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more [928798] · MS 2019 (수정됨) · 쪽지

2020-04-08 06:3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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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타, 눈을 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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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내내 병이 돌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니던 학원이 모두 휴무한 한 히키치타에게는

꼭 그렇게 생각되지만은 않았다

그로 말하자면 원래 꾸준함이랑 거리가 먼 위인으로

직관과 감각의 풀이를 선호했고

침대 속 게으름의 관성을 사랑했고

내로라하는 정시파이터였으니

오르비를 실명으로 가입하지 않아 에피를 못 단

비극적인 내막도 가지고 있었다

하여간 허공에 붕 뜬 고삼치타는

일말의 강제성도 없이 자유롭다 보니

결국 생활이 씹창나고 말았다

안락한 집에 몸을 쭉 뻗고 잉여롭게 지내며

넷플릭스의 새 시리즈를 몰아 보고

인터넷 세계의 곳곳을 탐방했지만

메가패스는 한 차례도 쓰지 않았다

하루 평균 두 끼를 먹고 열 시간 취침했으며

노트북과 늘 함께하여 시력은 저하됐으나

모두 부차적인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난 한 달 간

한 문제도 풀지 않았던 것이다.

단 한 문제도!

그러나 무감각한 치타는 어제만 해도

열두 시간 자고 일어나 밥 한 끼를 먹고

앉은 자리에서 영화 네 편을 봤으니

이대로 시대인재 재종반 프리패스를 끊을지

세간의 집중조차 없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방금 전의 일이었다

아무리 노답인생이라 해도

마지막 남은 한 줌 양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웹게임 로딩을 기다리다 별 생각 없이 쎈을 펼쳤고

한 문제에 시선이 갔으며

치욕을 맛보았다

B스텝 대표문제를 답지 없이 푸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치타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오 내가 좆되다니

오 이 내가 좆되다니

노트북을 덮고 다음 문제에 달려들어 봤지만

무력하게 나가떨어질 뿐이었다

홀로 깬 오밤중

쎈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부정하고 분노하고

관둘까 생각하고 우울해하다

치타는 국밥 한 뚝배기를 하러 갔다

뜨끈한 순대국밥을 말아먹고 나서야 그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새벽의 거리를 받아들였다

바람이 분다......

뛰어야겠다!

치타가 눈을 떴다

빛에 익숙해지자 세상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주견들은 이미 달리고 있으니

이제 그가 시작할 차례다

아직은 일어서는 것조차 힘겹지만

결국 뜀박질을 하리라

경주견들아, 간절히 기도하도록 해라

자신이 충분한 거리를 벌렸기를

레이스의 짜릿함을 위한 제물이 되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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