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서독 [383625] · MS 2011 · 쪽지

2015-02-21 19:5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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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강민성의 오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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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성의 붕당정치 강의는 식민사관의 당파성론을 비판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일제 사학자들이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이론인 당파성론이 불과 2, 30년전, 우리 아버지 세대까지 통용됐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붕당정치’라는 용어와 개념이 등장했다는 소개와 함께 그의 조선 붕당정치에 대한 수업이 시작된다.



그런데 강민성의 붕당정치 강의는 그 정의를 내리는 데서부터 문제점을 드러낸다. 강민성은 붕당정치가 당파간의 상호 비판과 견제가 공존이라는 틀 안에서 가능했던 정치 형태였다고 설명한다. 이를 통해 식민사관의 당파성론이 주장했던, 조선인들의 분열적인 민족성 때문에 생겨난 당쟁으로 인해 조선이 망국과 파멸의 길로 들어섰으므로 일본이 식민 통치를 통해 구제해 줄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깨부수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실제 붕당정치는 ‘공존’이 가능했던 체제였으므로 그로 인해 ‘파멸’에 이르렀다는 당파성론은 틀렸다는 것이다.

 

분명 붕당정치는 상호 비판과 견제가 공존이라는 틀 안에서 가능했던 정치 체제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는 결코 붕당정치 전체에 해당하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이 점이다. 붕당정치 전체를 ‘공존’의 체제로 볼 수 없음에도 강민성은 공존의 체제로 정의내리고 있는 것이다.

 

강민성의 붕당정치는 숙종조 이전과 이후로만 나뉜다. 숙종조 전까지는 붕당정치 체제로, 그리고 그 이후에는 환국을 통한 일당전제화가 진행되면서 붕당정치가 ‘변질’되기 시작한다고 강의한다. 즉, 숙종조 이전까지는 공존의 체제, 이후에는 변질되어 일당전제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와 다르다. 강민성의 강의대로라면 붕당이 처음 생겨난 선조 8년(1575)부터 숙종 원년(1675)까지 정확히 100년의 기간 동안 붕당정치는 공존의 정치였어야 했다. 그러나 붕당정치가 상호 비판적 공존체제를 유지했던 건 인조조부터 현종조에 이르는 3대 52년의 세월뿐이다(그나마도 인조조에 남인은 서인이 반정으로 인한 정통성의 취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들러리 세운 관제 야당의 역할을 했을 뿐, 본질적으로는 서인 내부에서 반정의 공신 세력인 공서와 비 공신세력인 청서의 대립구도였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인조조 또한 서인과 남인의 상호 비판적 공존체제로 보기 어렵다). 선조 8년부터 광해군조에 이르는 48년의 시간은 결코 상호 비판적 공존체제가 아니었다.

 

강민성이 붕장처지가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강의한 시점인 숙종조에 일어났던 세 번의 환국은 의리나 명분, 혹은 역모를 구실로 상대 붕당을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목숨까지 거둬들일 정도의 치열한 정쟁이었다. 경신환국과 기사환국 당시 화를 입은 서인, 남인 세력이 각각 100여명에 달하고, 남인은 갑술환국 이후로 두 번 다시 정권을 차지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무너졌다.

 

선조 22년(1589) 일어난 정여립의 모반 사건과 그로 인한 기축옥사는 숙종조의 세 번의 환국에 맞먹는 일대사건이었다. 당시는 동인 정권이었고 서인은 조정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던 시기였다. 동, 서 양당의 중재를 위해 밤낮없이 애쓰던 율곡 이이 덕분에 분당(1575) 이후에도 죽여라, 살려라 하는 극단적인 대립은 없었던 양당이었지만 그런 이이마저 죽고 나자(1584) 동인이 정권을 차지하고 서인을 내몰았던 것이다. 정철의 ‘사미인곡’이 쓰였던 시기가 바로 이 즈음이다. 동인에게 내쫓겨 고향에 내려간 정철이 선조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님’에 빗대어 쓴 가사가 바로 ‘사미인곡’인 것이다. 이 부분만 보아도 붕당정치 초기가 상호 비판적 공존체제가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이처럼 정계에서 소외된 서인이 동인에게 품은 악감정은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봇물 터지듯 분출됐다. 본래 정여립은 서인으로 서인의 영수였던 이이, 성혼 등과 교류가 두터웠다. 이이는 정여립의 학문적 성취를 아껴 그를 조정에 천거했고 정여립은 이이를 공자에 비유하며 추켜세웠다. 그런데 이이가 죽고 나자 정여립은 서인에게 등을 돌리고 실권을 쥔 동인에게 갔다. 그러면서 이이를 ‘소인배’라 부르며 비난했다. 선조는 이런 정여립을 배은망덕한 자라며 싫어했고, 정여립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한다.

 

그 이후 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해서 활동했고, 그로 인해 역모로 몰려 끝내 자살하게 된다.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그 진위 여부가 아직도 정확하게 가려지지 않고 있다. 그에게 실제로 모반의 의도가 있었다는 주장과 서인의 모략가인 송익필이 동인을 내쫓고 서인 정권을 세우기 위해 꾸민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후자가 사실이라면 아예 ‘공존’이란 단어 자체를 지워버려야 할 정도가 되지만, 전자가 사실이어도 큰 상관은 없다. 중요한 건 이 사건을 계기로 동인을 향한 서인의 대대적인 반격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동인 정권이었기 때문에 정여립 모반사건에 관련된 일처리 역시 처음에는 동인들이 맡아서 했다. 그러나 성혼의 권유를 받고 고향에서 상경한 정철이 위관인 이산해, 정언신 등이 죄인 정여립과 같은 동인 소속에, 또 당시 우의정이었던 정언신이 정여립의 친척이라는 점 등을 비판한 차자를 올리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선조가 정언신을 파직하고 정철을 우의정에 제수하면서 사건의 위관을 맡긴 것이다.

 

정철의 피의 복수가 시작됐다. 역모에 가담된 자부터 연관조차 없는 이들까지, ‘동인’이라면 모조리 잡아들여 죽이고 봤다. 유배 보냈다 죽이고, 다시 불러들어 때려 죽이고, 주리를 틀어 죽였다.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관되어 죽은 동인과 관련 인물들이 어림잡아 1천여 명에 달했다. 워낙 억울하게 죽어간 동인들이 많아 기축옥사를 ‘사화’로 보는 시각마저 있을 정도다.

 

‘사림’이란 하나의 세력이 분열된 지 겨우 14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축옥사 그 어느 과정에도 ‘공존’의 미학은 엿보이지 않는다. 붕당정치의 변질이라던 숙종조의 환국보다 더한 피바람이 불었다. 과연 이 시기를 공존의 시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를 통해 붕당정치 전체를 ‘공존’의 개념으로 가르치는 강민성의 강의가 갖고 있는 오류를 알 수 있다.



붕당정치에 대해 고종훈의 경우 ‘상호 비판적 공존체제’의 범위를 인조조부터 현종조로 한정하고, 선조조부터 광해군조에 이르기까지를 붕당의 형성기로 정의하고 있는데, 차라리 이렇게 가르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시작부터 변질이라고 가르칠 수야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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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나우리불끄자 · 539506 · 15/02/21 20:01 · MS 2014

    사실 강민성의 스타일은 최대한 블록형식으로 가르치려하시는게 스타일인거같구요...가만보면 동사서독님은 고종훈빠 ㅋㅋㅈㅅ

  • 동사서독 · 383625 · 15/02/21 20:14 · MS 2011

    만약 위의 건에서 고종훈이 틀렸고 강민성이 맞았다면 '고종훈의 오류...'란 제목으로 글을 썼겠죠. ㅎ

    누가 됐건 오개념을 가르치는 건 싫으니까요.

  • 누나우리불끄자 · 539506 · 15/02/21 20:16 · MS 2014

    ㅋㅋ그냥 예전부터 고종훈훌느낌이 강하게나서 ㅠㅠ아니면 ㅈㅅ요 전 민성찡훌이에요

  • 호롱이 · 524426 · 15/02/21 20:43 · MS 2014

    음..... 그렇구나

  • Виктория · 344809 · 15/02/21 22:12 · MS 2010

    이거랑은 다른이야긴데 강민성 강의중에 사도세자 관한 이야기도 이덕일 책 내용 요약해서 말하던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ㅋㅋㅋㅋ

  • 베누 · 418764 · 15/02/22 18:25 · MS 2012

    4대문 얘기할 때도 인,의,예,지 넣어서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 얘기하고 숙정문은 그냥 북쪽에 왕이 있어서 지는 반영이 안됐다 하는데 정작 정(꾀 정)이 지(알 지)의 변형된 사용인지는 모르는 듯ㅋㅋ 강의력은 진짜 엄청 좋은거 인정하는데 내용은 글쎄... 몇 년 돼서 기억이 잘 안나긴 하지만 교수 수업 듣고 보니까 약간은.....ㅎ

    P.S. 그 분께 아무 감정 없음을 명확히 표합니다.

  • 비누도리 · 525296 · 15/02/22 16:51 · MS 2014

    한국사 선택 안해서 모르겠지만 이런거 시험에 안나오지 않나요? 이렇게 세세하게 나오면 서울대를 포기한다는 사람들 많아질듯요

  • 베누 · 418764 · 15/02/22 18:22 · MS 2012

    좋은 글 감사합니다. 문과 할 때 한참 느꼈던 내용들을 다 정리해주셨네요ㅎㅎ

  • 베누 · 418764 · 15/02/22 18:30 · MS 2012

    굉장히 부정적으로 봤던 부분 중 또 하나는 진대법의 시행 계기를 설명할 때 그저 효율적으로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라고만 설명하고 넘어가는데 세계최초의 사회보장법을 그렇게만 매도할 일인가 싶네요. 고국천왕과 재상 을파소가 세금 몇 푼 더 걷기에만 혈안이 돼서 진대법을 만들자고 한것도 아닐 뿐더러 을파소의 출신배경도 뻔히 알텐데.. 현대정치에서 그 분이 좌의 시각이건 말건은 상관없는데 너무 학생들의 시각을 고대사에서부터 갈등론적으로 만드는게 아닐지 싶네요. 기능론이면 수구꼴통이고 갈등론이면 깨어있는 지성인 이건 아닌데...ㅋ
    (전혀 강선생님께 악의를 품고 쓴 글이 아님을 명확히 밝힙니다)

  • 경한의 · 481380 · 15/02/22 19:32 · MS 2013

    솔직히 이과출신이라 역사를따로 공부하진않았지만

    이런글 보니까 재밌네요....

    근데 이덕일이란사람 에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 이사람 책재밌어서 많이사서 봤는데 어떤분은 고대사를 너무미화시킨다고 해서요..

  • 베누 · 418764 · 15/02/22 19:38 · MS 2012

    이게 문과의 재미죠ㅎㅎ
    글쎄요 이덕일 저서에 대해 제가 무슨 식견이 있겠습니까마는 역사서를 한 사람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 한 권만 읽는것은 어쨌든간에 위험하다 봅니다. 교과서마저도 지금은 사 출판사들로 넘어온 마당이니ㅎㅎ
    저는 개인적으로 어느 역사책을 보건 기본적인 프레임이 먼저 정립되어있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를테면 에드먼드 버크의 사상에 대한 이해와 존 로크의 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다면,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fact들만 말해줘도 알아서 connotation까지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