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기행]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을 다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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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이 긴 데 비해 입시에 도움되는 내용은 아니라서... ^^;;
공부에 바쁘신 분들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셔요!
한국사를 공부하는 게 귀찮으신 분들은 읽으면 도움이 되실지도 몰라요 **
오늘은 모처럼만에 쉬는 날이라
아가와 함께 마포 합정동에 있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을 방문했어요.
코로나 걸렸을 때 집에 박혀서 한국사 공부를 하다가
한국인도 아닌 두 사람, 바로 호머 헐버트 박사와 베델 선생님의 유언이
제 마음속 깊이 울렸기 때문에
자가격리가 끝나면 그 유언이 새겨져 있는 묘비를 꼭 보고 싶기도 했고,
또 화창한 날에 아가를 데리고 맑은 곳으로 나가 보고 싶기도 해서 다녀왔어요.^^
(묘원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이 제한되어 있어서,
위에 제가 직접 찍은 입구 안내판을 제외한 아래 묘비들은
홈페이지에서 제공하거나 블로그에 있는 사진들을 가져온 점 양해 부탁드려요)
제 발걸음을 양화진으로 이끈 호머 헐버트 박사의 묘비에요.
헐버트 박사는 조선 최초의 근대식 왕립 교육기관이었던 육영 공원에
영어 선생님으로 와 달라는 요청을 받고 처음으로 조선에 왔고,
이후 본인도 예상치 못할 정도로 깊숙이
한국의 교육, 문화뿐 아니라 정치, 외교 분야에까지 발을 들이게 됩니다.
입에서 입으로만 전하던 민요 ‘아리랑’을 처음 악보로 기록한 분도 헐버트 박사였고,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국어에 띄어쓰기와 쉼표, 마침표 등을 도입한 것과
고종 황제께 건의드려 국문 연구소를 설립한 것도 헐버트 박사의 공로입니다
이 공훈을 인정받아, 훗날 헐버트 박사는 2014년 한글날에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습니다
일제의 조선 침탈 야욕이 본격화되자, 헐버트 박사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는 고종의 밀서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한 사전 작업을 적극 도와,
이준,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의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힘의 논리에 지배당한 외교가에서 헐버트 박사의 말에 귀기울여 주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이후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일제의 압력에 의해 1909년 조선에서 추방당했지만,
그는 고국에 돌아가서도 조선의 일을 자기 나라의 일처럼 걱정해 주었습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할 ‘독립 청원서’를 여운형 선생과 함께 작성하였고,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의 부탁을 받아 이를 지지하는 글을 쓰기도 합니다
1942년 이승만 박사와 함께 한미협회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대한제국 멸망사(The Passing of Korea, 1906)>의 헌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은 옛 한국이 낯선 한국에게 자리를 내주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으나 …
(중략) '잠은 죽음의 모습을 하지만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 국민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그의 예언대로, 대한민국은 긴 잠에서 깨어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고
1949년 7월, 다가오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1주년 기념식 및 광복절 행사에
헐버트 박사는 국빈 자격으로 초대되어 그토록 사랑했던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만
86세 노인에게 배 위에서의 한 달 여행은 씻을 수 없는 여독을 남겼고
“하루바삐 건강을 회복하셔서 전 민족의 환영을 받아 달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에도
한국 땅을 밟은 지 1주일 뒤, 박사는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국빈으로 초청되어 한국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면서, 소회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헐버트 박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영미권에서 가지는 위상을 생각하면,
그분이 한국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절절히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묘비에 새겨져 있는 이 구절이 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사실 이 묘비에는 한 가지 이야기가 더 얽혀 있어요
헐버트 박사께서 돌아가신 뒤, 헐버트 박사의 묘비명은
생전 박사와 친분이 깊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께서 직접 써 주기로 약속하셨는데
이후 1년도 채 안 돼서 발발한 6.25 전쟁과, 이어진 굴곡의 현대사를 겪으면서 그 약속은 서서히 잊혀졌고
50년 후에야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로 ‘헐버트 박사의 묘’ 일곱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민족의 은인께서 마지막 가시는 길에 드렸던 약속을
전쟁과 가난에 시달려, 50년 동안이나 잊고 살았던 것은
우리의 소홀함일까요, 아니면 이 역시 아픈 역사의 일부일까요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은 어니스트 베델 선생님의 묘입니다
우리 학생들에게는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당시 영국과 일본은 영-일 동맹을 체결한 상태였기에
영국인이었던 베델이 일제의 침략을 비판하는 기사를 여과 없이 실어도, 일제가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었기에
베델이 대한매일신보의 발행인으로 있는 것은 큰 방패가 되었습니다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일본 정부는 영국 정부에 그를 처벌해 달라고 제소까지 하여,
베델은 벌금형과 3주 간의 금고형을 선고받기까지 하는 등 고초를 겪었고
결국 베델 선생은 37세의 젊은 나이에 심근비대증으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베델 선생은 병상에서 양기탁 선생의 손을 잡고 다음과 같이 유언하셨습니다:
“나는 죽더라도, 신보(신문)는 영생케 하여 한국의 동포들을 구하게 하시오”
그의 비문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 선생이 쓰셨는데,
이 비문에 베델 선생의 항일 행적이 드러나 있다는 이유로
대한제국을 병합한 뒤, 위 사진에서 보시듯이
일제는 묘비 뒷면 비문을 깎아 버립니다
이후, 깎여나간 비문은 1964년 전국의 언론인들이 성금을 모아
그 옆에 조그만 비석을 따로 세워 비문을 복원했어요
흉측하게 깎여 나간 비석 뒷면을 보면서
비석 뒷면을 깨끗하게 다시 갈고 비문을 새로 새기는 게 낫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외국인 선각자의 비석이
침략자들에 의해 훼손되었던 흔적을 그대로 남겨둠으로써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말자는 교훈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베델은 훗날 조선의 독립에 세운 공훈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는데,
이는 영국인으로서는 유일하며, 연세대학교의 설립자이신 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유이한 서양인 수훈자이십니다
이곳 양화진 선교사묘원에는 언더우드 박사의 묘도 함께 있습니다
여기 찾아오기 전에는 언더우드 박사의 공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는데
그분의 행적을 살펴보니, 어떻게 교육과 선교 활동만으로
박사께서 건국훈장 대통령장까지 추서받으실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어요
부럽읍니다... 연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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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을 둘러보고
이방인으로서 우리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비문들을 읽어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지금까지 살면서 마음속에 가장 깊이 남은 추모비의 구절이
초등학교 때 미국에 여행 가서
워싱턴 D.C.의 한국전쟁 기념관에서 봤었던,
“알지 못했던 나라, 만난 적 없는 사람들(=한국, 한국인)을 지켜달라는
국가의 부름에 응답했던
미합중국의 아들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인데
비록 총과 칼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말의 힘으로, 글의 힘으로, 양심의 힘으로 우리나라를 위해 싸워 주었던 분들께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요새 바깥 날씨가 좋아요, 모두들 산책 한 번 하시고 마저 공부하시길 추천드려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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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댓후감
![](https://s3.orbi.kr/data/emoticons/dangi_animated/026.gif)
한국사책에서 많이 봤던!!!![](https://s3.orbi.kr/data/emoticons/dangi/029.png)
아주 뜻깊은 기행이었네요!사과맥주님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늘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코코호도님^^!!
![](https://s3.orbi.kr/data/emoticons/oribi_animated/006.gif)
어릴적 저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각종 문화와 역사를 체험했는데, 나이가 어느정도 들어사야 그 경험의 소중함과 가치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 것 같네요. 사과맥주님과 같은 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아이는 정말 축복받았다고 생각합니다초등학교 때 워싱턴 DC에서 한국전쟁 기념관을 갔던 경험이
아직도 어렴풋하게나마 감사한 마음으로 남아 있네요
말씀해 주신 대로 저도 딸에게 좋은 교훈을 줄 수 있는 엄마였으면 좋겠어요~^^
초등학교때 미국? 금수저ㄱㅁ
내신때는 외우느라 고생했는데 다시보니까 새롭네요
저 선생님 이때 뵌거같아요! 혹시 몇시쯤??
헉
앗...!!!
지난번 이토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환영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즉, 그렇다면 이등 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성의(聖意)가 강경하여 거절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성립되지 않은 것인 줄 이등 후작 스스로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 자기 일신의 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위협에 겁먹어 머뭇대거나 벌벌 떨며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했던 것이다. 아, 사천 년의 강토와 오백 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이천만 생령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 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 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 폐하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이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이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 사천 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시일야방성대곡, '이 날에 목 놓아 우노라'라는 의미죠...
전 어릴 때부터 저희 할머니와 역사 유적 이곳저곳을 다녀보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관심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혹은 학예사의 꿈을 길러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때는 당시 한능검 고급에 해당했던 1급 자격증을 취득하면서까지 한국사에 대한 열정을 내비쳤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그와 거의 상관없는 진로를 바라고 있지만 지금도 제가 얘기하면서 가장 가슴 뛰는 순간은 제가 누군가에게 우리의 역사를 말해줄 때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당연히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고 그 의미를 가슴 속에 새겨 현대와 미래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과오를 반복할 때도 있지만 분명 좋은 부분도 많은 부분에서 반복돼 왔습니다. 우리는 그 역사를 보고 자랐고, 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후손들이 이 역사를 어떻게 평가하게 될 지는 몰라도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나름 아름답고 예쁘게 가꾸어 나갈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떠나간 선조들 역시 이같은 생각으로 역사를 써서 기록하고 이 기록이 후세에까지 전해지고자 했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한반도의 민족이 아닌 바다 건너에서 넘어온 외국인마저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는 데에 일조한 것을 볼때마다 강한 책임감을 느끼곤 합니다. 내 나라, 내 조국의 사람들을 지키기 전에 다른 나라에 도움을 주어 그 나라에 힘쓰는 모습은 현대 사회에서도 좀처럼 찾기 힘든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런 행적을 보이는 분들이 가히 '위인'이라 불리는 분들이죠. 우리는 이런 위인분들까진 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 한반도의 역사라는 큰 책의 한 줄, 아니 한 글자라도 새겨질 수만 있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고 그만큼 남들을 도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과맥주 누님께선 이전에도 말씀하셨듯이 사람을 살리기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을 해주시고 계시고 그 사명감은 우리나라에 어떤 위기가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으실 것이라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사명감이야말로 제가 말씀드린 현대와 미래를 이끌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단 의사같은 특정 직업만이 아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뿌듯함을 가지고 열심히 해나간다면 그 자체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저도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절대 안일하고, 나태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 행동도 역사에 분명 기록될 것이고, 선조들이 그랬듯이 각자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후손들이 제 이름을 작은 '위인'의 목록 속 한 귀퉁이에서 보게 될테니까요.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안타까운 건, 장지연 선생이 참정대신(한규설)을 극렬히 비판했지만
나중에 장지연 선생도 어용 신문사의 주필로 활동하셨다는 게...
역사에서 심판의 칼날을 쥐고 다른 사람한테 들이댈 때는 정말 조심해야 하는 것 같아요.
나중에 자신도 똑같은 칼날 아래를 지나가야 하니까요...
오 저도 오늘 여기 갔었는데 계속 사진 찍으시던 분 사맥님이셨군요
ㅋㅋㅋㅋ 선생님은 못믿어요 저번에 교보문고 알바 드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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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걱 들켰따![](https://s3.orbi.kr/data/emoticons/2020_new/5_18.png)
애국자이신…![](https://s3.orbi.kr/data/emoticons/dangi_animated/009.gif)
절두산 순교 성지도 한번 방문해보세요!! 가톨릭 신자라서 깨알 홍보해봅니다 ㅋㅋ정말 선교사들은 어쩌면 박토에 뿌리내린 밀알들일지 몰라요..! 뜻깊은 날 보내셨네요 존경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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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집앞이네요ㅋ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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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저도 나중에 꼭 가볼게요!! >_<정성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