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철학] 심적 상태란 무엇인가?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62402713
심리철학 1주차 복습 페이퍼_유삼환.pdf
저는 철학과 복수 전공을 희망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학기에 <심리철학> 수업을 수강하고 있습니다. 심리철학은 마음의 본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하는 철학의 분야입니다. 복습을 목적으로 복습 페이퍼를 써 보았는데, 열심히 쓴 거 다른 분들도 읽어 봐 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에 오르비에도 올려 봅니다. 배경지식을 쌓고 독해력을 향상시키는 데도 작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
.
<심리철학 1주차_1>
인간은(인간뿐 아니라 일부 동물도) ‘마음(mind)’을 갖는다. 직관적으로 우리는 마음을 ‘몸(body)’과는 구분할 수 있다. 내가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는 것은 내 몸의 활동이지만, 고통을 느끼거나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은 내 마음의 활동이다. 그러나 직관적인 수준에서 마음과 몸을 구분한다고 해서, 우리가 마음과 몸 사이의 상호 작용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목이 마른 느낌’을 갖는 것은 마음의 활동이지만, 이러한 마음의 활동은 나로 하여금 주방으로 걸어가 물을 마시는 몸의 활동을 하게 만든다. 반대로 날카로운 칼에 긁혀 상처가 나는 것은 몸의 활동이지만, 이러한 몸의 활동은 나로 하여금 ‘고통을 느끼는’ 마음의 활동을 하게 만든다.
마음의 본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몸과 마음의 관계는 무엇이지에 대한 문제를 심신 문제(mind-body problem)라고 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는 몸과 마음이 완전히 다른 실체라는 것이다. 이는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제시한 ‘실체 이원론(substance dualism)’이라는 이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실체 이원론에 따르면 세계에는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실체가 존재한다. 하나는 물리적 실체이고, 다른 하나는 비물리적 실체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은 비물리적 실체이고, 인간의 몸은 물리적 실체이며 인간은 전혀 다른 두 실체가 결합된 결합체이다.
잠시 ‘실체(substance)’란 무엇인지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는 굉장히 복잡한 철학적 주제이지만, 여기서는 간단한 아이디어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데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실체란 어떤 구체적 대상(objects)을 의미한다. 데카르트는 이를 “스스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예를 들면 사람, 컴퓨터, 책상 따위의 것들을 모두 실체로 볼 수 있다. 반면 ‘속성(property)’은 실체가 갖는 특성이다. 우리는 “이 책상은 하얗고, 빈 방에 놓여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이 책상’이라는 하나의 실체가 ‘하얌’과 ‘빈 방에 놓여 있음’이라는 속성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이를 “실체는 속성을 예화한다(exmplify).”라고 말한다. 실체와 속성의 개념을 좀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의 사고 실험이 도입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오직 그것만이 존재하는 우주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 무언가는 실체이지 속성이 아니다. 나는 지금 내 앞에 있는 노트북만이 존재하는 우주를 상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 앞에 있는 노트북은 실체이다. 그러나 나는 ‘하얌’만이 존재하는 우주를 상상할 수 없다. ‘하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하얌’을 가지는 어떤 실체가 존재해야만 할 것 같다.
실체 이원론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이론은 유물론(meaterialism) 내지는 물리주의(pysicalism)이다. 물리주의는 일종의 실체 일원론으로, 세계에 비물리적 실체가 존재한다는 점을 부정한다.1) 물리주의에 따르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시공간에 위치한 물질 조각들과 이것들로 이루어진 결합체뿐이다. 물리주의를 받아들인다면, 대체 우리가 갖는 ‘마음’의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리주의에서 인간이 마음 내지는 정신적 속성을 갖는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물리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적2) 속성을 갖는 물리적 존재자이다. 그러나 물리주의는 “인간은 마음을 갖는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인간이 ‘마음’이라는 어떤 별개의 실체를 갖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음을 꼬집는다. 예를 들어 “삼환은 백양로를 따라 산책을 했다.”라는 진술에서, ‘산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볼 이유는 없다. 아무도 산책을 하지 않을 때 ‘산책’은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가? ‘산책’은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우리의 몸의 기능 내지는 활동이다. 물리주의는 이러한 논의를 마음의 본성을 규명하는 데 그대로 적용한다. ‘산책’이 몸이라는 물리적 실체의 기능 내지는 활동이듯이, ‘마음’은 두뇌라는 물리적 실체의 기능 내지는 활동일 뿐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리적 실체뿐이고, ‘마음을 가짐’은 단지 물리적 실체인 두뇌의 속성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잠시 실체 이원론과 물리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해 보자. 인간이 다양한 종류의 정신적 속성, 능력을 가진다는 점에서 다른 종류의 물리적 대상들과 구분된다는 데는 실체 이원론과 물리주의가 모두 동의한다. 인간은 마음을 가지고 여러 정신 작용을 하지만 나무(tree)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정신적 속성, 능력의 발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대해서는 실체 이원론과 물리주의 간에 입장의 차이가 있다. 실체 이원론은 그것을 위해 비물리적 실체(예를 들면 영혼)가 존재해야 한다고 보는 데 반해, 물리주의는 이러한 정신적 속성, 능력이 발현하는 것이 물리적 실체인 뇌의 존재만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대부분의 현대 심리철학자들이 받아들이는 입장은 실체 이원론이 아니라 물리주의이다. 대부분의 현대 심리철학자들이 현재는 비물리적 실체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오직 물리적인 것뿐이다. 물리주의가 ‘실체’의 존재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는 이론이기 때문에, 앞서 ‘물리주의’로 소개했던 이론을 ‘실체 물리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체 물리주의는 다시 두 입장으로 분류될 수 있다. 바로 환원적 물리주의(reductive pysicalism)와 비환원적 물리주의(nonreductive pysicalism)이다. 두 입장은 모두 실체 물리주의에 속하므로 인간의 ‘마음’, 즉 인간의 ‘정신적 속성’을 물리적 실체인 인간의 두뇌가 예화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환원적 물리주의에서 정신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으로 완전히 환원된다(정신적 속성은 곧 물리적 속성과 같다)고 주장하는 데 반해, 비환원적 물리주의에서는 정신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정신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과는 구별되는 비물리적 속성이라)고3) 주장한다.
실체 물리주의의 주장을 전제로 한 속성 이원론(property dualism)은 비환원적 물리주의라고 볼 수 있다. 속성 이원론이란, 이 세계에 두 종류의 전혀 다른 속성이 있다고 보는 이론이다. 이 세계에서는 물리적 속성과 비물리적 속성이 존재하며, 비물리적 속성은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물리적 속성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속성이다. 물론 실체 이원론자 중에서도 속성 이원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들은 이 세계에 오직 물리적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물리주의의 기본 입장을 거부하므로 비환원적 물리주의자로 분류될 수 없다. 반면 이 세계에 오직 물리적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실체 물리주의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럼에도 이 세계에 두 종류의 전혀 다른 속성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비환원적 물리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물음을 던져 볼 수 있다. ‘실체 물리주의를 받아들이는 속성 이원론자를 진정한 의미에서 물리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진정한 물리주의자’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실체 물리주의’를 받아들인다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물리주의자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볼 수 없으며, 진정한 물리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실체 물리주의를 받아들임은 물론 정신적인 것에 대한 물리적인 것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대상이 어떤 심적 속성을 가지는지는 그 대상이 어떤 물리적 속성을 가지는지에 의존하거나 그것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진정한 물리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의존, 결정의 개념을 ‘수반(supervenience)’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따라서 위의 주장은 진정한 물리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수반’이란 무엇일까? 수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개념이 시작된 도덕 철학의 논의를 끌어와야 한다. “삼환은 선한 사람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해 보자. 이때 삼환과 정확히 동일한 여건에 있고 삼환과 동일하게 행동하는 승환4)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삼환과 승환의 비규범적·기술적 속성(어떤 여건에 있고 어떻게 행동한다 등)이 동일하다면, 필연적으로 삼환과 승환의 규범적·윤리적 속성(선하다, 악하다 등)도 동일할 수밖에 없다. 이때 우리는 규범적·윤리적 속성 속성이 비규범적·기술적 속성에 수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슷한 경우가 미학에도 있다. 만일 그림 A와 그림 B가 모양, 크기, 색깔, 질감 등의 모든 물리적 속성에서 동일하다면 그림 A와 그림 B는 미적 속성에서도 필연적으로 동일할 수밖에 없다. 그림 A와 그림 B가 모든 물리적 속성에서 동일하다면, 그림 A는 아름답지만 그림 B는 아름답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 오류이다.
그렇다면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는 말의 의미도 알 수 있다.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는 것은 두 대상이 모든 물리적 속성을 똑같이 가지면서 서로 다른 정신적 속성을 가질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즉 ‘물리적 속성의 동일성’은 ‘심적 속성의 동일성’의 충분조건이며, ‘심적 속성의 차이성’은 ‘물리적 속성의 차이성’의 충분조건이다(대우). 이를 심신 수반 논제라고 한다.
만일 심신 수반 논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물리주의자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면,5) 실체 물리주의를 받아들이는 속성 이원주의자는 자신이 진정한 물리주의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입장과 심신 수반 논제가 일관적임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심신 수반 논제와 속성 이원주의는 양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물리적 속성에 심적 속성이 수반한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는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규범적·윤리적 속성이 비규범적·기술적 속성에 수반한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규범적·윤리적 속성이 비규범적·기술적 속성으로 완전히 환원된다는 주장까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실체 물리주의를 받아들이는 속성 이원론자가 심신 수반 논제까지 받아들인다면, 그는 적어도 진정한 물리주의자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심신 수반 논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세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심신 수반 논제는 심신 수반 논제의 역이 성립함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심신 수반 논제의 역은 두 대상의 심적 속성이 같다면, 그 물리적 속성도 같다는 것이다. 이는 물리적 속성이 심적 속성에 수반한다는 말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심신 수반 논제는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는 주장을 펼 뿐, 그 역도 참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삼환’이라는 인간과 ‘E.T.’라는 외계인이 모두 ‘고통’이라는 심적 속성을 갖고 있음에도 양자가 갖는 물리적 속성은 다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둘째, 심신 수반 논제 자체는 데카르트와 같은 실체 이원론자들이 주장하는 비물리적 영혼의 존재를 배제하지 못한다. 데카르트의 실체 이원론에 따라 비물리적 실체인 영혼 A와 영혼 B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심신 수반 논제란 물리적 속성의 동일성이 필연적으로 심적 속성의 동일성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혼 A와 영혼 B는 비물리적 실체이므로, ‘물리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동일한 물리적 속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심신 수반 논제에 따르면 비물리적 실체인 영혼 A와 영혼 B는 동일한 심적 속성을 갖는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다시 말해, 심신 수반 논제 자체는 비물리적 영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하고, 모든 비물리적 영혼이 동일한 심적 속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실체 이원론자도 모든 비물리적 영혼이 동일한 심적 속성을 갖는다는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6) 실체 이원론자들은 심신 수반 논제를 거부한다.
셋째, 심신 수반 논제가 진정으로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의존하거나 그에 따라 결정된다는 주장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많은 심리철학자들이 심신 수반 논제가 그 자체로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의존한다는 주장을 함축한다고 보지만, 어떤 사람들은 심신 수반 논제는 단지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과 어떻게 공변하는지(convary)에 대해서만 주장할 뿐, 그 자체로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의존한다는 주장을 함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심리철학 1주차_2>
우리는 직관적으로 무엇이 정신적 현상이고 무엇이 신체적(혹은 비정신적) 현상인지를 구분할 수 있다. 식사를 마친 후 일어나는 소화 작용 따위의 것은 비정신적 현상이지만, 날카로운 칼에 긁힌 뒤 느껴지는 ‘고통’이나 특정 대상에게 일어나는 ‘분노’ 등은 정신적 현상이다. 흔히 정신적 현상에는 감각, 감정, 의지, 믿음 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들을 다른 비정신적 현상들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왜 우리는 이런 것들을 정신적 속성으로, 다른 것들을 비정신적 속성으로 분류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는 방식 중 하나는 정신적 현상이 가지는 독특한 인식론적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론적 기준 중 하나는 바로 직접성과 즉각성이다. 정신적 현상은 비정신적 현상과 달리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인식된다. 이는 정신적 현상을 인식하는 데 별다른 추론이나 증거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치통(齒痛)을 겪고 있다면, 나는 그것을 어떤 추론이나 증거가 없이도 바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네가 이가 아픈 것을 어떻게 아는데?”라는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 된다. 나는 내가 치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그냥’ 알 수 있다. 반면 충치가 생겼다는 것은 비정신적 현상으로, 치과의사의 관찰 등 추론이나 증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정신적 현상은 사밀성(privacy), 주관성을 갖는데, 이는 각자 자신만이 자신의 심적 상태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타인이 나의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행동 등의 간접 증거에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인칭적 특권을 갖고 있다. 이렇게 정신적 현상을 인식하는 데는 일인칭과 삼인칭 사이의 인식적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반면 비정신적 현상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내게 충치가 생겼다는 비정신적 현상을 인식하는 데는 나나 타인이나 모두 객관적 증거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성과 즉각성이 과연 정신적 현상만의 특징인지에 대해서는 반론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앉아 있음’은 비정신적 현상임이 분명하지만 나는 내가 앉아 있음을 어떠한 증거나 추론에 의존하지 않고도 그냥 알 수 있다. 이처럼 자기수용감각에 의한 인식은 비정신적 현상에 대한 인식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현상에 대한 인식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특성을 띠는데, 이러한 사실은 직접성과 즉각성이 정신적 현상을 비정신적 현상과 구분해 주는 본질적 특성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또 다른 인식론적 기준으로 제시되는 것으로는 오류 불가능성(infallibility)과 투명성(transparncy)이 있다. 오류 불가능성이란, 자기 자신의 심적 상태에 대해서는 누구도 인식적 오류를 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오류 불가능성에 따르면 만일 내가 어떤 심적 상태에 있다고 믿는다면, 나는 반드시 그 심적 상태에 있다. 내가 내 심적 상태에 대해 어떤 착각을 저지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고통’과 같은 심적 상태에 대해서는 타당한 주장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대 심리학은 정말 모든 심적 상태에 대해 오류 불가능성이 성립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게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증오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이후에 특정한 계기를 통해 실제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마음이 증오가 아니었음을 깨달을 수도 있다. 이러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오류 불가능성이 정신적 현상이 가지는 인식론적 특성으로 적절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투명성은 오류 불가능성의 역으로, 내가 모르는 숨겨진 심적 상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투명성에 따르면 만일 내가 어떤 심적 상태에 있다면 나는 반드시 그 심적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이 역시 ‘고통’과 같은 심적 상태에 있어서는 타당한 주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심적 상태에 있어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지만 어떤 감정을 마음 깊숙한 곳에 가지고 있다가 이를 이후에 깨닫는 경우를 우리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적 현상을 비정신적 현상과 구분하는 기준으로 제시되는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지향성(intentionality)’이다. 지향성이란 무엇일까? 어떤 상태 A가 어떤 것에 ‘대한’ 것일 때, 즉 어떤 것을 ‘향해’ 있을 때, 우리는 A가 지향성을 가진다고 말한다. 많은 심적 상태들이 지향성을 갖는다. 믿음, 욕구, 의도, 희망, 걱정 등은 지향성을 띠는 대표적인 심적 상태이다. 이러한 심적 상태들은 모두 어떤 것에 대한 것으로서 그것을 향해 있고, 그것을 ‘표상(represent)’한다. 이를 표상 내용(의미)를 갖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7)
어떤 사람들은 지향성이 정신적 현상과 비정신적 현상을 구분짓는 핵심적 기준이라고 보면서, 지향성이 정신적 현상에만 배타적으로 성립하는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즉 어떤 비정신적 현상도 지향성을 가지지 않으며, 모든 정신적 현상이 지향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지향성을 비정신적 현상이 갖는 본질적 특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주장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각에서는 지향성이 정신적 현상만의 독특한 특징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심적 상태가 아닌 비정신적인 것들도 지향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언어’는 심적 상태가 아니지만 지향성을 가지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이라는 단어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표상하고, “서울은 넓다.”라는 문장은 서울이 넓다는 의미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정신적 현상, 심적 상태만이 지향성을 가진다는 주장은 그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언어와 같이 정신적 현상 외에 무언가를 표상하는 것들은 본래적인 지향성을 갖지 못하는 데 반해 정신적 현상은 본래적인 지향성을 갖는다는 식의 반박이 제기된다. ‘서울’이라는 단어가 ‘서울’이라는 도시를 표상하는 것은, 언어 사용자들이 그것을 그렇게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박의 요점은 언어 등 비정신적인 것들이 가지는 지향성은 정신적 현상이 가지는 근본적 지향성으로부터 파생된 지향성일 뿐이며, 근본적인 지향성을 가지는 것은 오직 정신적 현상뿐이라는 것이다.
또한 모든 정신적 현상, 모든 심적 상태가 지향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믿음, 욕구, 의도, 희망, 걱정 등의 정신적 현상이 지향성을 갖는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감각’이나 ‘감정’도 지향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을까? 가령, 고통이나 가려움 등의 신체적 감각이나 우울감 등의 감정이 지향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을까? 이러한 정신적 현상들은 대체 무엇에 대한 것이며 무엇을 향한 것일까? 무엇이 지향성을 가지고 무엇은 가지지 못하는지를 구분하는 기준 중 하나는 ‘그것이 올바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가’이다. 예를 들어 지금 비가 오고 있다는 믿음이라는 심적 상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만일 지금 진짜로 비가 오고 있다면, 이 믿음의 표상 내용은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지금 비가 오고 있지 않음에도 누군가가 지금 비가 오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한 믿음은 잘못된 표상 내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비가 오고 있다는 믿음은 그것이 올바른 표상 내용을 갖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으므로 지향성을 가지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에 긁혀 느껴지는 ‘고통’이라는 정신적 현상에 대해서는 올바름의 기준을 적용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지향성 개념이 정신적 현상과 비정신적 현상을 구분하는 명확한 기준으로 기능하기는 어렵지만, 이상의 논의는 우리가 여러 심적 상태들을 범주화하는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 준다. 많은 심리철학자들은 우리의 심적 상태들이 적어도 지향적 상태와 질적 상태(qualitative states) 중 하나의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 질적 상태들이란 방금 설명했듯이 지향적 상태를 가진다고 보기 어려운 상태들을 가리킨다.8) 예를 들어 고통 상태, 가려움 상태, 초록색을 보는 경험 상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상태들에는 모두 ‘느껴지는 독특한 방식’이 존재하며, 이러한 특징을 질적, 현상적(phenomenal) 특징, 혹은 감각질(qualia)이라고 부른다.
.
.
1) 실체 일원론임에도 불구하고 유물론 혹은 물리주의와는 정반대의 주장을 펴는 이론도 있다. 관념론(idealism)에서는 세계에 오직 비물리적 실체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2) ‘비물리적’이 아니다.
3) 비환원적 물리주의에서는 인간의 마음(정신적 속성)이 물리적 실체인 두뇌가 예화하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단지 그것이 ‘비물리적 속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 인간의 마음이 비물리적 실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4) 서승환. 연세대학교의 제19대 총장님이시다.
5) 이것이 진정한 물리주의자가 되기 위한 충분조건이기도 한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치열하다.
6) 비물리적 영혼이 존재하기는 한데, 모든 비물리적 영혼은 동일한 심적 속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게, 너무나도 반직관적이기 때문이다.
7) 예를 들어 윤석열이 대한민국 대통령임을 믿는 심적 상태가 있다고 해 보자. 이는 “윤석열은 대한민국 대통령이다.”라는 내용에 대해 ‘믿음’이라는 태도를 갖는 심적 상태이다. 그래서 이러한 심적 상태를 ‘명제적 태도(propositional attitude)‘라고 부르기도 한다.
8) 물론 지향적 상태이면서 질적 상태인 심적 상태도 존재할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초록색 나무를 볼 때, 우리 시각 경험은 ‘초록색 나무’를 표상하고, 우리는 동시에 ‘초록색을 봄’이라는 감각질을 갖게 된다.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이제 헬스나 가볼까
-
물1 화1 하다가 사탐런하는 상경계열 지망생인데요 단순암기 잘하고 이해문제풀이도...
-
큰일났다 7
짜파게티 끓이는데 계란이 없음..
-
예상 미적 1컷 84~85?(수능표본) 전반적으로 계산량이 미쳤고(특히 29 30)...
-
싶다..
-
걍 오늘 공부 쉬엄쉬엄할까
-
ㅇㅇ
-
걍 외워야지 에휴..
-
휴가 얼마 안남아서 그런거같긴한데 아 그냥 만성피로+재수생활ㅈ같음 합쳐져서 조금만...
-
쌍둥이 동생인데 한 명은 국어 수학 100 100 받아왔고 한명은 국어 65 수학...
-
싹다 중간이라 가정하면
-
없으면 만들게
-
하루에 2개씩 풀까.......... 사탐도 해야하는데
-
사탐 가산점있는대학 15
과학유튜브보다가 가슴이 뛰어서 진짜 쌩노베인데 물리 공부해보려고하는데 특정과를...
-
인증 7
을 해볼까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
난이도 편차 뭔데요.. 가끔다가 번호에 +2 해야할것들도있네
-
10 12 21 22틀 ㅅㅂ..
-
대칭키의 보안 취약에 대해 설명한 문단 뒤에 대칭키의 보안 단점을 커버한 공개키예시...
-
불꽃확통+어싸+미적+기하수특 이새끼 뷔페가면 혼절하겠노ㅋㅋ
-
볼텍스푸는중 12
근무하면서 하루에 열개씩만 푸는중인데 퀄이런거는 모루겟고 수1은 참 깔꼬롬햇음
-
다군은 서성한까지만 있는 거로
-
더프로는 보정 3나옴
-
키얼굴대학여친다가진새끼가 가챠겜 2돌로 비틱함 그래서 뒷산에 묻어줌
-
탐구 개념 시작도 안함. 국어 5등급 수준임. 문학 아예 안읽힘
-
유심 교체는 힘들거같고 걍 통신사 이동하려는데 통신사 이동하는 것도 해결책으로 적합한가요?
-
6모전까지 자주는 안 올 듯 아마..?
-
볼텍스 풀까요 6
고민이댑니다 미적임
-
내신 ㅆㅂ 0
3학년때 떨어져서 걍 버려야하나
-
니들은 이런거 걸리지 마라
-
1단원 개념->기출 2단원 개념->기출 아니면 전체 1바퀴 돌리고 1단원 내용...
-
다른거도 어렵긴한데 수2가 ㄹㅇ 손도 못대겟
-
뉴런 0
확통 넘 오랜만에 해서 기본적인 내용도 막 까먹고 뉴런에 약간 이해 안 되는 부분도...
-
언매를 해야겟다 4
아직 개념도 다 못돌림 잣댐
-
너무 무근본 가지치기를 많이해서 좀 생각하고 싶은데 뭔가 유튜브나 강의 중에 이거...
-
동치조건인 명제를 찾는거의 연속인가 님들 이게 본질임?
-
국어 존나 틀렸네 국어는 그대로인게 너무 슬퍼
-
풀어보고싶네
-
로션발라야하나
-
엄청 논리적으로 풀고있지 않았네 아이고 지금이라도 제대로 뜯어 고쳐야겠어요
-
달려볼가 0
휴식 슈웃
-
평타인가요? 희망회로 돌려야지 3.7인거같아요..
-
88점(20,29,30)인데 6평에 이거나오면 1컷 어케될지가 궁금하네
-
ㄹㅇ그래야 운동할듯
-
생윤 윤사는 실개완, 기시감등이 있듯이 사문은 뭐 없나용?
-
정신병 오기 딱 좋음
-
망했다 0
객관식 24개 중에 거의 반타작함
-
언매 언제하지 0
내일은 진짜 진짜 진짜 언매 많이 해야겠다
감사합니다.
1. 위 글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ㅋㅋㅋ
어려워요
철학과 ㄷㄷ
두 편의 글을 읽는데만 17분이 걸렸는데요,
첫번째 지문은 물리주의자의 분파라고 볼 수 있는 비환원적 물리주의가 온건한 물리주의자 될 수 있을만한 근거를 제시하는 과정이라고 봤고
두번째로는 그렇다면 비환원적 물리주의가 온건하면서도 물리적 속성과 비물리적 속성이 구분하기 위해서는 양자를 구분할 수 있는 실체에 대한 속성이 필요하고 이를 발견하는 과정이라고 느꼈습니다.
현대 심리철학에서 정신적인 것과 비정신적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속성은 결국 지향점 혹은 지향적 상태이다.다만 후대의 심리철학에서는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속성이 과연 지향점인지에 대해서 논의가 불거질 것이라고 예상이 됩니다.
저는 이런 글을 좋아해서 다음에 또 새로운 철학 및 심리 주제로 논문 작성해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습니다.
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개강 초기의 열정으로는, 매주 써서 올릴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