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과윤리 개념정리] 왈처의 정의
게시글 주소: https://orbi.kr/00040324857
여러분은 어떤 때에 학교에서 부당하다고 느끼나요?
쌤은 수업 시간에 종종 이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집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어떤 대답을 가장 많이 할 것 같은가요?
바로... "쌤들이 공부 잘하는 애만 편애할 때요!" 라는 대답입니다. 여러분들도 학교에서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나요? 누군가는 특혜를 받고 있는데, 나는 차별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참 견디기 힘든 일이지요.
쌤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 잘하는 학생에 대한 선생님들의 편애가 정말 심했습니다. 지금은 학생들의 성적이 아주 민감한 개인 정보라 공개되지 않죠. 하지만 쌤이 학교에 다닐 땐, 상황이 달랐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전교생의 석차를 대문짝만한 종이에 인쇄하여 중앙 복도에 붙여 놓았습니다. 나의 성적을 다른 친구들이 다 알게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하답니다.
일단 성적표를 받는 과정이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지난번 시험 성적과 비교하여 등수가 떨어진 만큼 담임 선생님께 매를 맞았거든요. 그리고 시험 성적에 따라 교실이 뒤바뀌었답니다. 우등반과 열등반으로 말이지요. 매주 월요일 아침 조회 시간이 되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바둑판처럼 줄을 맞추어 섰습니다. 조회의 절반은 우등생들에게 상장을 나누어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학력 우수상, 전교 회장상, 모범상, 인성상, 창의상 등등 상의 이름은 제각각이었지만, 상을 받는 학생은 매번 똑같았죠. 대다수의 학생들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상을 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영혼이 실려 있지 않은 박수를 쳤지요.(한여름엔 더위를 먹고 픽픽 쓰러지는 학생들도 있었답니다.) 남은 조회 시간은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으로 채워졌습니다. 장황하지만 지루한 훈화의 핵심은 한결같았습니다.
"너희들도 열심히 공부해서 오늘 상을 받은 학생처럼 우리 학교를 빛내야 한다."
당시 학교의 주인공은 단연코 공부 잘하는 소수의 우등생이었습니다. 대다수 학생들의 역할은 조연에 불과했지요. 모든 학교 시스템이 우등생을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지금도 쌤이 억울한 감정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사건이 하나 있답니다. 쌤이 학교에 다닐 때만 하더라도 학교에 에어컨이 없었습니다. 교실 천장에 달려있는 선풍기 두 대가 전부였지요. 학생들은 여름이 되면 집에서 세숫대야를 하나씩 들고 왔습니다. 세숫대야에 발을 담그고 수업을 듣기 위해서였죠.(상상이 안가죠?) 그런데 드디어, 쌤이 고3 때 학교에 에어컨이 설치되었습니다. 특별실이라고 불리던 교실 하나에만 말이죠. 학교에선 에어컨이 설치된 특별실을 어떻게 활용하였을 것 같은가요? 아니나 다를까 우등생 30명이 공부할 수 있는 자습실로 만들어 주었답니다. 대다수의 열등생들이 겨우 세숫대야에 의지하여 더위와 싸우고 있을 때, 소수의 우등생은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책장을 넘겼던 거죠. 그때 처음, 쌤은 '이건 정말 부당하다'라고 느꼈답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을 문제 삼을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에서 지원해 준 에어컨을 독차지하고, 성적과 관련 없는 상들을 싹쓸이하고, 우등반에서 더 좋은 교육을 받고, 학교의 중요한 직책들을 독점한다면...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면 이런 부당한 일을 겪지 않게 될까요?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사회는 더 큰 부당함이 존재한답니다. 돈을 가진 사람들이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있지요.
오늘 만나볼 사상가인마이클 왈처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중대한 문제는 돈의 불평등한 분배만이 아니라 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집중되어 다른 것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의를 해결하는 것은 복합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롤스와 함께 하버드 대학교수로 근무했던왈처는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하였습니다.(롤스, 노직, 왈처가 같은 공간에서 일하며 서로를 비판했다는 것이 재미있지 않나요?) 왈처는롤스의 정의론이 현실적인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이론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롤스는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기 위해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적 상황을 제시하였습니다. 원초적 입장은 무지의 베일에 둘러싸여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롤스는 원초적 입장에서 최소 수혜자에게 이익이 되는 분배의 원칙에 합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왈처는 분배를 통한 사회 정의 실현이 중요하다는 롤스의 생각에는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개인들의 고유한 상황을 무시한 가상적 상황인 원초적 입장에서 도출된 롤스의 정의 원칙에는 반대하였습니다.
왈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사회에는 해당 공동체의 역사적ㆍ문화적 소산인 다양한 사회적 가치가 존재하며, 그 가치마다 그것이 속하는 고유의 영역이 있으므로 서로 다른 영역의 가치는 서로 다른 기준에 의해 분배되어야 한다."
왈처는 정의의 기준이 공동체마다 다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복지의 영역에는 필요에 따른 분배 기준이 적용됩니다. 돈의 영역에는 자유 교환에 따른 분배 기준이 적용되죠. 정치 권력의 영역에는 토론과 민주주의에 따른 분배 기준이 적용되고요. 이처럼 왈처는영역에 따라 다양한 정의의 기준을 적용하는 '다원적 정의'를 제시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병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머리가 아플 때는 두통약을, 배가 아플 때는 소화제를, 열이 날 때는 해열제를 먹어야 하죠.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분배 기준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곳에 적용될 수는 없습니다.
왈처는 모든 사회적 가치를 사회 구성원에게 동일한 분배 기준으로 분배하는 '단순 평등'을 비판하고, 영역별로 각기 고유하고 특수한 다원적인 분배 원칙들을 찾는'복합 평등'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학생이 서울대에 입학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나요? 지적 호기심이 풍부하고, 탐구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서울대에 가는 것이 공정하겠죠. 그런데 만약, 서울대에 들어가는데 지적인 능력보다 부모의 재산이 더 크게 작용한다면,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정치인이 되는 것이 공정할까요? 선거를 통해 국민들에게 정치적인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 정치인이 되는 것이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만약, 정치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사람이 돈으로 정치권력을 휘어 잡을 수 있다면, 과연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왈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영역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 다른 영역의 재화까지 쉽게 소유하는 것을 반대한다.“
왈처가 생각한 현대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돈이라는 사회적 가치가 다른 영역의 가치를 침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왈처는 특정 영역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는 사회적 재화와 가치가 다른 영역의 그것을 획득하는 데 기여할 때, '지배'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지적하였 습니다. 학력이나 정치권력을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이는 경제적 불평등이 또 다른 불평등을 낳게 되는 것이죠. 왈처는 사회적 가치의 다원성을 기초로 하여,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각기 다른 공정한 기준에 따라 사회적 가치가 분배될 때, 사회 정의가 실현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꿈꾸는 이상적인 학교는 어떤 모습인가요? 쌤이 꿈꾸는 이상적인 학교는 자존감이 넘치는 학생들로 가득 찬 학교입니다. 운동을 잘하는 학생은 운동을 잘하는 대로,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은 그림을 잘 그리는 대로, 노래를 잘 부르는 학생은 노래를 잘 부르는 대로 평등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학교입니다. 평범한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무기력감에 빠져 꿈을 잃어버리지 않는 학교입니다. 이러한 학교의 모습이 왈처가 꿈꾸었던 다원적 정의가 실현된 사회가 아닐까요?
0 XDK (+0)
유익한 글을 읽었다면 작성자에게 XDK를 선물하세요.
-
공부를 하루 14시간씩 해도 누구는 의대를 갈 수 있고 누구는 건동홍도 못 갈 수...
-
아.
-
(선지에 오류가 있어 단답형식으로 바꾸었습니다)
-
3-4년전엔 많았다는데 요즘엔 왜 없지
-
난이도: 7.5/10 ※다른거 생각하기 전 n차함수의 최대 실근은 n개이다 생각하기
-
뇌가 썩었다 3
지나가다 이걸 보고 피식하고 접속할 생각을 하다니...
-
저녁 ㅇㅈ 4
오늘은 피자
-
그림을 그려봤어요 12
누군가의 프사
-
04년생 올해 10월 전역에 두번째 수능 준비하고있는 군수생입니다. 목표는 지거국...
-
어지간하면 논술 하는거 추천함 작년에 6모 2틀이던 현역학생 시범수업때 ‘난 정시로...
-
[Zola] 3교육청 6번 틀린 분들(ebs 정답률 41%) 7
답답해서 글을 씁니다. ebs 정답률 41%가 나온 6번 문제입니다. 이 문제...
-
몇점이 나올까요오 알아맞춰보세요오
-
이러다 갑자기 아개어려웠네->1컷 50 이기성 지리단은 해낸다
-
여름 찍먹 시켜주고 다시 겨울됐구나
-
개씹허수결심했다 4
오늘부터 물지 시작. 진짜 미친듯이 해볼게 엄마
-
낮잠 좀만 자고 12
(오르비 +)전공공부를...
-
고의는 복귀하겠다는 학생들 저격 등등 안하고 다 존중한단 분위기던데..
-
가만히 있는데 살 빠지고 싶다
-
2일 1실모 할라는데 작년 강k 구해다가 푸는거 어떻게 생각하세유
-
고2입니다. 모고 치면 문학/비문학 파트는 끽 해야 2-3개 나가는데 자꾸 화작...
-
수능특강 김상훈 0
메가 김상훈 ebs를 부탁해 들을 예정인데요 전용 교재 없이 수특 문학만 사서 강의...
-
궁둥이구멍 2
-
제일학원 아시나 5
대전사람이라 시대재종은 못가서 제일학원 재종갈 생각인데 괜찮을까요?
-
작년거 사서 풀어볼까요? 난이도가 어느정돈가요 이제 막 기출끝낸 3모 공통21틀...
-
3모를 망치고 약대 최저를 못 맞출 경우의 수시 카드도 고려해야겠다는 생각이...
-
볼텍스는 뭐죠 3
생긴 거 보면 그냥 숏컷 mk2 같은데
-
족보닷컴 결제하면 평가문제집 안사도 되나요?
-
의대입결이 향후 떨어진다면 치한약수도 떨어질까요?
-
자신이 없습니다 0
50만명에게 질 자신이..
-
교대지망에 주요과목 내신 3.3 중국어 이런 거 포함하면 4점대인데 내신해야함?...
-
장래희망 2
잠만보
-
천체 계산부분 좀 제대로 잡고싶긴 해요 우주론쪽 개념도 그렇구
-
[2024 김과외 전체1위] 서울대 출신 수만휘멘토 : 수능영어공부법 3번째글 - 문제풀이 및 오답처리와 막판실모 공부방법 0
김과외 진출하자마자 영어 1위, 전과목 통합 1위뿐 아니라 최신 전국연합학력평가...
-
나쁜뜻 아님 게을러서 계산 하는거 싫어함 그래서 억지로 계산줄이는거 많이 베웠음...
-
X스하러 가는중 19
오늘은 전완근이랑 이두삼두 묶어서 하는날
-
좀 낯설고 어려운데 걍 버티면 괜찮아지나요…?
-
오저메는 비빔국수 11
오르비언들 맛저하세요!
-
감사합니다 혐오의시대 님
-
요즘 웹툰은 휴재하고 복귀하면 작가 바뀌는 게 유행임? 1
아니 그림체 왜 다 ㅋㅋㅋㅋ
-
7시
-
오늘 저녁 5
콰트로치즈와퍼 2개 배불러요
-
안녕하세요. 경북대학교 의예과 23학번 지니입니다. 아래는 제 간단한 소개입니다....
-
만들고싶어
-
쩝... 참고로 여기서 '속다'는 '수고하다'라는 뜻으로 '석다(썩다)'에서 왔음
-
궁극의 뉴런 2
4월 5월 두 달동안 완강 가능할까요? 수12,확통입니다.
-
닉변하려 했는데 아 내 별명 https://orbi.kr/00072616295/
-
210921 어떤 풀이를 봐도 찝찝함..
-
오지 개념정도 하고 시즌2 처음 들어가 봤는데 이해되는것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진심...
생윤 선택자는 아닌데 글이 정말 재밌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