기 1000년 전에 들어어고, 그보다 4세기 후인 1400년경에 유성자음 앞에서 모음을 장음화시키는 규칙이 생겼다.
기저형: /lob/ 칭찬 /lob+əs/(복수)
무성자음화: lop ——
장모음화: —— lo:bəs
표면형: [lop] [lo:bəs]
이렇던 표면형이 한 독일방언에서 [lo:p], [lo:bəs]로 나타나면서 다른 방언지역으로 퍼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적으로 무성음화 — 장모음화의 순서로 독일에 들어온 규칙이 현대 독일방언에서는 장모음화–무성음화로 재배열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재배열의 동기는 규칙의 최대적용원리에 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기저형: /lob/ 칭찬 /lob+əs/(복수)
장모음화: lo:b lo:bəs
무성자음화: lo:p ——
표면형: [lo:p] [lo:bəs]
즉 무성자음화 규칙이 먼저 일어나면 장모음화 규칙은 복수형에만 적용되는 반면, 장모음화 규칙이 먼저 일어나면 복수와 단수형 모두 장모음을 지니게 된다. 규칙의 최대적용원리는 대저 언어규칙이 될 수 있는 대로 보편성을 띠려는 원리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규칙순 재배열의 또 다른 원리는 의미의 구별이 음운형의 차이로 유지되게끔 한다는 것이다. 이를 의미구별원리(the principle of semantic distinctness)라 한다. 즉 단어의 의미의 구별이 규칙 A-B의 순서로는 움운론적으로도 구별되는데 규칙 B-A의 순서는 음운적 구별을 없애 동음이의어를 낳게 되면, 언중은 A-B 순서를 택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에 있는 쇼나어(Shona)에서 보이는 현상을 살펴보자. 이 언어에는 비음의 조음 위치가 후행하는 파열음의 조음 위치에 동화되는 규칙이 있고, 또 파열음이 비음 뒤에서 h로 바뀌는 규칙이 있는데, 이들 규칙은 언급한 순서로 적용된다. 즉
기저형: /np/ /nt/ /nk/
비음 조음&위치동화: mp —— ŋk
비음 뒤 h화: [mh] [nh] [ŋh]
기저형의 /np/는 [mh]로, /nt/는 [nh]로, /nk/는 [ŋh]로 표면형으로 나타남으로써 표면형에서도 음운적 차이가 유지된다. 그러나 두 규칙순이 거꾸로 적용된다고 가정해 보자.
기저형: /np/ /nt/ /nk/
비음 뒤 h화: nh nh nh
비음 조음&위치동화: [ŋh] [ŋh] [ŋh]
즉 기저형에서 /np/, /nt/, /nk/로 구별되던 어휘들이 표면형에서 모두 [ŋh]로 나타나 많은 동음이의어를 산출하게 된다. 이러한 동음이의어의 산출을 가능한 한 피하려 함은 당연할 일이다.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언어의 목적이라면 동음이의어가 많아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을 테니까.
다음 편은 형태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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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받는'입니다. 정정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