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재수 생활 이야기(고대 국문)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4402833
안녕하세요. 오르비 논술팀 강사 정규영입니다.
오늘은 논술 선생이 아닌 여러분들의 선배로서 제 경험을 들려주고자 합니다.
갓 대학에 입학한 따끈따끈한 수기들이 많은데,
저 같은 늙은이의 고전적 수기가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좀 걱정이긴 합니다.
저는 재수했습니다. 고3 때 성적은 반 하위권이었죠. 공부를 못했다고 해서 놀진 않았습니다. 그냥 다른 고3들처럼 야자시간에 야자하고, 모의고사 보고 일희일비(사실 일희 10비 정도..?)하고 인강도 듣고 문제집도 풀고 가끔 땡땡이도 치고, 반성도 하고 앞으로의 각오를 노트 앞장에 적기도 하고 뭐 이런 평범한 고3이었죠.
약간의 굴곡은 있었으나 고3 때 모의고사 성적은 이과 기준으로 수도권 대학에 진학하기 힘든 점수를 유지했습니다.
사실 수능은 좀 더 잘 봤어요. 수도권 공대를 갈 수 있을 정도의 점수가 나왔죠.
저는 맘에 안 찼지만 담임선생님은 매우 만족하셨고, 1년 내내 본 모의고사보다 수능이 잘 나왔다. 이 대학과 이 대학 거기 좋다, 취업 잘된다. 하시며 몇몇 대학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재수한다고 말했을 때 담임선생님은 차분히 제 고3 때 성적을 보여주시며 안 될 거라 단언하셨습니다. 지금의 점수와 이 대학에 만족하라고.
부모님과의 실랑이 끝에 재수를 결정하고,
1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수험 생활 했습니다.
이과에서 문과로 바꿔 본 수능
점수는 고3 때보다 150점 이상 올랐고,
내신 점수에서 조금 감점이 있었으나, 제가 원하는 학교 고려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더 좋은 성과를 만든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더 극적인 사례도 있겠지만
제 경험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재수 생활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전 기숙학원도 다녀보고(한 달이지만), 독학도 해보고, 동네 학원도 다녀봤어요.
1월 달엔 기숙학원에 들어갔지만, 취침 시간이 정해져 있어 제가 하고 싶을 때 공부를 못하게 되어 한 달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3월부턴 독서실 등록하고 혼자 공부했습니다.
오르비에 굉장히 많은 독재생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전 해봤기 때문에 이게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일단 혼자 공부하면
1. 외롭습니다.
학원에 다니고 하면 옆에 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경쟁자 혹은 친구가 있지만 독학 하는 친구들은 그게 없어요.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죠. 모의고사 본 날 같은 경우엔 나도 친구와 점수 얘기도 하고 싶고, 혹은 어떤 문제 어떻게 풀었는지에 관해 토론도 하고 싶고 한데
독학은 그런 것 할 수가 없어요.
2.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흔히 마라톤과 공부를 비교하죠. 근데 마라톤이 훨씬 어려워요 공부보단. 마라톤은 뛰는 척 할 수가 없잖아요. 근데 공부는 공부한 척 할 수가 있어요. 앉아만 있다고 공부한 건 아닌데 혼자 공부할 때 앉아만 있는 시간이 생겼어요.
학원에 다니며 자습하는 학생도 마찬가지긴 하겠지만. 학원 다니고 수업 듣고 하면 딴 생각할 시간이 좀 적잖아요. 근데 독서실에 계속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생각을 하게 되요. 지금은 하라고 해도 못할 것 같은데, 재수 할 땐 3~4시간 씩 다른 생각을 하다 시계 보고 깜짝 놀라고 그런 적도 있습니다. 어디 영화 같은 데 보면 독방에 갇힌 죄수들은 시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고 막 혼자 상상을 하고 환상을 보고 이러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거의 그런 지경이 아니었나 싶네요..
3. 쉬어도 쉬는게 아닙니다.
오르비 친구들은 혼자 쉬면 주로 뭘하나요? 전 가끔씩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이게 사실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닌 상태가 되더군요. ‘아 공부해야 하는데’란 마음과 함께 무한도전을 보는 것이죠. 뭘 해도 맘이 편하지가 않아요. 쉬는 것은 내일부터 더 공부하기 위해 활력을 충전하는 과정인데, 맘이 편하지 않으니 쉬어도 개운하지 않습니다.
전 이런 것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독학 재수가 성공하기 힘들다고 봤어요.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이런 것들을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전 공부하는 것이 재밌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공부가 재밌다. 사실 고3땐 전혀 느껴보지 못했어요. 그냥 지겨웠죠. 배가 매우 부른데 먹기 싫은 햄버거를 억지로 입에 쑤셔 넣는 것 같았어요.
남들보다 재밌게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기초가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혀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못 풀었던 문제를 풀게 되니 재밌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제가 재밌게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재수 생활 하면서 만들었던 노트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 재수 생활 하면서 각 과목마다 노트를 만들었어요. 그 노트는 저만의 참고서였죠.
구성은 주로 이랬어요. 수학을 예를 들어 설명할께요.
전 정석책으로 공부했었는데, 정석책 맨 처음 페이지에 목차가 있었어요. 그 목차를 토대로 제 노트에도 목차를 만들었죠. 각 단원에는 주요 개념과 그 개념에 맞는 문제가 있었어요. 단원에서 꼭 알아야 하는 공식과 그 공식이 도출되는 과정 등을 적어 놓고 그 개념을 통해 해결 할 수 있는 대표 문제를 선별해 오려 붙였습니다.
한 단원이 끝나면 다음 단원으로 넘어갔는데, 제 노트의 한 단원과 다음 단원 사이엔 15장 정도의 빈 공간을 남겨두었어요.
개념 정리가 끝나면 문제를 풀었습니다. 문제를 풀다보면 틀린 문제가 있고 틀리진 않았지만 접근이 힘들었던 문제가 있죠. 그런 문제는 철저히 분석했어요.
계속해서 나오겠지만 분석이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1. 어떤 것을 물어보려 했는가?
2. 물어보려 하는 것을 어떤 모양으로 물어봤는가?
1.은 문제에서 요구하는 개념이 되겠고, 2는 문제의 형태 즉 유형이 되겠습니다.
각 문제마다 이 두 물음에 대한 답을 달았어요.
답을 단 이후에는 그 문제를 오려서 제 노트의 해당 개념을 다룬 페이지에 붙였죠.
한 문제에 여러 개념을 요구한 경우에는 그 밑에 무슨 단원 어떤 개념과 어떤 개념이 필요
이렇게 주석을 달았죠.
이걸 2~3개월 하니까. 정석책 목차가 다 외워졌습니다. 목차만 외운 것이 아니라 각 단원의 주요 개념과 기본 문제까지 머릿속에 들어 있었죠. 그 다음부턴 문제만 풀었어요.
근데 문제를 풀 때 저는 이게 해치워야 하는 적들이라 생각하며 풀지 않았어요.
혹시라도 좋은 문제를 건질 수 있을까?(내 노트에 들어갈)
하는 생각으로 풀었죠. 좋은 문제가 있으면 잘라서 노트에 붙였고요.
수학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 노트 3권정도로 완성했습니다. 그 이후 노트 자체를 요약했고 수능 때는 얇은 노트 한권에 모두 정리했죠.
모든 과목을 이렇게 했습니다.
이런 짓(?)을 하면서 공부하니 성취감도 있고 재미도 있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첫 정리는 6월 모평 전에 끝났고 6월 모의고사 점수는 말도 안 되게 잘나왔어요.
그 후로 좀 풀어졌더니 9월 때 점수가 좀 하락하더군요.
위기의식을 가지고 공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것들을 시도하진 않았어요.
9월부터는 모의고사 푸는 것과 내가 만든 노트 보는 것 두 가지밖에 안했습니다.
각 과목의 노트는 요약을 계속하니 점점 얇아졌고 모든 과목은 얇은 노트 한 권에 압축했습니다.
수능 때 남들은 두꺼운 참고서 몇 권씩 들고 들어갔지만 전 제가 만든 노트들만 가지고 들어갔어요.
수없이 반복했던 내용들이라 수능 시작 10분 전에 보더라도 중요한 개념들을 훑어 볼 수 있었습니다.
공부에는 하나의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했던 방법 또한 정답은 아니겠죠.
하지만 공부는 문제 푸는 것을 반복하는 행위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집을 짓는 것처럼 자신의 머릿속의 개념과 개념을 연결하여 완성하는 것이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각 과목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야 합니다.
수험 생활은 어쩌면 각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공부하는 것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묻고 해답을 찾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지금까지 오래된 고전 수기를 읽어주느라 시간 할애한 학생들에게
제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유대종 언매총론 러닝슛 김승리 올오카 매월승리 앱스키마 아수라 김상훈 문학론 듄탁해...
-
학원에 있다가 밖에 나가면 안경에 김서리고 너뮤 습해서 숨쉬기가 불편해지던데
-
힘든가요???해설지없나요?
-
7모 22는 진짜 곱함수연속성 안뻔하게 개잘냈다..ㅇㅇ 2
이거보다 어렵게는 못낼듯?! 풀고나서 쾌감 미쳤네 뻔한거 다 안되서 생각해보다가...
-
문학고정100 자신있고 확신하는 사람 한국에 없을거라 생각함 워낙 문학 애매한게...
-
그냥 술먹고 집에서 밍기적대다가 접속해봤습니다
-
강민청 강기분 체화가 너무 안 되는 것 같아서 늦긴 했지만 김상훈T 독서론 문학론...
-
ㄹㅇ 개꿀과목
-
문학 연계만 챙길거면 kbs만 들어도됨? 승리커리 안타는사람 기준
-
새벽엔 죽은 자의 영혼이 오르비를 보고 있다는 괴담이
-
반수중인데, 저정도가 목표임
-
??
-
https://www.youtube.com/watch?v=Xop4aK1YVro 3
https://www.youtube.com/watch?v=Xop4aK1YVro...
-
이거좀무섭네
-
영상도 제가 찍은거
-
맏업씀..
-
제곧내
-
우포늪 왁새 0
고2인데 이 지문 왜 이렇게 어렵죠..제가 못하는건가요..?ㅠㅠ
-
강대 시대 0
지금 박종민쌤 미적 정규반 듣는중인데 다음달에 김범준쌤으로 갈타는거 어떤가요?!...
-
칵테일 마시니까 1
금방치함
-
사문 임정환쌤 임팩트까지 다 수강한 상태입니다. 질문 1. 최적쌤 기선제압 강의부터...
-
개학~고2 9평 피램 고전시가, 생각의 발단 고2모 9평 간간히 뽑아서 풀기 중간...
-
주민번호만알면, 수능점수를 누구나 조회할수도있나요??? 1
수능보고 수능점수를 제주민번호를 알고있는 가족이 조회할수도있나요??? 예를들어 저의...
-
10월부터 기출이라도 좀 돌릴까
-
지금 걸어도 되나요?
-
2일차
-
아 0
탈조선 자금 마련하려고 수능 모의고사 문제 만드는 아이러니가 어디 있나. 현타가...
-
ㄷㄷㄷㄷㄷ
-
교재살땐 꼭 1
바로 풀려고 하는걸 사야지 멀리 계획했던거까지 한번에 사버리니 나중에 계획 바뀔때...
-
미적 3점은 다 맞추고 4점 3개중에 0-1개정도 맞추는 실력인데 엔제 추천 부탁드립니다,,
-
고3 현역이고,, 낮1~높2 (97~94)정돈데 수시러라 겨울방학에 올오카 완강했고...
-
키스타입vs리로직 뭐할까여
-
집에서 와이파이가 버벅거리늨게 말이안됨
-
안녕하세요 썰! 입니다:) 저번에 첫 칼럼을 올렸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께서 좋게...
-
이거도 개념마냥 회독 계속 하는 성격의 강의인가요
-
월간 조정식 풀고 있는데 대체 몇분컷 해야할지 모르겟스용… 1등급 맞을라면...
-
4등급이면 워밍업? 빌드업부터 하면 되나요
-
숭실대 문과는 어느정도 돼야 가나요??
-
무잔이다!! 1
녀석은 목을 베어도 죽지 않아!!
-
“메일을 다시 써 보라“ 입갤 이런 거까지 생각해주는 거 고맙긴 한데 진짜 인생 쉽지 않네
-
이거 굴곡없고 무게배분 적당하고 샤프심보호돼서 완전 펜돌리기 최적화 샤픈데
-
현 재수생이고 3~4등급이여서 기출 다시 풀고 분석할려는데 밑에 셋중에서 뭐가 괜찮을까요..?
-
이매진이 그렇게 좋다는데 상상도 오늘 사서 담주부터 올텐데... 매주승리도 나쁘진...
-
쌩독학 중인데 아직 개념 부족한 부분도 있고 기출도 안했어요ㅠ 정우정 쌤 개념기출...
-
국어 과외 3
하거나 받아보신 분 있나요 보통 국어 과외면 뭘 하나요…?
-
인강러들 대충 오늘은 20분정도 오바했는데 수업시작전얘기가 길어서 올라가는건...
-
근데 문제 많이 허술하네요. 어떻게 케이스도 안따지고 풀리게 k에서의 속도를 구하라고 하지…
캬~ 대단하시네요 존경존경
저도 요번에 이과 에서 문과 로 바꿨는데요 ㅋㅋ
아.. 저도 내년엔 꼭 ㅠㅠ 고대!!.
진짜 공부 잘하는 사람들 중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즐기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그 말에 진짜 공감하네요
좋은 방법인것 같네요 참고하겠습니ㄷㅏ!! 진짜 놀때 공감ㅋㅋㅋㅋ 멍때릴때랑..ㅜㅠ요즘 옛날 즐거웠던 일들 생각하면서 혼자 웃고있어요..ㅋㅋㅋ내가생각해도 어이없네요ㅋㅋㅋ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바로 올려주시다니 감동입니다!!!!!!!
좋은 글이네요ㅎㅎ 노트...생각만하고 제대로 활용한적이 없는것같은데 도전해봐야겠습니다
흐엉 독재하는데 외로움 공감 ㅠ ㅠ ㅠ 가끔 전화해주는 친구들없으면 정말 우울증걸릴지도모르겟네요
1,2를 예방하려면 시립도서관에 다니는게 좋은것 같고
3월 예방하려면 주간계획을 모두 끝내면 일요일에 푹 쉬는게 좋죠.
감사합니다!!!!!
읽다가 '혹시 내쪽지가 반영됬나?' 하는 쓸때없는 기대가...ㅎ 아무튼 감사합니다~
저도 꼭 고대에!!
고대합격하고 담임쌤반응이어땟나여?
저랑비슷하셨네요ㅠ 저도 중위권,하위권이과였고요.. 문과로바꿔서 재수했는데.. 올해 삼을 준비하고잇슴니다..하핫..
수학공부를 이렇게 해보려고 하는데요 막상 해보니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구체적으로 만드신수학노트들을 보여주시면 안될까요????
존경합니다. 저는 이과생이고 과학2를 끝까지 고집하면서 독재를 시작해서 해오고 있습니다.
독재의 단점이 절제력이 되지 않으면 쉽게 나약해지더군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