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맥주 [1088100] · MS 2021 · 쪽지

2022-01-03 00:17:16
조회수 13,058

원서 969 이야기를 보며 (부모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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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수능을 본 지 13년이 지났구요

다시 13년이 지나면 저희 딸이 수험생이 된답니다

지금은 애기가 편식하는 것, 장난감 던지고 짜증부리는 걸로 훈육하는 것도 어려울 때가 많은데

13년 뒤에 과연 우리 애기는 자라서 성실하게 공부를 할는지 어떨는지,

그리고 만약 성실하게 공부를 한다면, 

대한민국 학생이라면 모두 겪어야 하는 운명의 그 날에

자기가 원하던 성적표를 받아들지, 못 받아들지

그럼 각각의 상황에서 저는 엄마로서 무슨 조언을 해 주어야 하는지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2.

저희 아기는 임신 4개월, 8개월에 양수가 두 번 터졌었어요.

임신 4개월의 양막파수에서 태아의 생존율은 12%에 불과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아기가 버텨 주어서 임신을 무사히 이어갈 수 있었고,

다시 양수가 터졌을 때는 결국 아기를 낳아야 했지만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한 달 만에 인큐베이터에서 무사히 나온 아가를 품에 안았을 때

저희 부부는 아기의 미래에 대한 모든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어요


돌잔치 날 어른들이 

아기가 어떤 물건을 잡았으면 좋겠냐고 물으셨을 때

저희 부부는 돈도 아니고, 연필도 아닌 

명주실(=건강하게 오래 사는 거)을 골랐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다행히 아가는 무탈하게 자라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저는 아직도 우리 아가가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기를 기도하던 그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해요


하지만 이번에 메인에 올라온 글을 읽고 나니까, 다시금 고민이 되네요

만약 부모는 욕심을 내지 않더라도, 나중에 우리 아기가 커서 간절한 꿈이 생긴다면

그런데 그 꿈을 이루는 길이 가시밭길이라면,

엄마로서 저는 그 길 말고 다른 길로 인도하는 것이 사랑일까요

아니면 힘겹더라도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응원하는 것이 사랑일까요



3.

저는 정시가 아니라 수시를 썼기 때문에

원서영역에 대해서 정확히 조언을 드릴 수는 없어요.

정시에 수능 반영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 면접이나 논술 같은 건 있는지

있다면 약 몇 % 확률로 뒤집을 수 있는지... 이제는 전혀 모르거든요.

만약에 조금이라도 뒤집을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저는 무조건 가고 싶은 학교에 걸어 보시라고 말씀드렸을 거에요.


(혹시 궁금하신 분들은 댓글에 요청해 주시면 제 면접 이야기도 나중에 한번 써볼게요...

 제가 면접으로 뒤집고 들어간 케이스거든요. 

 면접으로 내신 뒤집고 지균 붙은거 본적 있? 하하하^^)


수시 원서를 쓸 때, 저희 부모님은 한 3곳 정도 원서를 쓰기를 바라셨었어요.

근데 저는 "그 대학" 한 곳만 쓰겠다고 버텼어요.

부모님은 반대하셨죠. 선발 기준이 너무 뻔한 지균인데, 

그 당시에 내신 1.0만 해도 설의 모집인원 1배수를 거뜬히 넘는다는 소문이 있었던 데다가

정시라는 두번째 기회가 있다고 해도, 수능날 컨디션이라는 게 어떨지 모르는데

정시만 믿고 수시를 한 곳만 쓰는 건 너무 위험하다...

혹시 수능을 망치기라도 하면 정시로는 써 보지도 못할 대학들에 지원해 볼 기회를 날리는 게 아니냐는 말씀이셨는데,합리적인 생각이셨죠.


그에 비하면 제가 내세운 근거는 다분히 감정적이었거든요.

- 난 여기 꼭 다니고 싶고, 수시로 못 붙으면 정시로 도전할 거고, 

  정시로 못 붙으면 그냥 죽어버릴 거다

   (지금 생각하면 천하의 불효자식이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힘들어서 재수를 할 엄두가...) 

  그러니 원서를 더 넣는 게 의미가 없다.

- 일단 1차 서류전형만 통과하면, 어떻게든 나를 붙이고 싶게 어필해 보겠다. 

  면접을 보고 나면 교수님들이 '아... 얘를 떨어뜨리긴 너무 아쉬운데...' 하게 만들어 보겠다. 

  면접을 봤는데도 떨어지면, 이 학교가 나를 떨어뜨려도 별반 아쉽지 않다는 것이니까 

  나도 크게 미련 갖지 않겠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는 제가 들어가려던 대학이 어느 정도의 타이틀인지,

제가 만나게 될 경쟁자들이 얼마나 쟁쟁한 친구들인지 잘 모르고 덤볐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저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했겠지요...?


그런데 부모님은 더 이상 제 원서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이번 신정에 잠깐 친정에 가서 인사를 드렸는데,

그 때 이 글이 생각이 나서 엄마한테 지나가듯이 물어봤어요

내가 그때 원서 가지고 고집을 부렸을 때 마음이 어떠셨는지...

엄마는 제 성격을 알기 때문에 진짜 무슨 일을 저지를까봐 무서웠고

그래서 그날부터 계속 저 몰래 제 맞은편 방에서 주무셨다고 하시더라구요.

하지만 아무리 부모라도 자식의 선택에 간섭할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해서 

만약에 제가 떨어지면 잘 설득해서 재수학원에 보내되, 부모님이 주시는 기회는 두 번까지고

삼수까지 해서 안 되면 그 다음부터는 제가 벌어서 도전하게 해야겠다- 여기까지만 생각해 보셨다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듣고 정말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나중에 저희 애기가 커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저는 그렇게 뒤에서 묵묵히 지켜봐줄 수 있을지

여러 가지 생각을 했어요



4. 

부모가 자녀를 키우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항상 자녀보다 옳다.'라는 고집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핏덩이를 낳아서, 재우고,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옷을 입히고, 씻기고, 학교를 보내고...

이런 철없는 자녀의 모습만 보던 세월이 너무 길다 보니


어느새 자녀는 성인이 되고 자신은 늙었다는 걸 잊어버리는 게 아닐까요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하면

아마 쓰니님의 어머님 아버님 같은 경우도, 

당연한 얘기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자식이 틀렸고 우리가 옳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른 선택을 하도록 고쳐야 한다...

라는 잘못된 고집에 사로잡히신 걸로 생각이 돼요


(더군다나 우리 부모님 세대 분들은, 통계나 데이터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알려 주는 소문이나 정보에 좀 더 혹하는 경향이 있으시더라구요!)


이제 글쓴이님이 후회가 남지 않으려면

정말 오르비언님들이 댓글에 남겨주신 대로, 담임쌤한테 원서비를 빌리든, 피씨방에서 몰래 원서를 넣든

단호한 행동을 취할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두번째 글을 보니, 쓰니님이 원하는 대로 하라고 하셨다고 하니

지금이라도 마음 바꾸셔서 정말 다행이고...

부디 다음번에는 합격했다는 글로 돌아오시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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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원서영역도 다 마감되어 가는 마당에 말이 길어져서 죄송해요

수험생도 해 보았고 서툰 부모 노릇도 하는 중인 사람이라

이쪽 저쪽 입장이 다 이해되다 보니 이런저런 얘기 해 보았네요


오늘도 모두들 좋은 밤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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