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맥주 [1088100] · MS 2021 (수정됨) · 쪽지

2022-11-08 20:48:00
조회수 17,672

기적이 있기는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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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안녕!


여러분들께 무슨 말을 하면 도움이 될까 싶어 


기웃기웃하다가 용기내서 글 써 보아요 :)




이제 수능까지 남은 날짜가 정말 한 자릿수 앞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서,


오르비에서도 종종 'OO일의 기적'이라는 문구가 많이 보이는데


진짜로 기적을 바라서 그런 얘기를 하신다기보다는 ㅠㅠ


기적밖에는 매달릴 곳이 없는 자신의 현실을 자책하는,


약간 그런 맥락에서 이야기들을 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기적이라는 게 있다는 걸 실제로 보았고


그 기적과 매일매일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제가 겪었던 기적이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기적이 감히 저같은 사람에게 오게 되었는지


그 경험담을 한번쯤 진솔하게 얘기해드리고 싶어요.


그러면 두근두근 떨리는 수험생분들의 마음에


다소간 힘을 불어넣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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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겪었던 기적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허드슨 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사건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해 드릴게요.




2009년 1월 15일, 승객과 승무원 155명을 태운 비행기 한 대가


이륙 2분째에 새떼와 충돌해서 엔진 2개가 동시에 멈추었음에도


기장이 실로 놀라운 판단력을 발휘, 기체를 허드슨 강에 무사히 비상 착륙시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없이 승객들이 모두 구출된 사건이었죠.




이 기적을 만들어낸 주역, US Airways 1549편의 기장 설렌버거는


훗날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 비상착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회고했어요


"저는 비행을 40년간 해 오면서 이륙, 비행, 착륙에 대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마치 저축 같은 것이죠. 저는 그 저축을 한꺼번에 인출한 셈입니다.


그러한 경험을 꾸준히 저축해 왔기에, 운명의 그 날에, 승객들을 살릴 수 있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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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위대한 기적이랑 직접 비교할 수야 없겠지만은


이제 제가 겪었던 일을 이야기해 볼까요,



저는 임신하고 나서 양수가 두 번 터졌었는데


첫 양막파수는 임신 20주도 채 되기 전, 어느 날 한밤중에 일어났어요.


보통 임신을 재태주수에 따라서 3개의 시기로 구분하는데,


마지막 삼분기, 즉 28주가 되기 전에 임신에 문제가 발생하면


일반적으로 예후(결과)가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다음날 산부인과 교수님께서 회진 돌러 오셔서,


이렇게 일찍 발생한 양막파수에는 '딱 이거다'하고 입증된 치료법이 없으니


일단 최대한 안정을 취하면서 기다려 보자고 하시는데


정말 억장 와르르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지요




병상에 누워서, 우리 아가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조기양막파수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는데


정말 하나도 희망적인 얘기가 없는 거에요.





(아, 그리고 이 논문에서 생존한 2명의 아기 중 하나는 8주에 하늘나라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후 장기 생존한 아기는 42명 중 단 하나였어요...)



그 때, 혹시나 나중에 최악의 상황이 왔을 때


어떻게 의사결정을 내려야 할지를 마음속으로 생각해 보았어요.



제가 내렸던 결론은,


(1) 어떻게든 하루라도 아가를 뱃속에 더 오래 넣어놓고(?) 있자.


하루라도 더 버텨야 아가의 폐가 조금이라도 더 성숙해지고


그래야, 세상에 나왔을 때 조금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아지니까요


(저 논문에서도, 살아남은 두 아가는 각각 24주, 29주 출생이었어요)



(2) 나 자신과 아가의 생명 사이에서 선택할 순간이 오면


나보다 아가의 목숨을 먼저 생각하자.


저는 이미 대학도 다니고 연애도 해 보았고, 여러 번의 봄과 가을을 보았지만


뱃속의 우리 아가는 한 번도 그런 걸 누려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때 애기를 어떻게든 하루라도 더 뱃속에 있게 하려고


자궁수축억제제를 오래 맞았더니, 심부전이 오고 숨이 너무 차서


난생 처음 중환자실에 입실하는 진귀한 경험(?)도 했지만




심장이 붓고 폐에도 수분이 차고 있어서


교수님 당신이 피가 바짝바짝 마를 지경이니, 그냥 얼른 아가를 꺼내자는 교수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저는 심장이 버텨 주기만 하면 약을 계속 써 달라고 매달렸어요




그때 교수님이 이렇게 자꾸 버티다가 잘못하면 어레스트 난다고!! 화내시길래


제가 웃으면서, 저 PMCD 할 각오도 하고 있어요...! 하고 말하니까


(Postmortem Caesarian Delivery: 산모가 사망한 상태에서 아기를 수술로 꺼내는 걸 말하는거에요)


니 남편한테 다 이르겠다고(그간에 저희 부부랑 친해지셨거든요) 


쌩하니 나가셨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이 모든 순간들이 지나가고


지금, 2.5%의 기적 같은 그 아가는 제 옆에서 오물오물 과자를 먹고 있답니다.


어? 근데 저거 먹으라고 허락한 적 없는데...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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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보니 글이 엄청나게 길어졌네요


그냥 여러분께 뭔가 힘나는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었는데,


갑자기 옛날 생각을 하니까 제 자신이 기특해져서(?) 그랬나봐요! 하하




다만, 지금에 와서 깨닫는 것은


기적이란 게 있긴 있으나, 거저 오는 것은 아니더라- 하는 거여요.


비상 착륙에 성공한 기장님이, 평소에 갈고 닦으신 경험으로 수많은 생명을 구하셨던 것이나


제가 위기의 순간에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에 (& 훌륭한 교수님을 만난 덕분에ㅋㅋㅋ)


저희 귀엽고 오동통한 아기를 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께도, 9일 뒤 운명의 그 날에 기적이 찾아올 거라고 믿어요


나에게는 그런 기적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신다면,


여러분 책장에 수북히 쌓여 있는 책들과, 틈틈이 풀어 봤던 실모들


그리고 공부하느라 포기해야만 했던 넷플릭스 드라마나 웹툰,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당돌하게 생각하세요


'내가 수능 본다고 이 많은 것들을 포기했는데, 설마 하늘이 나를 어엿비 여기지 않으랴!' 하고 말이에요




각자마다 정도는 다를 수 있겠지만, 여기 계신 수험생분들 모두는


이 순간을 위해 많든 적든 무언가를 포기하고 희생해 온 분들이셔요


그 희생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머릿속이 하얘지고 식은땀이 흐르는 시험장에서


본능적으로 여러분의 손을 움직이게 해 주는 힘이 될 거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공부 쪽으로는 더 이상 조언드릴 내용이 없을 것 같아서


이렇게 소심하게 응원단장 역할이라도 해 봅니당!!


모두들 각자의 자리에서 원하시는 결과를 얻길 바라요



안녕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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