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기사들은 전부 천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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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바둑기사들 중에서 최상위권들은 정말 뛰어난 지능을 가졌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저도 잘은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은 최소 IQ 140은 가뿐하게 넘을 꺼라고 봅니다.
가끔 바둑 기사들이 일반인을 상대로 한꺼번에 여러명과 동시 대국을 하는 것, 또는 빽빽히 놓여진 바둑판을 전부 암기해버리는 것 등을 보면 프로바둑기사들은 모두 암기력이 미쳐 돌아가는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한때 세계 최정상까지 올랐던 이세돌 9단. 알파고와의 대국으로도 대중에게 큰 인기를 얻었었습니다)
제가 어릴때 다니던 바둑학원의 선생님도 일반인 10명과 동시에 대국을 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10명이 전부 10가지 바둑판에 앉아있고, 거기에 선생님이 옆자리로 계속 이동하면서 동시에 10명과 대국을 벌이는데 프로들은 이런걸 자주 합니다.
그런데 웃긴게 거기서 어느 한분이 슬쩍 선생님이 안보는 사이에 돌의 위치를 바꿔놓아도, 선생님은 칼같이 그걸 찾아내서 원래 위치에 옮겨놨답니다. 이 바둑 선생님도 천재여서 10가지 바둑판을 전부 암기하고 있었기에 가능했을까요?
바둑에도 각자의 개성과 성격이 잘 드러난다고 합니다. 과거 한국 바둑의 전성기를 시작한 조훈현 9단, 그 밑에서 자란 이창호 9단은 서로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훈현 9단은 말도 느리고 행동도 느린 제자 이창호를 보면서 처음에는 천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 이창호 9단은 끝까지 인내하면서,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승률이 높은 수를 두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큰 차이로 이기지 못하더라도, 아주 미세한 반집으로도 이길 수 있으면 상대의 도발에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바둑을 이어나간걸로 유명합니다.
표정도 늘 한결같고, 화려한 전투를 즐기던 다른 프로기사들과는 달리 묵묵히 인내하는 이창호 9단의 별명은 돌부처였고, 알파고는 이창호 9단의 안정적, 승리지향적 성격을 닮았다고 평가받습니다.
(조훈현 9단의 제자로로서 자신의 스승의 전성기를 무너뜨리고 한국 바둑을 빛낸 이창호 9단은 위험과 모험을 지양하고 안정적인 바둑으로 전세계를 흔들었습니다)
바둑은 체스나 장기보다도 경우의 수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바둑은 모든 수 하나하나가 즉흥적이며, 다 창의적이고 개성적이고 새로울까요? 프로 바둑기사들은 그때그때 대국마다 새로운 수를 찾아내서 두는 걸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절대 아니다'입니다. 바둑의 세계에도 엄연히 정석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어느정도 통용되는 상식과 관행, 습관이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인공지능 '한돌'과 은퇴대국을 두고 있는 이세돌 9단이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2019년 12월 18일 벌어진 한돌과의 1국을 승리하고 나서 말하길
"78수는 프로 기사들이라면 당연히 생각하는 수였다"라는 대사를 합니다.
(가로세로 19줄짜리 바둑 판에서 빽빽히 흑돌과 백돌이 놓여있는 바둑판을 보면, 저걸 대체 어떻게 외우는가 싶은데 외는 사람도 있습니다
http://www.bloter.net/archives/329472 )
이세돌 9단의 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수험생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자주 들었던 예시가 지금 학생들이 중학교에서 배웠을 '약수개수 구하기 문제'있죠. '약수개수 구하기 문제'의 풀이법은 명쾌합니다. 무슨 숫자가 나오건 소인수분해해서 지수에 1씩 더하고 곱한다.
이 문제의 해법은 아주 유명하게 알려져있으며, 제가 그 문제를 풀던 여러분이 풀던 수학 선생님이 풀던 다 똑같습니다. 누구든지 해당 유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일단 소인수분해를 하면서 시작해야함을 알고 있습니다.
약수개수 구하기 문제에 도함수나 미적분을 끌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창의적인걸까요? 이건 창의적인 것이 아니라 엉뚱한 것이고, 명백히 비논리적인 행동입니다. 누구나 소인수분해를 이용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전혀 쌩뚱맞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이 행동은 틀린 행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둑의 세계에서도 정석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이런 문제상황에서는 보통 이런 풀이를 가져와서 풀어야 한다는 약속이 자연스럽게 정해져있습니다. 그리고 프로 기사들은 그런 풀이에 대해서 훤히 꿰뚫고 있으며, 그래서 '당연하다'라는 표현을 쓴거죠.
(설마 약수개수 구하기 문제에 미적분따위를 끌고오는 사람은 없겠죠. 조금만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소인수분해하고 지수를 찾고 연산을 할 것입니다. '당연히'
http://study.zum.com/book/12169 )
인간이 사는 세상은 정말 복잡하고 고려해야할 요소도 많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것들이 매일매일 새롭고 전혀 색다른 것은 아닙니다. 어제한 일과 비슷한 일이 오늘도 벌어지고, 그럼 어제 대응한 대로 비슷하게 대응하면 대충 해결이 되겠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바둑기사들은 천재여서 저 바둑판을 전부 외우던 걸까요? 우리 바둑 선생님은 10가지 바둑판의 진행상황을 전부 딸딸딸 외우고 있어서 슬쩍 위치가 바뀐걸 찾아낸걸까요?
물론 최정상 바둑 기사들은 그정도는 암기할 머리가 되긴 하겠지만, 모든 바둑 기사들이 모든 상황을 외우며 살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바둑판은 '당연한 것'들의 모임입니다.
상대방이 내 허를 찌르고 들어왔다. 그럼 대충 생각이 들겠죠 막거나 포기하거나. 그럼 그에 따라 대응해야하는 경우의 수가 확 좁혀지고, 거기서 자신의 성향에 따라 선택을 할 것입니다.
그걸 보는 해설은 거꾸로 음... 저 기사는 이런 생각을 해서 저런 수를 두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죠. 바둑기사들이 두는 수가 모두가 엉뚱하고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게 두겠거니 하는 근거가 존재하는 선택들입니다.
그럼 거꾸로 바둑판의 상황 전개를 중간에 보고 나서도,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충분히 유추가 되겠죠. 아 지금 결과를 보니까, 처음에 쟤가 이렇게 들어오고 얘가 요렇게 막고 그 이후로 계속 이리이리 전개되다보니 결국 지금 이 모양이 되겠구나~라고.
(바둑판을 통째로 암기하는게 아닙니다. 당연히 이렇게 될 것이리라 생각하고 그에 따라 추론하는 것입니다. 제가 10의 약수개수 구하는 문제를 외워서 풉니까? 10의 약수개수가 4라는걸 미리 다 외워두고 문제를 푸나요?
https://www.coindeskkorea.com/29164/ )
바둑기사들이 모두 천재라서 바둑판을 다 외우고 사는게 아닙니다. 그 사람들에게는 정석적으로 '당연히 그 문제에 대해서는 그런 해법을 써야한다'는 약속이 학습되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20의 약수개수를 구하는 문제에 소인수분해를 이용한 풀이 과정을 메모해두었다면, 전 그걸 보고 아~ 이걸 이런 생각을 하면서 풀었겠구나~ 하면서 그 과정을 똑같이 써내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천재라서 그 메모를 보고 5초만에 외워서 똑같이 적은 걸까요?
아닙니다. 전 그 문제의 해법이 대략 어떻게 되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고, 풀이를 보니까 문제푼 사람도 내 생각이랑 똑같이 풀었네 하고 그 사람의 풀이과정을 똑같이 써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암기하는게 아니에요 저나 바둑기사들은. 다 '당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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