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기습시위'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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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20여 개 장애인 관련 단체가 연대한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가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을 찾았습니다. 이날 당사 앞에선 민주당 행사인 ‘목포에서 봉하까지 민주주의의 길 출정식’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터전을 찾아가는 2박 3일 간의 행사가 시작되기 전 의지를 다지는 행사에 이해찬 대표도 참석했습니다. 출정식 말미에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 관계자 한 명이 이해찬 대표 앞으로 뛰어가 기습 시위를 펼쳤습니다.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는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도입되는 정책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시각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고 항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해찬 대표는 당사로 피신했고, 함께 들어가려는 연대 관계자들과 이를 막으려는 경찰이 엉켜 고성이 오갔습니다.
그런데 TV조선과 MBN이 이 사건을 전하면서 ‘이해찬 대표가 봉변을 당했다’, ‘기습 항의를 받았다’는 데 방점을 찍었습니다. 이런 보도 행태로 인해 국민은 시각장애인 단체가 이해찬 대표 개인을 겨냥해서 일방적으로 항의한 것처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사안인 시각장애인 단체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전달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무슨 요구를 했는지, 어떤 일을 어떻게 보도한 것인지 알아보겠습니다.
TV조선 “이해찬 기습 항의 받아”‧MBN “이해찬 봉변”
MBN <이해찬에 기습 시위>(5/21 이동화 기자)에서는 이날 이해찬 대표가 “장애인 단체가 주최한 기습시위로 봉변을 당했다”고 표현했습니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봉변당하다’의 뜻은 ‘뜻밖의 사고나 망신스러운 일을 당하다’입니다.
이동화 기자는 리포트에서 “행사가 마무리될 무렵, 갑자기 한 시각장애인 단체 관계자가 이 대표 앞으로 찾아와 기습 시위를 벌입니다. 이 대표가 자리를 피해 당사로 들어가면서 장애인 단체 관계자가 쫓아 들어가려고 하지만 경찰에 제지 당합니다”라고 현장을 소개했습니다. 이어서 “시각장애인 단체들은 올해 7월부터 보건복지부가 새롭게 마련한 활동지원서비스로 오히려 혜택이 줄어들게 됐다며 지속적으로 반발해왔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시각장애인들의 목소리를 전한 부분은 이 한 마디가 전부입니다. 어수선하게 보였던 상황은 길게 전하고, 기습 시위를 한 연대의 입장과 그 이유는 짧게 전한 것입니다.
TV조선 또한 <기습 항의 받은 이해찬>(5/21 서주민 기자)이라는 제목을 달아 이해찬 대표가 ‘기습 항의’를 받았다고 강조했습니다. 신동욱 앵커는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당 행사를 하던 도중 시각장애인 단체로부터 기습 항의를 받았습니다”라면서 “앞서 지난 2월 다른 장애인 단체도 이 대표에게 시위를 하며 항의하는 일이 있었죠”라고 덧붙였습니다. 2월에 어떤 장애인 단체가, 무슨 이유로 항의했는지는 설명이 없었습니다. ‘이해찬 대표가 장애인 단체로부터 자주 항의를 받고 있다’는 식의 묘사만 강조한 겁니다. 리포트에서는 “(민주당) 당사 앞은 아수라장”이라는 표현과 함께 장애인 단체 회원들이 “들어갈 거야!!”, “밀지마요! 밀지마요!”라고 외치는 장면, 경찰과 뒤엉켜 넘어지는 장면을 넣었습니다. MBN보다 더 ‘물리적 충돌’이라는 묘사에 초점을 맞춘 겁니다.
그나마 TV조선이 MBN보다 장애인 단체의 목소리를 많이 담긴 했습니다. TV조선은 이들이 “정부가 돌봄 서비스 수요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시각장애인의 특성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시위에 나온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 강윤택 대표의 “제가 전혀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입니다. 불빛도 안 보여요. 그런데 현행 나와 있는 서비스지원 인정조사 문항으로만 적용을 하면 (돌봄 서비스 혜택이) 반 정도로 줄어듭니다”라는 발언도 실었습니다. 그러나 장애인 단체의 목소리는 ‘이해찬 대표가 항의를 받았다’는 이 기사에서만 다뤄졌을 뿐, 다른 기사를 통해 조명되진 않았습니다.
장애인들의 진짜 요구, ‘우리의 필요와 욕구에 응해달라’
이처럼 시각장애인 단체의 목소리를 간단하게 전하면서 ‘이해찬 대표에 기습 시위’를 했다는 묘사에만 몰두한 보도로는 도대체 무슨 사연인지 국민은 제대로 인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간의 사정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지난 2월 1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의 장애인 단체는 용산역에 천막을 치고 설 인사를 하기 위해 용산역을 찾을 이해찬 대표를 기다렸습니다. 장애인의 목소리를 담는 인터넷 매체 비마이너의 <장애인들이 농성하면서까지 이해찬 더민주 당대표와 만나려는 이유>(1/31 최한별 기자)에 따르면 그들은 “20대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은 ‘장애등급제 폐지’를 주요 장애인 정책으로 공약하고 집권당이 된 이후에도 관련된 제도 개편 등에 힘 쏟을 것을 약속했다”며 희망을 가졌던 일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2018년 국회 예산 심의에서 장애인 연금 대상 확대와 장애인 활동 지원 24시간 보장, 그리고 발달장애인 주간 활동 지원, 탈시설 관련 예산이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밀실야합으로 줄줄이 삭감되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는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해찬 대표와 면담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지난 21일 시각장애인들이 이해찬 대표에 요구한 것도 비슷한 취지입니다. ‘시각장애연권리보장연대’는 오는 7월 장애등급제 폐지 이후 실시되는 ‘서비스 지원 종합조사’에서 이를 조사하는 항목, 즉 일종의 평가표가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이해 없이 구성됐다며 이를 개선해야 한다고 정부에 요구해 왔습니다. 장애등급을 폐지하고 실제 장애인들이 필요한 서비스를 조사해 지원하는 근거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항목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모호하고 편협하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평가 항목은 신체 기능 장애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옷 갈아입기’와 ‘식사하기’ 등 포괄적 평가 항목으로는 시각, 청각 등 다양한 장애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기 어렵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옷 갈아입기’의 불편함을 묻는 문항에서 시각장애인은 ‘갈아입는 행위 자체’가 다른 장애인에 비해 덜 불편할 수도 있으나 옷을 선택하거나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각장애인의 필요와 욕구에 분명하게 반응해 달라는 것이 그들의 요구입니다.
사라진 장애인들의 목소리, ‘장애 인권’은 사회 모두의 책임
TV조선과 MBN이 담지 않았던 더 상세한 내용, 시청자들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는 장애인들의 주장은 미디어오늘의 <영상/이해찬 앞 기습시위에 경청‧설득의 힘 보여준 김성환 의원>(5/21)에 실렸습니다. 미디어오늘 보도에서는 당시 상황 중 20여분 정도가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이를 보면 시각장애인 단체가 무엇을 요구했는지, 여기에 여당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수선해진 상황 초반, 시각장애인권리보장연대 소속 시각장애인들과 장애인 학부모들은 “얘기를 듣고 싶으면 대표님 오세요”라고 요구했습니다. 끝까지 이해찬 대표를 만나겠다고 했지만 앞에 나선 사람은 당 대표 비서실장인 김성환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해서는 대표님이 절대 만나지 않으시니 정식 요청을 해 달라’고 다시 요구했고, 여기에 한 연대 관계자는 “정식으로 요청을 하면 들어준다고, 들어준다고 했는데 결국에 안 들어주니까 저희가 이렇게 온 거 아닙니까!”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민주당뿐만 아니라 모든 국회의원들을 타깃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바로 이어 한 학부모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저희가 국회 모든 의원님께 면담 요청을 팩스로 다 넣었습니다. 전화통화도 했고. 그런데 각 의원실 마다 다 얘기를 안 했습니다, 저희한테. 다들 바쁘시다고. (의원한테 우리의 요구가) 전달이 안 되고.” “그냥 무작정 말만 들으라 그러고.”
즉, 국회의원 모두에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요구했으나 그들에게 돌아온 답은 ‘무응답’이었다는 겁니다. 여기에 김성환 의원이 ‘상임위 별로, 의원 별로 역할이 다 다르다. 장애인 관련 사안은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산하의 일이다’라고 설명하자, 학부모들은 “보건복지부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이어 학부모들은 “장애인 등급제를 폐지하는 과정에서 시각장애인만 불인정한 인정 조사표다. 작년 7월에 우리가 문제제기를 했고, 보건복지부 국장과 과장이 다 나와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이후 올 4월에 보건복지부와 장애인개발원이 다시 발표했으나 전혀 시정조치가 안 돼 있었다”라고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한 학부모가 울먹이며 계속 얘기를 이어 나갔습니다.
“보건복지부는 더 괘씸합니다. 작년 7월에 의견 제기 했습니다.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올 4월에 결과 나왔습니다. 반영이 안 됐습니다. (중략) 작년 것과 올해 것을 비교해 보십시오. 저희가 청와대에도 민원을 내놓고 지금 각 의원실로 인정 조사표 관련해서 시각장애인 특성을 반영해달라고, 저희가 보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두들겨도, 아무도, 아무도, 저희 얘기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여기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정 조사표를 만든 보건복지부도, 국회의원도 아무도 시각장애인의 특성을 조사에 반영해달라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실현해 나가야 할 인간의 권리인데, 해결의 실마리를 쥔 정부와 국회가 나 몰라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다 지켜보고 들은 김성환 의원은 자신의 직통 전화가 적힌 명함을 학부모들에게 건네며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1주일 내로, 학부모들과 여당의 정책위원회 의장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남인순 최고위원, 그리고 보건복지부의 책임자를 불러 공식 회의를 잡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래도 도저히 풀릴 기미가 없으면 당 대표가 직접 나설 수 있도록 하겠다며 회의 약속은 하루 내로 잡아서 전달하겠다고 했습니다.
김성환 의원의 약속이 있은 후 학부모들은 희망을 안고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마지막에 한 학부모는 “죄송해요. 새끼 지킬 방법이 이것밖에 안 돼서. (국회의원들한테) 만나자고 해도 안 만나줘요”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며 진심으로 약속한 여당에 장애인 학부모들의 마음이 누그러진 것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알고 보면 TV조선과 MBN의 보도가 얼마나 편협했는지, 얼마나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이해찬 대표와 여당에게만 주어진 책임이 아닙니다. 국회와 정부, 넓게는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갖고 당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장애 인권 보장은 우리 모두의 인권을 보장하는 길입니다. 장애인 단체의 주장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그들은 장애등급제를 ‘진짜’ 폐지해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괜찮은 글이어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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