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베이스2학년 [883037] · MS 2019 · 쪽지

2020-07-21 01: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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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고 씹쏘름 돋았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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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행


김광규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느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다오


농악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 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라고 말해 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해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시집 반달곰에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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