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마렵다 [945562] · MS 2019 (수정됨) · 쪽지

2020-08-12 22:42:14
조회수 11,473

저는 병원장의 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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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정원과 관련된 숱한 논쟁들에서 제가 쓴 댓글들을 보셨을텐데, 

이 글을 마지막으로 그와 관련된 논쟁은 더 이상 그만하려 합니다.


저는 병원장의 아들입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저한테는 의사로서의 정체성보다

사업가로서의 정체성이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 속에서, 단순히 제 이익만을 취하려 한다면 

당연히 의대 정원에는 찬성하는 것이 맞겠죠.

자연스레 근로자의 입장보다는 사용자의 입장에서 병원을 바라봤으니까요.


그러나 저는 지금 의과대학에 속해있고, 

의과대학의 기본 입장은 당연히 "의대 정원 증가 반대"입니다.

상충되는 두 정체성 속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고, 

그래서 더 의대 정원 문제에 대해 더 깊게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의대 정원 증가에 찬성하시는 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논리적이든 아니든

"의사는 이미 돈을 많이 번다", "밥그릇 싸움을 하고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러니했던 것은, 의대 정원 증가와 의사 페이 하락으로 득을 보는 사람은 

일반 국민이 아니라 "병원장"입니다.

"의협"의 밥그릇 싸움에는 철퇴를 날리시는 국민분들이

"병협"의 밥그릇 싸움에는 무한한 지지를 하는 꼴이죠.

다시 말해, 의대 정원 증가는 잘나가는 프롤레타리아인 중산층을 쳐서 

브루주아에게 돈을 주는 정책에 가깝습니다. 

거기에 더해 국민 분들은 의사 유인 수요에 따른 의료비 증가와

공공의대 설립부터 유지, 학생 지원에 드는 모든 돈을

건보료와 세금에서 뜯길 것이 분명하고요.


간단히 요약해서 의대 정원 증대 정책은

1. "국민의 돈을 조금 뜯고" / 2. "의사의 돈을 많이 뜯어" /

 3. "병원장에게 갖다 바치는" 정책입니다.


의료의 질은 어떠해질까요?

OECD 평균 의사 수에 한참 못 미치는 "한, 미, 일의 의료"에서

OECD 평균 의사 수를 뛰어넘는 "이탈리아, 스페인의 의료"로 가는 길이죠.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와 같이 의사의 이기심을 자극하지 못하여

당연히 노동의 질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의사는 때리면 때릴수록 

더 높은 질과 더 낮은 가격의 의료가 나오는 자판기가 아닙니다. 

의사는 다른 사람보다 특별히 착하지도, 특별히 나쁘지도 않은 

이기심을 가진 보통 사람입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선 의대 정원이 늘어나는게 더 낫고,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겠죠.

병원을 물려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의사의 노동소득이 얼마나 변하냐는

제게 큰 영향이 없을 것 같고요.

이러한 입장에서 이낙연과 조국의 딸이 의전원생임에도 

의사를 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것은 정치인도, 의사를 고용하는 사람도 아닌, 

늘어나는 의료 수요와 유럽을 닮아갈 의료의 질을 직접 겪으실 국민분들이

의사를 나쁜 사람으로 몰아가며 의대 증원 정책에 찬성하시는 것이 

안타까워서입니다.

아주 솔직하게는 그냥 이기적인 집단이라고 욕먹기 싫어서요.


"의사의 밥그릇 싸움"이라고 무조건 반대하실 것이라면,

"우리나라의 모든 병원을 없앤다"는 정책이 나온다고 가정하여도,

"의사는 밥그릇 때문에 반대할 것이니" 찬성하실 건가요?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의사라는 직업은

훨씬 가파르게 추락할 것이고

우리나라의 의료 또한 시시각각 변할 것입니다.


찬성과 반대는 여러분들의 몫이지만, 

단순히 "의사가 돈을 많이 벌어서" 반대하시는 것이라면,

고개를 들어 "의사가 돈을 못 버는" 나라를 보세요. 

우리나라 의료의 미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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