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평 킬러지문에 대한 11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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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비클래스에서 독서를 전문적으로 강의하는 이해황입니다.
이 지문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랐을 이야기를 써봅니다.
1. 이 지문의 물리적 근거는 Mark Balaguer 교수가 쓴 『자유의지』(2021년 6월 번역본 출간)입니다. 시험지문의 거의 모든 문장을 책과 1:1 대응시킬 수 있을 정도로 똑같습니다. (딱 한 문장만 제외. 이는 9번 항목에서 다룹니다.)
2. 시험지에 제시된 "딸기 우유"와 "초코 우유"를 선택하는 상황은, 원래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아이스크림" 중 선택하는 상황이었습니다.
3. 시험지에서 ㉠반자유의지 논증을 비판하는 한 입장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지문의 화제는 "자유의지가 있냐 없냐"가 아니라 "자유의지가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입니다. 이는 Mark Balaguer 교수님이 책 결론에서 따로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자유의지』 163쪽
만약 ㉠이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라고 해석한다면 명백한 오류입니다. 지문 내에서 ㉠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한 적이 없고, 이러한 주장이 추론되지도 않습니다. 잘 이해가 안 된다면 선결정 가정이 참으로 밝혀진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그러면 반자유의지 논증을 지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것입니다.
4. 이 지문을 두고 출제기관의 서술 스타일에 대해 왈가왈부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4문단에서 "ⓐ욕구 충족적 자유의지"를 갑자기 설명해서 어색하다고 말하는 분들이 종종 있던데... 제 생각에는 그냥 책 『자유의지』의 논리전개를 따라 지문을 만들다 보니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5. 책에서는 '무작위'의 의미를 네 가지로 나눠서 살펴봅니다. 그런데 시험지문에는 이런 설명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문을 독해하기가 다소 난해합니다.
6-1. 이 글을 본 많은 분들, 특히 국어 강사님들이 『자유의지』를 주문하려 할 것입니다. 아래에서 주문하면 됩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596366
6-2. 참고로 같은 분이 번역한 『마음과 몸의 문제』(The Mind-Body Problem)도 출제가능성이 높은 주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같이 주문하시면 됩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329281
6-3. 저는 출판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어쨌든 양서가 많이 판매되는 건 좋은 일입니다. ㅎㅎ
7. 자유의지는 법적 책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선결정되어 있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범죄자에게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가장 단순한 해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범죄를 저지르기로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되었다고 주장하면 재판관은 이렇게 말하면 될 것이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사형을 선고하기로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_출처: 『읽기만 하면 내 것이 되는 1페이지 철학』(최훈, 2020) 279쪽
8. 시험 지문 중 제가 이해하지 못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만약 ‘내가 자유롭게 선택했다’는 말이 단지 ‘내가 하고자 원했던 것을 했다’는 ⓐ욕구 충족적 자유의지를 의미한다면, 나의 선택이 그 이전 사건들에 의해 선결정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내 자유의지의 산물일 수 있다."
ⓐ는 말 그대로 (선택 전에 존재하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선택이 이뤄집니다. 이는 욕구가 선택을 야기했다는 것이므로, ⓐ는 선결정 가정에 부합합니다.
그리고 (책에 있는 설명은 아니지만) 아래 이미지처럼 어떤 사건이 우연히 욕구와 선택을 각각 선결정했는데, 이 둘이 일치할 수도 있을 겁니다.
"휴대폰 충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여기 서있게 됐지만,
나는 이 그림을 감상하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하는 중이다."
그런데 선결정되어 있지 않은 상황(=무작위 상황)에서도 ⓐ가 성립하는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래서 이 분야의 권위자에게 질의를 했고, ⓐ는 "NOT random" 즉, 무작위가 아니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즉, 지문의 서술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자세한 건 해설강의에서 좀 더 이야기합니다.)
아마도 출제자는 ⓑ자유의지는 선택이 선결정되어 있을 때 성립하지 않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자유의지는 선택이 선결정되어 있을 때도 성립한다는 진술을 하려다가 좀 오바해서 서술한 것 같습니다.
만약 지문이 제대로 쓰였다면, 11번의 ⑤는 공허하게 참(vacuously true)이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선택을 원해서 하고 그 선택이 선결정되어 있지 않다면"이 성립할 수 없는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뒤에 어떤 말이 따라나오든 무조건 ⑤는 참입니다.
※ 오독할 분들이 있을까봐 적어둡니다. 9번 항목은 출제오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시험장에서는 ⓐ가 포함된 문장을 그냥 받아들이고 지나가면 충분했고, 이 경우 문제에도 아무런 오류가 없습니다. 다만, 원저를 읽은 입장에서 눈에 들어온 부분이라 한 번 설명해봤습니다.
9. 이 문항에 딸린 '입증' 문제를 엉터리로 이해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이는 PSAT/LEET에 흔히 나오는 유형이며, 저는 이 유형에 대한 기본서를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이 판매됩니다.)
핵심만 두 가지 짚어보자면,
9-1. 가설이 입증(=강화)되었다는 것은, 가설이 증명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입증은 가설이 참일 확률이 올라갔다는 뜻이고, 증명은 가설이 100% 참인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뜻입니다. 선지의 "참일 수밖에 없다"는 입증이 아니라 증명되었을 때 쓸 수 있는 표현입니다.
9-2. 가설이 입증(=강화)되지 않았다고 하여 바로 그 가설이 약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거짓으로 증명되었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습니다. 강화되지도 약화되지도 않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 이 내용에 대해서는 조만간 제 유튜브에 자세한 내용을 올리겠습니다.
10. 고전논리학에서 "A이면 B이다"(A→B)를 부정한다는 것은 "A이고(인데) B가 아니다"(A&~B)를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따르면 "무작위 가정이 참이면 자유의지가 없다"를 거부하는 ㉠은 "무작위 가정이 참이고, 자유의지가 있다"를 주장하는 셈이 됩니다. 그런데 지문을 보면 ㉠이 무작위 가정이 참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기초적인 논리학을 공부한 분들이라면 이 지점에서 의문을 들었을 수 있습니다.
11. 9평 독서에 대한 제 해설은 아래 국어의 기적 2022(https://class.orbi.kr/course/2063)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위에 쓴 이야기는 내일(13일 월요일) 올라올 해설강의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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