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가슴만질래 [401719] · MS 2012 · 쪽지

2014-11-02 0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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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도움되는 자료 -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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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원인

먼저 3.1운동의 근본 원인부터 분석해 보도록 한다.
첫째, 조선이 패망한 이후 일제의 조선에 대한 경제정책은 조선농민들의 토지를 대규모로 약탈하고 잔혹하게 착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05~1908년 동안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을 완성했고 토지령을 반포하고 토지의 자유매매를 허가했다. 결과적으로 농민들은 비록 봉건적 토지관계로부터는 해방되었지만 오히려 이후의 부담은 봉건시대보다 훨씬 더 가중되었다. 토지와 토지 공사에 의해 겸병되고 약탈당했고 중소 지주들 또한 역시 같은 이유로 빠르게 몰락해갔다. 조선총독부는 조선 최대의 지주가 되었는데 ′국유지′라는 명의로 636만 정보(町步)의 토지를 빼앗았다.′무지주(無地主)′의 구호로 767백 정보(町步) 이상의 양전을 몰수하였으며 이것이 소위′●유●(●有●)′로서 조선 토지 전체 면적의 33%를 차지하는 수치이다. 동양척식공사(東洋拓殖公司)가 겸병한 토지는 1910년에 이르면 경지(耕地) 110,350 정보(町步), 1916년에 이르면 733,830 정보(町步)로 증가, 예전보다 약 7배 증가했다.이러한 신속한 토지겸병 과정은 바로 빈농의 증가와 비례했다.
같은 시기에 제 1차 유럽전쟁(제 1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하여 일본자본주의의 발전은 조선에서 엄청난 성과를 거둔다. 한편 조선의 민족자본은 미약했지만 부단히 성장을 해왔다. 그러나 이후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이 자본 5천원 이상의 공사(公司)를 설립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공사령(公司令)′을 선포했다. 취약한 조선자본은 이렇게 마지막으로 치명타를 맞았다.
이러한 강압을 받게 된 조선의 민족 기업가와 농민 그리고 공인(工人)연합은 3.1운동의 기본적 혁명 역량이 되었다.
둘째, 일제는 착취정책을 차례로 진행했고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두 총독은 야만적인 무력통치를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조선민족의 모든 경제 생활의 발전을 방해하고 조선인민들의 정치적 활동을 강압했다. 또한 조선인민들의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박탈했으며 공포스런 학살을 자행하여 동화정책을 강요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민족의 문화를 단절시키려 기도했다. 조선민족은 빈곤과 고통의 깊은 어둠 속에서 신음했으며 분노로 가득차게 되었다.
셋째, 조선혁명운동 중 의병들의 무장투쟁이 실패한 이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여러 선진국에서 새로운 민주 사조를 흡수했고 혁명의 면모를 다시 정리하게 되는 과정을 거쳤다. 중국, 소련, 미국 등 각국의 원조 아래에서 조선인들은 차례로 여러 혁명 단체를 만들었다. 그들은 각국의 혁명경험과 민족운동, 그리고 민주 사조 등을 국내로 들여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후 3.1운동은 청년지식인과 종교단체가 그 길을 여는 선봉에 서게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기본적인 원인 이외에도 3.1운동은 몇가지 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가지고 있다. 유럽전쟁이 끝난 후 윌슨(威爾遜) 대통령은 파리평화회의에서 ′민족자결′의 구호를 제출했다. 이것은 조선인민들에게 매우 큰 격려와 동기를 가져다 주었다.
그 다음 중국의 신문화운동, 소련의 혁명 그리고 일부 소수민족들의 독립은 또한 조선인민들에게 새로운 격려와 믿을을 갖도록 자극했다. 그리고 때마침 이 시기에 일인들에게 저항하여 강제로 선위하게 된 광무(光武)황제가 적에게 암살되었다.
위에서 서술한 기본적인 원인과 직접적인 원인이 결합되어 조선인민들이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때가 도래했다고 느꼈고 위대한 3.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3.1′운동의 경과

′3.1′운동을 주재한 단체는 독립총본부다. 이 단체는 조선 국내의 각종 애국지사 및 지도자들로 조직되었고 해외의 각 혁명단체와 연락하며, 마침내 191 8년 10월 조선 경성에서 비밀조직을 만든다. 당시의 주동 인물은 최남선(崔南善), 현상윤(玄相允), 송진우(宋鎭禹), 최린(崔麟) 등이었다. 그들은 비밀리에 천도교 수령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기독교 지도자 이승훈(李昇熏), 박희도(樸熙道), 함태영(咸台永), 불교 지도자 한운룡(韓雲龍:역자-한용운(韓龍雲)의 오타로 보임), 백용성(白龍城)등과 협의하였고 모두 총본부에 가입하였다. 이들은 공동으로 손병희(孫秉熙)를 지도자로 추대하고 대규모 반일혁명운동을 발동할 것을 준비했다.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는 학생단 및 본국의 각 학생단체들도 총본부의 지령을 받았으며,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 신도들 역시 총본부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에 있었다. 이렇게 임시로 ●●이 가능한 조직을 갖춘 군중은 200만명에 달했고 언제든 각지에서 대혁명이 폭발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1919년 1월 22일, 광무 황제가 적들의 음해를 받고 갑자기 서거하자, 전국의 반일분위기가 끊어 올랐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태세였다. 동시에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의 주장이 있자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핀란드, 중국, 인도, 일본 등지의 혁명운동은 불과 같이 기세등등했다. 이러한 국제적 정치 조류는 조선민족의 혁명적 분노의 파도를 더욱 자극했다. 3월 1일은 광무 황제의 장례일이었기 때문에 독립본부는 3월 1일을 거사일로 결정했고, 전국각지의 단원들에게 밀령을 내려 3월 1일 오후 2시 각지에서 반일의 큰 함성을 외치라고 지시했다. 당시 정해진 구호는 ′조선독립만세′ 단지 하나였다. 이밖에 선전품으로 ′독립선언문′과 ′독립신문′그리고 조선국기 등이 있었다.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먼저 ′3.1′운동의 신호가 터져 나왔다. 오후 2시가 되자 각 학교의 학생들이 줄을 지어 마치 조수처럼 공원을 둘러싸고 들어왔다. 팔각정이 중심이 되어 엄숙하게 대열이 정리되었고 한 청년 지도자가 한 구절 한 구절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군중들은 큰 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조국의 국기를 높이 들고 흔들었다. 그들은 흥분하여 공원을 뛰쳐나와 거리로 나왔으며 수십 만 명의 시민과 함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경성(京城) 거리 거리마다 ′조선독립만세′란 소리가 울려퍼졌으며 일본 헌병은 사방에서 뛰어나와 진압했다. 도처에서 맨손의 군중들과 일본 헌병 사이에 유혈투쟁이 발생했다. ′3.1′ 대혁명의 서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조선민족대표 손병희(孫秉熙) 등 33인은 이날 태화관(太和館)에 모여 독립선언을 선포했다. 이울러 독립을 경축하고 일본총독부에 통지, 이날 거사의 의의를 알렸다.일본은 바로 헌병을 파견해 자동차로 대표 여러사람이 끌고가 감옥에 갇어 두었다.동시에 전국 각지 주요도시와 지방에서 모두 열렬한 반일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빈손으로 적과 맞섰다.
이 전투는 8개월 간이나 계속되었다. 1919년 3월 1일부터 같은 해 5월 말까지 3개월 동안 각지의 반일시위 현황은 아래와 같다.
1. 시위가 일어난 도시 211곳 / 2. 시위의 횟수 1,542차례
3. 시위참가 인원 수 2,023,098명 / 4. 사망자 7,509명
5. 부상자 수 15,961명 / 6. 체포자 수 46,948명
7. 손실된 교회 47곳 / 8. 소실된 학교 수 2곳 / 9. 소실된 민가 715채
이 통계는 단지 3개월 동안의 수치일 뿐이다. 3개월 후에도 시위는 계속되어 5개월 동안 이어졌다. 만일 8개월 동안의 시위를 계산한다면 그 숫자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독립단본부는 ′3.1′운동 거사 이전에 미리 파리평화회의(巴黎和會)에 대표를 파견하고 조선독립문제를 토론해 줄 것을 요구했다. 동시에 다수의 간부들을 해외 각지에 파견하여 각국의 혁명단체들과 독립운동을 진행했다. 그러나 ′3.1′운동 폭발 후 독립단 본부의 다수 간부들이 차례로 체포되어 국내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해외 독립운동의 지도자 이승만(李承晩), 안창호(安昌浩), 이동녕(李東寧), 김규식(金奎植), 이시영(李始榮), 이동휘(李東輝) 등 여러 인사들이 상해(上海)에 모였고 조선임시정부를 조직 독립단본부의 사업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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