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생 [287204] · MS 2009 · 쪽지

2014-03-06 22: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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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재수 생활 이야기(고대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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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르비 논술팀 강사 정규영입니다.

 

 

오늘은 논술 선생이 아닌 여러분들의 선배로서 제 경험을 들려주고자 합니다.

갓 대학에 입학한 따끈따끈한 수기들이 많은데,

저 같은 늙은이의 고전적 수기가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좀 걱정이긴 합니다.

 

저는 재수했습니다. 3 때 성적은 반 하위권이었죠. 공부를 못했다고 해서 놀진 않았습니다. 그냥 다른 고3들처럼 야자시간에 야자하고, 모의고사 보고 일희일비(사실 일희 10비 정도..?)하고 인강도 듣고 문제집도 풀고 가끔 땡땡이도 치고, 반성도 하고 앞으로의 각오를 노트 앞장에 적기도 하고 뭐 이런 평범한 고3이었죠.

 

약간의 굴곡은 있었으나 고3 때 모의고사 성적은 이과 기준으로 수도권 대학에 진학하기 힘든 점수를 유지했습니다.

 

사실 수능은 좀 더 잘 봤어요. 수도권 공대를 갈 수 있을 정도의 점수가 나왔죠.

저는 맘에 안 찼지만 담임선생님은 매우 만족하셨고, 1년 내내 본 모의고사보다 수능이 잘 나왔다. 이 대학과 이 대학 거기 좋다, 취업 잘된다. 하시며 몇몇 대학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재수한다고 말했을 때 담임선생님은 차분히 제 고3 때 성적을 보여주시며 안 될 거라 단언하셨습니다. 지금의 점수와 이 대학에 만족하라고.

 

부모님과의 실랑이 끝에 재수를 결정하고,

1년 동안 최선을 다해서 수험 생활 했습니다.

 

이과에서 문과로 바꿔 본 수능

점수는 고3 때보다 150점 이상 올랐고,

내신 점수에서 조금 감점이 있었으나, 제가 원하는 학교 고려대학교에 합격했습니다.

 

더 좋은 성과를 만든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더 극적인 사례도 있겠지만

제 경험 또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재수 생활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전 기숙학원도 다녀보고(한 달이지만), 독학도 해보고, 동네 학원도 다녀봤어요.

1월 달엔 기숙학원에 들어갔지만, 취침 시간이 정해져 있어 제가 하고 싶을 때 공부를 못하게 되어 한 달 만에 그만두었습니다.

 

 

 

3월부턴 독서실 등록하고 혼자 공부했습니다.

오르비에 굉장히 많은 독재생들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전 해봤기 때문에 이게 굉장히 힘들다는 것을 알아요.

 

일단 혼자 공부하면

 

1. 외롭습니다.

학원에 다니고 하면 옆에 같은 목표를 향해 가는 경쟁자 혹은 친구가 있지만 독학 하는 친구들은 그게 없어요.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죠. 모의고사 본 날 같은 경우엔 나도 친구와 점수 얘기도 하고 싶고, 혹은 어떤 문제 어떻게 풀었는지에 관해 토론도 하고 싶고 한데

독학은 그런 것 할 수가 없어요.

 

2.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흔히 마라톤과 공부를 비교하죠. 근데 마라톤이 훨씬 어려워요 공부보단. 마라톤은 뛰는 척 할 수가 없잖아요. 근데 공부는 공부한 척 할 수가 있어요. 앉아만 있다고 공부한 건 아닌데 혼자 공부할 때 앉아만 있는 시간이 생겼어요.

학원에 다니며 자습하는 학생도 마찬가지긴 하겠지만. 학원 다니고 수업 듣고 하면 딴 생각할 시간이 좀 적잖아요. 근데 독서실에 계속 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생각을 하게 되요. 지금은 하라고 해도 못할 것 같은데, 재수 할 땐 3~4시간 씩 다른 생각을 하다 시계 보고 깜짝 놀라고 그런 적도 있습니다. 어디 영화 같은 데 보면 독방에 갇힌 죄수들은 시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고 막 혼자 상상을 하고 환상을 보고 이러잖아요. 지금 생각하면 제가 거의 그런 지경이 아니었나 싶네요..

 

3. 쉬어도 쉬는게 아닙니다.

오르비 친구들은 혼자 쉬면 주로 뭘하나요? 전 가끔씩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이게 사실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닌 상태가 되더군요. ‘아 공부해야 하는데란 마음과 함께 무한도전을 보는 것이죠. 뭘 해도 맘이 편하지가 않아요. 쉬는 것은 내일부터 더 공부하기 위해 활력을 충전하는 과정인데, 맘이 편하지 않으니 쉬어도 개운하지 않습니다.

 

 

전 이런 것들을 극복하지 않으면 독학 재수가 성공하기 힘들다고 봤어요.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이런 것들을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전 공부하는 것이 재밌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공부가 재밌다. 사실 고3땐 전혀 느껴보지 못했어요. 그냥 지겨웠죠. 배가 매우 부른데 먹기 싫은 햄버거를 억지로 입에 쑤셔 넣는 것 같았어요.

 

 

남들보다 재밌게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제가 기초가 부족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전혀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못 풀었던 문제를 풀게 되니 재밌었어요.

 



하지만 그것보다 제가 재밌게 공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제가 재수 생활 하면서 만들었던 노트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 재수 생활 하면서 각 과목마다 노트를 만들었어요. 그 노트는 저만의 참고서였죠.

구성은 주로 이랬어요. 수학을 예를 들어 설명할께요.

전 정석책으로 공부했었는데, 정석책 맨 처음 페이지에 목차가 있었어요. 그 목차를 토대로 제 노트에도 목차를 만들었죠. 각 단원에는 주요 개념과 그 개념에 맞는 문제가 있었어요. 단원에서 꼭 알아야 하는 공식과 그 공식이 도출되는 과정 등을 적어 놓고 그 개념을 통해 해결 할 수 있는 대표 문제를 선별해 오려 붙였습니다.

 

한 단원이 끝나면 다음 단원으로 넘어갔는데, 제 노트의 한 단원과 다음 단원 사이엔 15장 정도의 빈 공간을 남겨두었어요.

 

개념 정리가 끝나면 문제를 풀었습니다. 문제를 풀다보면 틀린 문제가 있고 틀리진 않았지만 접근이 힘들었던 문제가 있죠. 그런 문제는 철저히 분석했어요.

 

계속해서 나오겠지만 분석이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1. 어떤 것을 물어보려 했는가?

2. 물어보려 하는 것을 어떤 모양으로 물어봤는가?

 

1.은 문제에서 요구하는 개념이 되겠고, 2는 문제의 형태 즉 유형이 되겠습니다.

각 문제마다 이 두 물음에 대한 답을 달았어요.

 

답을 단 이후에는 그 문제를 오려서 제 노트의 해당 개념을 다룬 페이지에 붙였죠.

한 문제에 여러 개념을 요구한 경우에는 그 밑에 무슨 단원 어떤 개념과 어떤 개념이 필요

이렇게 주석을 달았죠.

 

이걸 2~3개월 하니까. 정석책 목차가 다 외워졌습니다. 목차만 외운 것이 아니라 각 단원의 주요 개념과 기본 문제까지 머릿속에 들어 있었죠. 그 다음부턴 문제만 풀었어요.

 

근데 문제를 풀 때 저는 이게 해치워야 하는 적들이라 생각하며 풀지 않았어요.

혹시라도 좋은 문제를 건질 수 있을까?(내 노트에 들어갈)

하는 생각으로 풀었죠. 좋은 문제가 있으면 잘라서 노트에 붙였고요.

 

수학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 노트 3권정도로 완성했습니다. 그 이후 노트 자체를 요약했고 수능 때는 얇은 노트 한권에 모두 정리했죠.

 

 

모든 과목을 이렇게 했습니다.

 

이런 짓(?)을 하면서 공부하니 성취감도 있고 재미도 있게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첫 정리는 6월 모평 전에 끝났고 6월 모의고사 점수는 말도 안 되게 잘나왔어요.

그 후로 좀 풀어졌더니 9월 때 점수가 좀 하락하더군요.

위기의식을 가지고 공부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한 것들을 시도하진 않았어요.

9월부터는 모의고사 푸는 것과 내가 만든 노트 보는 것 두 가지밖에 안했습니다.

 

 

각 과목의 노트는 요약을 계속하니 점점 얇아졌고 모든 과목은 얇은 노트 한 권에 압축했습니다.

수능 때 남들은 두꺼운 참고서 몇 권씩 들고 들어갔지만 전 제가 만든 노트들만 가지고 들어갔어요.

 

수없이 반복했던 내용들이라 수능 시작 10분 전에 보더라도 중요한 개념들을 훑어 볼 수 있었습니다.

 

 

 

공부에는 하나의 방법이 없습니다.

제가 했던 방법 또한 정답은 아니겠죠.

 

하지만 공부는 문제 푸는 것을 반복하는 행위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집을 짓는 것처럼 자신의 머릿속의 개념과 개념을 연결하여 완성하는 것이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각 과목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야 합니다.

 

수험 생활은 어쩌면 각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공부하는 것이 되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묻고 해답을 찾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쓰다 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지금까지 오래된 고전 수기를 읽어주느라 시간 할애한 학생들에게

제 글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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