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떨어진동전 [1245407] · MS 2023 (수정됨) · 쪽지

2023-09-25 20: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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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와 '곰', 그리고 단군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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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가다 보면 ‘고맙다'의 ‘고마'가 ‘신’ 또는 ‘곰(熊)’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 보인다. 이걸 뭐 단군신화랑 엮어서 곰을 숭배하니 공경을 나타낼 때 ‘고맙다'라는 말을 쓰게 된 거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데 개소리다. 


우선 ‘곰'이 ‘고마'로 쓰인 것도 맞고 ‘고맙다'가 ‘고마'라는 말을 어근으로 갖는 것은 맞는다. ‘곰'이 ‘고마'로 쓰인 용례는 용비어천가가 유일하지만 차자 표기를 보면 ‘고마'에서 음절 축약을 겪어 ‘곰'이 되었다고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그리고 ‘고맙다'는 16세기부터 등장하며 현재와 똑같은 형태로 쓰였다. 그리고 15세기 기록에는 ‘고마ᄒᆞ다’가 보인다. 여기서 ‘ᄒᆞ다’는 당연히 접사일 것이므로 ‘고마’는 ‘공경'이나 ‘존경'을 뜻하는 명사임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이 ‘고마(敬)'라는 명사와 동물 ‘고마(熊)’를 엮기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1. 용비어천가에 등장하는 ‘고마(熊)'의 고저 악센트는 ‘LH(평성-거성)’이었고, ‘고마ᄒᆞ다’의 ‘고마(敬)'는 ‘RH(상성-거성)’으로 나타난다.


중세국어의 고저 악센트(소위 말하는 성조) 역시 단어의 뜻을 구분해 주는 자질인데 악센트가 다르다는 것은(특히 15세기 국어에서) 두 단어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적다는 뜻이다. 이는 이미 몇 십 년 전부터 국어학자들이 지적해 온 바이다. 또 중세국어의 상성은 다음절이 축약되며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므로 고대 국어 시기 ‘고마(敬)’는 ‘고마(熊)’와 형태가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 동원일 가능성이 더 적어지게 된다.


2. 중세 때 보이던 형용 파생 접미사 ‘-압/업-’ 또는 ‘-ㅂ/ᄇᆞ/브-’는 동사에 붙어 형용사를 만들어낸다. 


접사의 분포상의 제약을 고려하면 ‘고마’라는 명사에 갑자기 접미사 ‘-압-’이 붙었다고 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물론 ㅂ 불규칙 형용사들은 대부분 어원적으로 위의 접사들이 붙었다고 여겨지므로 오히려 ‘고마+-압-’이 아니라 ‘고마ᄒᆞ-+-ㅂ-’으로 보고 모음 사이에서 ㅎ이 약화되고 탈락하여 ‘고맙-’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마'에서 바로 ‘고맙다'가 온 게 아니라 ‘고마ᄒᆞ다'라는 말에서 ‘고맙다'가 온 것이다. 



‘고맙다'가 형성된 과정에 대한 설명도 잘못됐고 중세국어의 특징인 성조(엄밀히는 고저 악센트)도 고려하지 않은 겉보기만 그럴 듯한 설명이다. 따라서 ‘고맙다'와 ‘곰'은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쓸데없이 단군신화랑 엮으려는 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배달'도 그렇고, '겨례'도 그렇고 말이다. '배달' 같은 경우는 민족주의가 유행하던 근대 때 등장한 단어고 '겨레' 같은 경우 '결에'라는 형태로 16세기부터 등장하긴 하지만 '민족'을 뜻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니 이런 단어가 고대 국어에서도 있었다고 하며 단군이랑 엮으려는 설명은 믿을 게 못 된다. 민간 어원이 참 골 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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